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시장에 가다] 시장 특색, 상인들 현실고려, 맞춤형 지원 '3박자' 맞아야 성공

우림시장 상인극단 오디션
일상의 여러 가지 모습을 담아왔던 문화예술이 가장 첨예한 삶의 터전인 시장으로 들어왔다. 공연장이나 전시장 같은 고급화된 공간에서만 소비되어 왔던 문화예술이 시장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창작되고 향유될까.

중요한 것은 시장에서 이들 예술가들은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것은 시장의 활성화를 전제로 한다. 모든 문화예술 행위의 주체는 궁극적으로 시장 상인들이다. 예술가들이 문화예술의 '전수자'가 아니라 '조력자'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화예술시장'이라는 같은 목표를 지향해도 시장마다 그 과정이 다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어떤 시장은 문화예술활동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대폭 바꾸려고 하고 상인들도 이에 동의하며 능동적으로 참여한다. 반면 다른 시장은 지금의 상황에 대체로 만족해 단순한 여가활동 수준의 문화사업을 바라기도 한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시장마다 특색이 다르고 상인들이 처한 현실도 다르기 때문이다. 현재 성공적으로 상인들과의 동거를 수행하고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이 점을 잘 알고 맞춤형 지원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나오는 산물들은 뭔가 거창한 것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촌스럽기도 하고 낮은 수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수준이 아니다. 오로지 물건을 팔고 사는 것만 쳇바퀴처럼 이루어지던 시장이 스스로 무형의 문화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히려 그렇게 서툴게 만들어진 시장 문화엔 전통시장 본래의 냄새와 서민들의 희노애락이 진하게 배어 있다.

수유마을시장 목공교실. 작은 생활기구 만들기 과정을 8주 과정으로 배운다.
소에게서 사람으로, 체질개선하는 우림시장

강단에 오른 만화·애니메이션 전문강사가 어린이 수강생들의 상대로 강의를 시작한다. 언뜻 강의는 특별한 내용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우림시장의 역사부터 특징까지 일목요연하게 짚어내 수업 내용과 절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그 가운데는 '소'가 있다. 강사는 황소와 젖소의 차이를 물으며 아이들의 흥미를 끌고 여세를 몰아 자연스럽게 '이중섭 할아버지'의 소 그림까지 나아간다. 어느새 아이들의 머릿속엔 '소'가 자연스레 들어온다.

'어린이 문화예술 체험 프로그램' 중 '미술표현놀이' 첫 수업날. 성문기 목원대 교수는 그렇게 상인과 지역주민의 아이들과 함께 우림시장의 40년 역사를 가볍게 스케치하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문전성시 사업을 시작한 우림시장의 중심적인 문화 코드는 '소'다. 프로젝트의 이름도 '춤추는 황금소'이고 수업이 진행되는 시장 내 복합문화공간의 이름도 같다. 올해 문전성시 대상지로 선정돼 만든 마스코트도 '우(牛)돌이'다.

우림시장 '한 평 예술단' 클래식 공연
우직하게 저돌적으로 밀고 나가는 소의 이미지처럼 우림시장 상인들은 문화활동에서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던 상인극단 단원 모집에는 바쁜 생업 중에도 불구하고 20명에 가까운 상인들이 지원을 했다. 시장 안팎에 공고가 붙자 인근 지역주민들의 참여도 이어졌다.

문전성시 프로젝트에서 시장문화마케팅팀을 맡고 있는 도미라 팀장은 "사실 예전에 우림시장 상인들은 불친절하다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 프로그램들을 진행하며 상당히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귀띔한다.

우림시장의 문화예술활동 중 흥미로운 것은 '한 평 예술단'이다. '시장바닥'의 이미지에서는 전혀 떠오르지 않는 변검, 타악기 퍼포먼스, 클래식 공연들이 시장바닥의 '한 평' 공간에서 치러지는 것이다. 한 평 예술단의 공연이 상인들의 호응을 얻자 중랑구 내의 '장바구니 축제'에서도 이를 시행되는 성과도 얻었다.

하지만 시장 속 예술공연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이곳 우림시장도 모두 이런 행사에 우호적인 것은 아니다.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자기 가게 앞에서는 하지 말라는 '님비(NYMBY)' 마인드도 있었다. 그렇다고 '예술한다'는 명목으로 무조건 밀어붙이면 상인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 실제로 다른 시장에서 쫓겨난 문전성시 사업단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작업은 현지인과의 상호신뢰 관계가 중요한 문화인류학 방식과 닮았다.

