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티지 열풍] 헌옷 더미 헤치며 보물차기… 마니아 전유물에서 패션 주류로 떠올라

요즘 최고로 떠오르는 쇼핑 장소는 어디일까? 이틀에 한 번 꼴로 매장 전체가 물갈이 되는 SPA? 뜨는 브랜드에서 뜰 만한 아이템만 쏙쏙 골라온 편집숍? 이것들을 드넓은 공간에 몽땅 쓸어 넣은 초대형 쇼핑몰?

최근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화제가 되고 있는 쇼핑 플레이스는 다름 아닌 재래시장이다. 수입 구제 의류를 파는 서울 에는 한두 개씩 사가는 개인 고객이 이미 상인들의 수를 넘어 섰고, 옷의 마지막 종착지로 불리는 황학동 벼룩시장에도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구겨진 재킷을 손에 들고 살까 말까 망설이는 중년 신사 옆에는 상체에 딱 달라붙는 조끼에 발목이 드러나는 스키니 팬츠를 입은 소년이 올 나간 셔츠를 들고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아저씨, 아줌마들 사이에서 아방가르드한 스타일로 멋을 낸 젊은이들이 헌 옷 더미를 헤치며 보물찾기를 하는 모습은 매주 일요일 황학동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남이 입던 옷을 어떻게…"

"지금은 빈티지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빈티지 자체가 트렌드거든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빈티지는 마니악 중에서도 마니악이었다. 남과 같기를 거부하고 유행을 부정하는 그들의 패션은, 옷이 사회적 동질감의 매개체가 되는 이 나라에서는 비주류의 상징이었다.

당시 빈티지는 트렌드의 반대말이었고, 빈티지 입는 이들은 아름다움을 팔아 정체성을 산 괴짜로 불렸다. 그러나 명동 에이랜드 매니저 이현미 씨에 따르면 이제 빈티지는 트렌드의 반대편이 아닌 정점에 있다.

"20대 초반의 여자가 인터넷에서 마크 제이콥스 컬렉션을 보고 반했다고 가정해 봐요. 그 스타일대로 꾸미려고 결심한 여자의 머리 속에는 몇 개의 쇼핑 장소가 떠올라요. 예전 같으면 청담동 매장, 이태원 수입 보세 매장, 온라인 쇼핑몰 정도로 범위가 좁혀졌겠지만 이제는 거기에 빈티지 매장이 포함되기 시작한 거에요. 마크 제이콥스가 60년대 패션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했으니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결과죠."

비단 패션뿐이 아니라 영화,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문화ㆍ예술 장르에서 과거를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데 매달리고 있다. 패션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져 거의 대부분의 하이패션 디자이너들은 '1920년대 미국의 패션을 현대에 부활시킨', '1950년대의 뉴룩을 새롭게 해석한' 등의 말들로 영감의 원천을 설명한다.

미디어를 비롯한 각종 매체들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다. 케이블 TV의 스타일 관련 프로그램에서는 연일 빈티지 찬양이 이어진다. 김민희, 공효진, 이효리 등 내로라 하는 패션 리더들의 스타일을 분석할 때 빈티지는 빠지지 않는 단어다.

빈티지 구두
특히 공효진은 명품 드레스의 격전지인 시상식장에도 빈티지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빈티지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영국 출신의 요즘 가장 '핫'한 스타일 아이콘인 알렉사 청을 비롯해 케이트 모스, 클로에 셰비니, 아기네스 딘 등도 유명한 빈티지 마니아로, 이들은 패션쇼 맨 앞자리에 앉는 일 못지 않게 벼룩시장을 헤집는 데에도 열심이다.

어떻게 코디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옷들은 이들의 뛰어난 믹스 & 매치 기술을 통해 더없이 독창적이고 쿨한 스타일로 둔갑했고, 빈티지는 '촌빨' 날리는 옷에서 스타일을 완성해주는 묘약으로 이미지가 승격했다. 초록색 체크 무늬 재킷, 세일러 칼라, 청록색 롱 스커트, 허리가 쏙 들어간 스커트 수트 등 유행이 두둔해주지 않는 한 절대로 허용되지 않을 아이템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뒷골목에서 대로변으로 나온 빈티지

현재 빈티지의 위상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명동 한복판에 있는 에이랜드다. 각종 브랜드를 편집 형태로 모아 놓은 이곳의 3층 전체가 빈티지에 할애되고 있다. 홍대 뒷골목에서 개인이 소규모로 운영하던 빈티지 숍이 전부였던 과거를 떠올리면 도심 한복판, 그것도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에서 대규모로 구제 의류를 판다는 사실은 유의미하다.

