[이상, 다시 날다] 가장 난해하고 전위적 텍스트, 모든 연구 방법론을 동원하다

박태원과
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변주가 시도된 분야는 단연 문학이다. 그가 남긴 시와 소설은 사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문학계에서 가장 난해한 텍스트로 꼽힌다.

그의 개인사에 근거해 작품이 해석되는가 하면, 1930년대란 모더니즘의 공간에서 풀이하기도 하며 숫자, 기호, 도상, 건축학적 개념 등이 이용된 의 시 성격과 관련해 상호매체성 연구도 진행돼 왔다.

한 마디로 은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거의 모든 연구방법론이 동원돼 분석되고 있는 유일한 작가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왜, 인가?

은 1931년 <조선과 건축>에 '한 가역반응'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는 한국문학사에서 한국시가 '현대시'의 이름에 걸맞은 다양한 경향이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시기다. 김소월, 한용운 등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감수성을 벗어나 근대문명과 접촉 속에 도시적 삶에서 비롯되는 감수성, 이른바 모더니티에 대한 감각과 문제의식이 한국시 속에 들어온 시기가 1930년대다.

함돈균 문학평론가는 "의 텍스트는 미적 모더니티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으며, 문제의식이나 방법론에서 가장 전위적인 텍스트"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의 시 모티프와 문제의식은 '과학, 병, 성(性), 도시'에 집중돼 있는데, 이 4가지 모티프는 현재까지 현대문학의 핵심 주제로 작용한다. 은 이런 핵심적 모티프 대부분을 시의 중심 주제로 포섭한 최초의 시인 중 하나다.

새로운 시대가 열릴 때마다 의 작품이 재해석되는 까닭은 내용과 형식의 난해성에서 비롯된다. 낯설기 때문에 난해하고, 낯설고 난해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매혹과 반발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대표작 '오감도(烏瞰圖)-시제사호(時第四號)'에서 보듯, 그는 수학과 도표 등 '언어'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함돈균 평론가는 " 시의 난해성은 단지 방법론적 해체를 추구했다는 측면을 넘어서 무의식의 기저에서 발생하는 어떤 정신의 흐름에 자신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개방했다는 사실이다. 무의식의 개방에 관해서라면 지금도 현대문학사 100년의 극단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그의 소설은 어떨까? 허윤진 문학평론가는 "동시대 작가들 중 박태원은 과 상당히 비슷한 면모를 보인다. 박태원을 제외한다면, 은 동시대 작가들과 차이를 보인다"고 말했다. 우선 은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단순히 싸워야 할 적으로 인식하기보다 인간을 구성하는 거대한 역학구조로 파악한다.

대표작 '날개'를 비롯해 그의 소설은 식민지의 남성이 갖게 되는 불임적인 남성성(거세된 남성성)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유교적 가부장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남성 젠더를 보여준다. 허윤진 평론가는 "체제와 정체성을 형상화하는 방식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독자들에게도 여러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출현에 당시 문단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그가 등단 후, <카톨릭청년>에 시를 발표한 1933년까지만 해도, 문단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간접적 증언이지만, 의 시를 잡지에 수록한 정지용만 해도 의 시가 쓸 만하냐는 질문에 "쓸 만하긴, 그저 그렇지. 요새 유행하는 일본 젊은 시인들의 흉내를 내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도 그런 시가 한두 편 있는 게 괜찮아요. 그 정도로 알면 돼요"라고 했다.(조용만, ' 시대-젊은 예술가들의 초상', <문학사상> 1987년 4월호 중에서)

그러나 이듬해 오감도 연작이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되며 그의 작품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김기림은 "은 지금까지 얼마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지만 "사실 우리들 중에서 누구보다 가장 뛰어난 쉬르리얼리즘(초현실주의)의 이해자"(김기림 '현대시의 발전' <문학전집 3> 중에서)라고 상찬했다.

1936년 단편 '날개' 발표 후에는 문단의 진영을 막론하고 긍정적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임화는 1938년 '세태소설론'에서 "어떤 이는 을 보들레르와 같이, 자기분열의 향락이라든가 자기무능의 실현이라 생각하나 그것은 표면의 이유다. 그들도 역시 제 무력, 제 상극을 이길 어떤 길을 찾으려고 수색하고 고통한 사람들이다"고 평했다.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인 서정주 역시 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는 "그보다 앞섰던 대개의 시들은 사물의 윤곽성의 표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그런데, 이것이 에 오면, 이런 것들이 윤곽적인 것들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내면으로 흘러들어가 그 자세한 내심을 구체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고 평했다.(서정주, '과 그의 시' <한국의 현대시> 중에서)

연구방법론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 아동잡지 '가톨릭소년' 1936년 5월호에 발표한 동시 '목장'
때문에 그는 가장 많이 '해체'된 작가 중 하나다. 은 자신의 발표 작품 수보다 작품에 관한 연구가 더 많은 작가이다. 그의 텍스트는 본격적인 전집 기획만 총 5회가 이루어졌다. 200여 편이 넘는 그의 작품 연구논문을 보면, 현대문학 100년사의 거의 모든 연구방법론을 구경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연구방법론도 일종의 '트렌드'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1980년대 이전 에 대한 텍스트는 그의 삶과 연관되어 해석됐다. 최초의 작품 전집을 만든 임종국과 의 평전을 쓴 고은을 비롯해 이 당시 문인들은 의 생애를 기록하고 이를 시와 소설 등 텍스트의 상관관계 속에 논평했다.

