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시장에 가다] 정부, 상인, 문화예술인 뜻모아 소비공간을 문화공간으로 변화수원 못골시장, 강릉 주문진시장 '문전성시' 프로젝트 성공사례

옷가게와 젓갈가게가 나란히 붙어 있다. 정육점 옆에는 화장품 숍이 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배치가 있을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하다. '떡도날드'(떡집), '만두리아'(만두가게) 같이 적당히 촌스럽고 귀여운 작명 센스가 눈에 띄는 곳, '시장'이다.

추석 대목을 앞두고 주민들의 장보기가 시작됐다. 언제부턴가 '장'은 대형 할인마트에서 보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사실 '장'이라는 말은 오랫동안 '시장'이라는 공간을 전제로 해왔다.

하지만 촌스럽고 불편하며 지저분하다는 인식 때문에, 또 이 모든 단점들을 불식시킨 대형 할인마트의 등장으로 시장은 시나브로 존재감을 잃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시장은 변하고 있다. 외관의 변화만은 아니다. 그동안 가격 경쟁력에서는 상대적인 우위를 자부했던 만큼, 상인들은 질 좋은 상품의 확보 대신 시장에 대한 인식 개선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 매개는 문화예술이다.

상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시장에서 함께 이야기하며 '시장문화'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들이나 가는 곳으로 여겨졌던 시장은 이제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문화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수원 못골시장의 '라디오 스타'인 못골 온에어의 상인 DJ들
문화의 장으로서 시장

흔히 '장 보러 간다'는 표현을 쓴다. 그냥 '장에 간다'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보러 간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만큼 장에 볼거리들이 많다는 뜻이다. 특별한 문화공간이 없었던 옛날부터 시장은 단순히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정보가 오가는 문화 공간의 역할을 해왔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종의 멀티플렉스라고도 할 수 있다.

문화의 다양한 종류만큼 시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의 특색을 보여준다. 가만히 서서 보고 있으면 잠깐에도 천태만상의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 '다름'이 부딪쳐 삶을 낳고 민심이 된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이런 시장의 속성은 그 자체로 문화와 예술의 소중한 원천이 된다.

시장의 매력인 '사람'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영화감독 박제현에게 시장은 '캐릭터의 보고(寶庫)'다. "시장에는 성격이 비슷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다른 시장사람들끼리 잘 뭉친다는 거예요. 캐릭터를 배우기 제일 좋은 곳이 시장인 것 같아요."

20대까지 서울 둔촌동의 시장 한가운데 살았던 가수 하림에게 시장은 그대로 낭만적인 문화공간이다. "음악하는 친구들이랑 시장통에서 술 먹다가 연주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보면 시장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어 '이것도 해봐', '저것도 노래해줘' 그러시거든요. 그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시장 구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게 정말 구경거리였어요."

강릉 주문진시장
직업의 특성상 닫혀있는 공간에서 많이 산다는 이상봉 디자이너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호흡하고 혼재하는 시장 속에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또 그는 점점 전통이 없어지는 우리나라 시장을 아쉬워한다. "5000년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우리 문화를 그대로 담아내 현대의 문화와 연결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상봉 디자이너의 말처럼 문화공간으로서의 시장의 가치는 외국의 시장에서 잘 나타난다. 외국의 전통시장은 관광객이 한 번쯤은 거쳐야 하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이것은 시장의 문화적 가치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장보기'는 곧 대형마트에서의 '쇼핑'이 됐다. 시장은 지역마다 없는 곳도 있고 가격이나 편리함의 측면에서 사람들의 선택지에서 벗어나고 있다. '재래시장'이라는 용어에서 오는 낡고 오래된 이미지는 사람들의 발길을 더욱 되돌렸다.