경상현 프로젝트 매니저는 "상인들은 으레 그렇듯이 트로트나 각설이 타령을 언급했지만, 시장이 살기 위해서는 '고객 중심이 되어야 한다'며 인식 변화를 요구했다"고 말한다. 그 결과가 '시장 속으로 들어온 예술'이었다. 생선 비린내와 참기름 냄새가 뒤섞인 시장에서 울리는 클래식 선율은 확실히 이질적이다. 그렇지 않아도 번잡한 시장 바닥에서의 공연은 갈 길 바쁜 행인들의 발걸음을 더 지체시킬 수 있다.

수유마을시장에서 상인들이 붉은 코 퍼포먼스에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경 매니저는 밀어붙였다. 전통시장의 변화를 위해서는 기존의 고객층뿐만 아니라 더 넓은 고객층까지 아우르는 취향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설득시켰다. 문화예술을 통해 전통시장에서 장보기가 재미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자는 계획이 그것이다. 반응은 금방 나타났다.

도 팀장은 시장 속 문화사업에 대한 문의 전화가 이어지고 있다고 전한다. 이처럼 시장 안팎의 인식이 변함에 따라 상인들도 한층 더 적극적으로 문화예술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우림시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중랑구의 문화적 거점을 꿈꾸고 있다.

경 매니저는 "문화라는 건 일상 속에 있고, 그 수준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시장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문화적 금광"이라고 표현한다. 상인들의 사연 하나 하나가 문화예술의 무궁무진한 원천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글로 옮기면 문학 작품이 되고, 연극 대본이 되고,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으면 그대로 갤러리가 된다. 시장은 이제 예술가들에게도 중요한 공간이 됐다"고 말한다.

평범한 마을 시장의 은은한 변신, 수유마을시장

하지만 이처럼 적극적인 변신을 시도하지 않는 시장도 있다. 지난해 문전성시 사업에 선정돼 2년째 프로젝트를 지속 중인 수유마을시장은 아케이드에 걸린 행사 공지 현수막을 제외하면 비교적 조용한 모습이다. 좁은 길목에서 치러지는 시끌벅적한 공연들도 없다.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시장으로 평가받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인상이다.

우림시장 길놀이 퍼포먼스
이런 모습도 수유시장만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다른 시장들이 저마다 개성을 외치는 가운데 수유마을시장은 타 시장에 비해 훨씬 크고 세 개로 나뉘어져 있다는 특징 아닌 특징이 있다. 수유시장과 수유골목시장, 수유재래시장으로 구분된 이 시장은 상인회도 따로 존재한다. 하지만 문화활동을 통해 최근엔 '수유마을시장'이라는 하나의 대표명을 쓰고 있다.

수유마을시장의 또 다른 특징은 인근 대형 마트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백화점과 유명 마트가 인근에 있지만 가격이나 신선도에서 경쟁력이 있어 주민들은 주로 수유마을시장을 찾는다.

이런 사실은 문화사업을 하는 데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곳에서 문전성시 사업을 진행 중인 전민정 매니저는 "상인들이 이런 문화사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세 개로 나뉘어진 상인회들은 첫 만남부터 경쟁의식을 보이며 불협화음을 냈다"고 밝힌다. 게다가 상인회가 각 상인들에게 협조를 구해도 순순히 따르는 상인들도 없었다. 다른 시장과 달리 이곳은 수평적 마인드를 가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수유마을시장만의 이런 개성은 그대로 문화사업에 적용됐다. 전민정 매니저는 "이런 평범한 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은은한 재미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한다. 변화에 대한 절박함이 없기에 순수예술 공연과 같은 행사는 호응이 없었다. 때문에 상인들의 자기계발에 중점을 둔 생활밀착형 프로그램들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처음 문전성시를 시작할 때는 우선 상인들에게 책을 빌려주는 '책수레'나 공예교실, 목공교실, 상인 미디어 학교 등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문화생산의 의미도 있지만 주로 자기계발에 중점을 둔 기획이었다. 1년이 지난 지금은 이런 프로그램들이 훨씬 정비되고 정착돼 시장예술단과 에듀투어, 활력투어, 낭만토크 등 시장의 개성을 담은 문화 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런 활동을 아우른 생활문화잡지 '월간 콩나물'은 문화시장으로서의 노련함마저 느껴지는 산물이다.