일례로 임종국은 여성 체험에,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폐병을 앓던 시인의 병적 체험에 포커스를 맞췄다. 작가의 생애를 바탕으로 무의식의 심리학적 시각을 규명하려는 연구는 1980년대 이전 연구에서 주를 이룬 방법 중 하나다. 이때 심리분석의 도구로 주로 사용된 것은 프로이트 이론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의 시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흐름이 형성된다. 이때 기댄 서구 이론은 라캉과 크리스테바, 들뢰즈․가타리 등의 이론이다. 이런 접근 방식을 통해 의 시는 이제 '시적 화자'와 '시인'을 분리해 분석되기 시작한다. 의 텍스트 속 '무의식'을 사회적 맥락과 결부시킨 것도 이때부터다. 모더니티의 문제와 관련해 의 시의식을 모더니티, 모더니즘, 포스트모던적 시각으로 분석한 연구는 90년대 이후 연구의 주된 흐름이었다.

의 작품을 보면 독특한 언술 형식이 눈에 띈다. 오감도 연작을 비롯해 시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렇듯 언술 특이성에 주목한 연구 역시 90년대 이후 일종의 유행이 된 적이 있다. 서울대 권영민 교수와 김민수 교수 등은 숫자, 기호, 도상, 건축학적 개념 등이 이용된 의 시 성격과 관련한 상호매체성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박스 기사 참조)

이상
, 날다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사실 은 이런 '계기'가 없어도 끊임없이 변주되는 문학의 모티프다.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감수성은 의 계보에서 진전된 형태이며, 이장욱의 단편 '고백의 제왕' 등 일련의 고백체 소설 역시 소설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읽혀도 무방하다.

소설가 김연수는 의 유실된 데드마스크와 가상의 시를 토대로 장편 '굳빠이, '을 썼다. 소설가 장용민은 의 시를 모티프로 소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을 발표했고, 이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단순한 선배작가에 대한 오마주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에서 형식과 내용의 파격을 시도할 때 은 그 시작이자 끝으로 간주된다. 즉, 어떤 파격을 시도해도 의 '바운더리' 안에 있다. 작품의 어떤 점이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걸까?

함돈균 평론가는 " 문학이 지닌 전위성은 여전히 진행형"이라고 말한다. 의 시가 가진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넘어서는 자리는 비시(非詩)가 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질문으로 탄생되고 유지되는 질문 형식의 문학이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질문하고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질문은 계속 유지된다.

이 질문은 세계의 상식과 알려진 지식에 대해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재를 되묻는다. 기존의 지식, 상식이 이데올로기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증후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효과를 갖는 자리에 의 문학이 있다. 이는 전위적 문학이 지녀야 하는 불온성의 핵심을 보여준다.

함 평론가는 "이 방법론과 문제의식은 여전히 전위적이며, 2000년대 와서 그 전위성이 꽃 피고 있는 것이 최근의 젊은 시들이라고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형식 면에서, 근대 한국어가 성립되어 가던 시기에 거의 일본어로만 창작을 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허윤진 문학평론가는 "(은) 일본어로 시를 쓰면서 일본어의 일상 문법을 뒤집는 내파(內破)적인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러 가지 언어를 혼용하여 사용함으로써 단일한 기원을 가진 근대어의 환상을 근대 형성기에 깨고 있다는 점이 을 영원한 미래형 시인으로 만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건축가
의 예술이 난해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언어에서 벗어나 회화, 기하학, 물리학, 숫자 등이 혼합된 '잡종성의 텍스트'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 하이브리드 텍스트가 당대 독자들은 물론이고 21세기 독자들에게도 미적 충격을 준다.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그가 건축가로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그는 경성고공(고등공업)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서 일했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지난 4월 문예지 <문학사상> 4월호를 통해 경성고공 재학 당시 학적부를 발굴, 공개했다. 김해경(金海卿)이라는 의 본명이 적혀 있는 학적부다.

은 경성고공 입시에서 총 502점을 얻었다. 입학생 63명 가운데 23위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은 건축과에서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년 수석을 차지했다. 졸업 당시 성적은 평균 81점으로 평점 '갑(甲)'을 얻어 건축과를 1등으로 졸업했다. 권 교수는 "이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에 취직하게 된 것은 1929년도 경성고공 건축과 수석 졸업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졸업기념 사진첩 말미에는 졸업생 16명 전원이 각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격언이나 남기고 싶은 말을 자기 필체로 적어 넣은 이른바 '사인(sign)' 지가 있다. 물론, 의 글도 남아 있다. "보고도 모르는 것을 曝露(폭로)식혀라! 그것은 發明(발명)보다도 發見(발견)! 거긔에도 努力(노력)은 必要(필요)하다 李箱()"이라는 글귀다. 도안체 글씨로 석 줄이나 차지하게 쓴 이 글귀의 끝에 '(李箱)'이라는 이름이 표시돼 있다.

이런 이력 때문에 그에 관한 연구는 문학의 영역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져 왔다. 한글 디자이너인 안상수 홍익대 미대 교수는 숫자, 기하학, 도형 등을 끌어들였던 의 문학을 바탕으로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시에 대한 연구'를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했다. 목원대 김정동 교수는 조선총독부의 건축기사로 근무했던 의 건축가로서의 면모를 연구했다. 최근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타이포그라피 기법을 통해 의 시 '출판법'과 '파첩'을 분석했다.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는 책 <필로 디자인>, <멀티미디어 인간 은 이렇게 말했다> 등에서 문자 텍스트 중심의 훈고학적 독해로 의 작품을 분석한 바 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의 시가 독해되는 지점은 이미지 텍스트로 읽혀지는 곳이다. (…) 건축이라든지 19세기 이후에 나오게 되는 상징주의 시 계열에서 시각시의 전통, 예를 들면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 다다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문맥들과 긴밀하게 연동하는 부분이 있어 그쪽(서구)에서 쉽게 읽힌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