지난 7월, 그래서 재래시장은 사라졌다.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이 시행됨에 따라 기존의 재래시장 대신 전통시장이라는 용어가 정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히 이름만 바뀐 것은 아니다. 2년 전부터 전통시장을 되살리겠다는 취지 아래 정부와 상인, 문화예술 관계자들은 뜻을 모아 함께 해왔다. '문전성시'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침체된 전통시장, 문화사업으로 살려보자

수유마을시장 예술노점상 '시장 신인력거'
'문전성시' 프로젝트는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의 약칭으로, 전통시장의 문화적 가치에 주목해 이를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보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2008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지역의 문화 전문가들과 상인들이 참여해 문화기획, 스토리텔링, 공공미술 등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사업계획을 세우고 실제 추진과정을 함께하는 공동 프로젝트다.

하지만 생업에 바쁜 시장 상인들에게 난데없는 문화 전문가들의 등장과 활동은 장사에 불편을 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역적 차이나 특색이 각양각색인 시장의 성격을 감안하지 않은 문화사업은 자칫 시작부터 상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 상인들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역의 문화 전문가들이 총괄기획자(Project Manager, PM)로 나서 전체 사업을 이끌고 이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을 맡았다. 매니저를 비롯한 문화 전문가단은 외부의 문화 프로그램을 시장에 접목시켜 활성화를 꾀하는 한편, 시장 고유의 문화를 발굴해 알리는 방법을 고루 고민하며 각 시장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들을 개발해 상인들과 함께해 왔다.

그 결과 첫 시범사업으로 선정됐던 수원 못골시장과 은 이미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성공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못골시장에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그 안에 숨어 있던 '이야기'를 발견해냈다.

작은 골목시장에 불과하던 못골시장은 상인들이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가사에 담아 부르는 '상인 합창단', 87개의 상점을 대상으로 스토리텔링 작업을 한 공공디자인 '이야기 상점 87', 상인 DJ가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 '못골 온에어' 등을 통해 '이야기가 있는 시장'으로 재탄생했다.

주문진시장 역시 수산시장으로서의 특징을 살려 '놀래미 극단' 창단, '꽁치극장' 개관, '오징어 갤러리'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상인과 방문객들에게 문화시장으로 재인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같은 성공에 힘입어 지난해에는 서울 수유마을시장을 비롯해 전남 목포 자유시장, 대구 방천시장, 충남 서천 한산재래시장 등 4개 시장이 추가로 선정돼 문전성시는 성공적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문전성시 프로젝트의 컨설팅과 시장조사를 진행하다 아예 전국의 시장을 돌며 책을 썼던 서진영 작가는 시장에서의 문화사업 자체가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굳이 특별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없이도, 시장 상인들의 능숙하고 일사분란한 움직임이 일종의 퍼포먼스 같은 감동을 준다는 것. 그래서 그는 "시장의 매력은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는 짧은 시간에서도 서로 알아가는 과정, 마트에는 없는 이야기와 인생, 삶의 지혜가 다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문전성시 프로그램 외에도 전국의 시장은 최근 문화공간으로 많이 바뀌었다. 2008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진행된 '복덕방 프로젝트'는 쇠퇴하던 대인시장의 빈 공간을 예술가의 작업실로 만들어 일상과 예술을 잇는 작업에서 출발했다. 비엔날레가 끝난 후에도 작가와 인문학자, 예술가들은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상인들 옆에 터를 잡았다. 그 결과 대인시장은 서울의 홍대거리에 버금가는 예술시장으로 재탄생했다.

이처럼 일부 낙후된 도심의 시장은 창작공간화 사업을 통해 문화예술인과 시장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업을 통해 전통시장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시장은 여전히 시민들이 살아가는 생활공간이다. 서진영 작가는 "거기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는 건 오히려 시장을 우리 생활공간과 괴리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시장 활성화를 위해 들어온 문화 전문가나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작업의 목적을 상인들이 스스로 문화예술을 생산할 수 있을 때까지 도움을 주는 데 두고 있다. 이들의 협업을 통해 재래시장이 갖고 있던 낡은 이미지는 조금씩 사라지고, 시장은 멋과 흥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참고서적 - <한국의 시장>, 기분좋은 QX 저, 시드페이퍼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