신당창작아케이드의 '나도 예술가' 체험공방
이처럼 수유마을시장은 문화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주입하기보다는 상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만들어간 측면이 많다. 주변에 콜라텍이나 볼룸댄스 교습소가 유난히 눈에 띄는 강북의 취향을 반영해 댄스스포츠나 몸살림체조 등 건강과 여가 프로그램들을 만든 것이 한 예다.

주민 강영춘 씨(45, 주부)는 시장에 들렀다가 목공교실 정보를 듣고 3개월 째 수강 중이다. 집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목공예를 하면서 푼다는 그는 "개인적으로 퀼트에도 관심이 있는데 문전성시에서 그런 수업도 개설해주면 좋겠다"며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작년 7월부터 목공교실을 맡고 있는 목공작가 김현승 씨(31)는 "하루 14명의 수강인원이 매달 금방 차는 편"이라며 상인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높은 관심을 설명했다.

전민정 매니저는 "수유마을시장은 새로운 문화예술로 완전히 변신시키려는 시도보다 원래 전통시장에 있던 매력을 포장하고 극대화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한다. 하지만 평범함 속에 숨은 수많은 사연들은 이들 문화사업단에게 더 흥미로운 주제가 됐다. 전 매니저는 "숨겨진 것들을 끄집어내 이곳만의 문화로 만드는 작업은 일종의 콘텐츠 사업이자 시장을 새롭게 즐기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전한다.

예술시장으로 탈바꿈한 도심 속 시장

한편 '문전성시'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문화를 매개로 지역 시장을 관광지로 육성하는 프로젝트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중소기업청 시장경영진흥원에서 추진하는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인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사업'은 외지 관광객을 유치해 지역의 대표적인 거점시장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다.

신당창작아케이드의 작업실
올해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선정된 광주 양동시장은 대인시장에 이어 비엔날레와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시장 건물 옥상에 마련된 '어진관'에서 이뤄지는 양동시장 프로젝트는 관람객이 직접 참여해 벽에 낙서하고 그림도 그리는 참여형 프로그램이다. '양동문화센터'에서는 시장의 대표 상품인 홍어를 특화한 '홍애(紅愛) 레스토랑'이 생겼다. 이 시설들은 올해 광주비엔날레 개막일 문을 열고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양동시장사업단의 김지원 단장은 "이런 문화·관광형 시장 육성사업을 통해 활성화된 전통시장은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로 거듭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전통시장 프로젝트들과는 달리 신당 창작 아케이드는 시장의 환경을 개선하는 공공미술이나 이벤트 개최에 그치지 않고, 예술가들이 직접 시장 속으로 들어가 소통하는 창작 인큐베이팅 프로젝트다. 지난해 10월 서울 황학동 중앙시장 지하에 국내 최초의 공예 중심 아케이드로 개관한 신당 창작 아케이드는 노후한 지하상가 시설을 색다른 공간으로 되살려 놓았다.

소형 스튜디오 40실과 전시실, 공동작업실 등으로 조성된 이 공간은 섬유·종이·도자·금속·목공예, 판화, 북아트, 사진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루는 40명의 예술가들이 입주하여 창의적인 문화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기존의 국공립 미술 스튜디오들이 순수예술만을 위한 창작공간이었다면, 신당 창작 아케이드는 시민들의 생활에 가까운 공예와 생활디자인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도심 속 창작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예술가들의 작업실은 방문객들이 창작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며 '열린 공방'이라는 공간적 특성을 최대한 살려 기존의 시장 예술과는 다른 색다른 매력을 보이고 있다.

지난 12일부터 숭인시장에서는 10월 31일까지 7주간 미아리 마을공연 축제 '미아리난장'이 열린다. 매년 추석을 기점으로 가을에 개최되는 미아리 마을공연 축제는 올해 서울연극협회 등 연극계의 후원을 받아 주민들과 축제를 벌인다. 이로써 연극과는 거리가 멀었던 숭인시장 일대에서는 약 두 달 동안 대학로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연극을 볼 수 있게 됐다.

미아리 마을예술축제협의회 임정혁 대표는 "공연예술은 왜 대학로에만 집중되어 있을까. 연극은 관객이 있으면 어디서든 공연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아리 마을축제는 그런 의미에서 미아동에서 시작하여 공연예술이 먼저 관객에게 다가가는 축제로 만들고자 한다"고 말했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