게다가 상당히 호황이다.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블로거 '스타일 피쉬'에 따르면 요즘 명동을 거니는 젊은이들의 쇼핑 장소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곳은 과 에이랜드다.

"명동 패션은 일반적으로 평이할 거라고 여기지만 의외로 상당수가 아주 원색적인 빈티지 패션을 고수하고 있어요. 원조격인 홍대보다 오히려 더 과감하고 정제되지 않은 스타일링을 하고 다니죠."

빈티지 수요가 에이랜드를 탄생시켰는지 에이랜드가 명동 패션을 바꿔 놓았는지, 그 순서를 엄밀히 따질 수는 없지만 양측의 요구가 거의 동시에 일어나 발화한 것만은 틀림 없다.

에이랜드는 최근 온라인에서 급격히 규모가 커진 빈티지 마켓의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3층을 채우고 있는 구제 의류들은 에이랜드에서 자체적으로 바잉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온라인에서 활동하고 있는 빈티지 쇼핑몰들에게 자리를 내준 것이다. 최근 1~2년간 빈티지 '풍'이 아닌 리얼 빈티지를 판매하는 인터넷 쇼핑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에이랜드는 이들의 오프라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빈티지 열풍은 단순히 트렌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패션에 대한 관심 증가가 불러온 결과다.

"흔히 빈티지는 패션에 미친 사람들의 마지막 종착지로 불려요. 남들과 다르게 입고 싶은 사람들이 헤매고 헤맨 끝에 도달하는 곳은 하이패션 또는 빈티지에요. 자기 표현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데다가 가격을 생각하면 당연히 빈티지가 훨씬 낫죠."

아트데코갤러리의 빈티지 컬렉션
타인의 패션과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유난히 관대함이 부족한 한국 사회지만 은밀하게 끓어 오르는 자기 표현의 욕구는 지금 세대에 이르러 그 실체를 수면 위로 드러내고 있다.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이들은 동시대, 동일한 공간이 낳은 획일화된 옷들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시대, 다른 장소로 눈을 돌렸다.

빈티지는 선택의 폭을 전 세계, 과거 100년으로 대폭 넓혀줌으로써 그들의 허기를 채웠다. 무한대로 늘어난 취향의 스펙트럼은 패션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선택의 고통이지만 패션을 정체성의 도구로 여기는 이들에게는 복음이다.

헌 옷에 대한 거부감도 줄었다. 기성세대에게 있어 누군가 입었던 옷은 마치 찬밥처럼 경시와 무시의 상징이었지만 요즘 세대에게 낡음은 더 이상 흉이 아니다. 가죽 길들이기, 청바지 낡게 만들기 노하우가 인터넷 상에서 공공연히 나누어진다.

"10년 전만 해도 한국에선 소비가 미덕이었어요. 새 옷, 새 집, 새 차가 최고였죠. 요즘엔 환경 문제도 있고 하니 자기 취향의 물건을 골라 오래도록 사용하고 거기서 묻어나는 세월의 흔적을 자랑하는 것이 미덕인 것 같아요. 소비를 권하는 목소리에 휩쓸려 자기 삶을 정신 없이 떠내려 보내기보다는 확고한 기준으로 스스로의 삶을 정돈하며 사는 것, 그게 요즘 세대의 특징 아닌가요?"

이현미 매니저는 빈티지라는 새로운 규범의 복식이 한국 사회에 던질 변화에 대해 예고했다.

광장시장
"재미있는 건 빈티지 매장을 찾는 10대 고객들이에요. 빈티지는 스타일링 능력에 따라 결과가 천지차이가 나는 어려운 옷이에요. 빈티지를 통해 스타일링 능력을 키운 이들이 자라서 구매력을 갖추게 된다면 아마 한국의 패션 씬이 크게 바뀔 거에요."

빈티지 용어 정리
빈티지는 구제, 앤티크, 레트로, 세컨 핸드 등의 단어와 혼용해서 쓰이고 있지만 의미가 약간씩 다르다. 앤티크는 보통 100년 이상 된 물건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가치가 증가해 지금은 고가가 된 제품을 이르며 의류보다는 가구나 보석에 많이 쓰인다. 세컨 핸드는 말 그대로 누군가 한 번 사용한 것으로 빈티지 중에는 과거에 생산됐지만 착용하지 않고 보존된 것도 있기 때문에 뜻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레트로는 과거의 패션을 디자이너들이 모방 또는 재해석한 것이고, 빈티지와 구제는 실제로 과거에 만들어진 옷이다. 한 시대의 대표 룩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빈티지와 구제를 구분해서 쓰는 이들도 있지만 그 기준이 모호해 현재 국내에서는 최소 20년 전의 과거에 만들어진 옷을 빈티지로 통칭하고 있다.


에이랜드 3층의 빈티지 매장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