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r Road] BC4000 메소포타미아서 밀로 빚은후 이집트서 보리 맥주 생산전 세계 2만 여종 이상 다양한 맛과 향으로 유럽에서 사랑받아조선왕조실록에도 맥주가 나와… 1933년 조선맥주가 국내최초

술에도 유행이 있다. 싸고 독한 소주는 압축성장의 시대, 노동자의 희노애락을 보여주는 표상이다. 와인과 막걸리의 유행은 웰빙 트렌드를 반영한다.

그러나 주류 시장 전체를 두고 볼 때, 어떤 술도 맥주를 따라올 수는 없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맥주는 전 세계 2만여 종 이상이 주조될 만큼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기분 좋은 취기, 상쾌한 청량감, 다양한 향과 맛은 맥주가 장소와 계절, 지역과 계층에 상관 없이 사랑받는 비결이다. 농경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맥주.

최근 맥주 주조 관련 국내 규제가 완화되며 다시 한 번 붐을 일으킬 태세다. 맥주의 기원, 맥주의 역사로 비어로드를 살펴봤다. 영국, 아일랜드, 독일과 체코로 이어지는 중심으로 이뤄진 비어벨트도 소개한다.

흐르는 빵, 맥주

인류는 언제부터 맥주를 만들어 마시기 시작했을까? 학자들은 맥주가 7000년의 역사를 가졌다고 추정한다. 기원전 4000년 경 메소포타미아(현재 이라크 지역)의 수메르 왕조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1953년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푸른 기념비(Monument Bleu)는 이런 추측을 뒷받침해 준다. BC 42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점토판에는 에머(Emmer)란 품종의 밀을 찧고 맥주를 빚어 여신에게 바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 점토판을 해독한 결과 수메르인들은 곡물을 분쇄해 빵을 구운 다음, 그 빵을 물과 함께 섞어서 자연발효시켜 맥주를 만든 것으로 나타났다. 맥주에 '흐르는 빵'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수메르인은 이미 '시카루'라 불리는 보통 맥주 외에도 검은 맥주, 붉은 맥주, 강한 맥주 등 6종의 맥주를 주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보리의 재배가 이집트로 전해져 기원전 3000년경부터 나일강에서 재배한 대맥으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기원전 2500년경 고대 이집트에서 맥주는 신에게 바치는 음료이자 일당과 보너스, 팁을 주는 거래물이기도 했다. 영국 예술사학자 야콥 블루메는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에서 "고대 이집트에서는 맥주를 소중히 여겨 노동계약에 반드시 포함시켰다"고 말한다. 임금의 일부로 맥주를 주었는데, 평민 일꾼은 1리터의 보통 맥주를, 고위 관리는 3리터의 도수 높은 고급 맥주를 받았다.

인류 문명의 기원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만들어진 맥주는 유럽으로 건너간다. 기원전 1세기경 현재 독일지역의 게르마니아인들은 추위와 싸우기 위해 알콜 음료를 만들어 마셨다. 맥주를 만드는 일은 빵을 만드는 일과 같이 주부의 일이었고 맥주를 잘 담그는 솜씨는 신부의 가장 중요한 자격조건 중의 하나였다.

중세에는 와인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에서 맥주의 양조를 담당했고, 수도사들에 의해 맥주의 양조기술이 발전하게 된다. 금식 기간 동안 마실 음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수도사 1명당 5리터의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의 에일(ale)과 포터(porter)는 8세기경부터 만들어졌고, 맥주에 홉을 첨가한 것은 10세기경부터다.

벨기에산 맥주 '레페(Leffe)'는 1204년 벨기에 디나우트 지역 노트르담 수도원에서 제조되기 시작해 800년의 역사를 가진 맥주다. 최근 국내 여성들에게 인기 있는 벨기에산 맥주 '호가든(Hoegaarden)' 역시 800년 전통의 수도사 맥주다. 주원료가 보리가 아닌 밀인데다 화이트 비어로 맛과 향이 독특하다.

술로 인한 폐단에 대한 종교적 논쟁이 벌어지고, 술 양조에 제약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3세기 보헤미아의 왕 웬체슬라스(Wenceslas)는 맥주를 '고귀하고 전능한 음료'라고 생각해 교황으로 하여금 맥주제조 금지령을 풀어주도록 건의한 일도 있다. 이것이 체코 맥주산업을 발달시켜 체코 맥주가 전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됐다.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오면서 도시가 발전하고 길드제도가 정착됨에 따라 맥주 양조는 수도원에서 서민의 손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다양한 원료를 사용한 맥주 제조법이 등장했다. 이로 인해 사회적 혼란이 생 1516년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4세는 '맥주 순수령'을 공포, 독일 맥주산업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양조권은 수도원에서 국가로 위임됐다. 맥주에 여러 향료식물을 첨가했던 종전의 방식에서 탈피해 홉(Hop)만 사용토록 한 법안으로 지금의 맥주 형태를 이끌어냈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은 주류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19세기 산업혁명은 맥주가 대량생산, 대량 소비되는 맥주의 근대화를 가능케 했다. 와트의 증기기관은 맥주양조에도 혁신을 가져와 물 이송부터 맥아의 분쇄, 맥즙의 교반 등에 동력을 이용해 대량생산을 이끌어낸다. 증기기관차는 맥주의 운반을 쉽게 하고 거리 장벽을 줄여 대량 소비 기반을 만들었다.

칼 린데가 발명한 냉동기는 맥주양조에 혁신을 가져온다. 현재 전세계 맥주 시장의 3/4을 차지하는 하면발효주는 4도에서 10도 사이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다. 칼 린데의 냉동기가 없었다면 하면발효주는 여름에 양조하기 힘든 맥주다. 냉동기는 오늘날 계절에 상관 없이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셈이다.

프랑스의 파스퇴르는 술이 효모의 작용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을 발견해 맥주의 품질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또한 열처리 살균법으로 맥주 효모를 제거함으로써 장기보관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한센은 파스퇴르의 원리를 응용해 효모의 인공배양에 성공한다. 그렇게 만든 회사가 덴마크의 대표 맥주회사 칼스버그다. 한센의 효모 순수배양기술은 맥주 맛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는 평을 받는다. 한센은 맥주 발효에 절절한 효모를 추출, 활용하는 과정을 통해 잡맛을 줄일 수 있도록 하고 대량생산 시 균일한 맛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 맥주

맥주를 '보리로 빚은 술'이란 개념으로 확장하면, 우리의 맥주 역사는 근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맥주를 살펴보자. 영조 86권에 '麥酒'란 단어가 있다. 1755년 영조가 금주령을 내리며 제외한 술이 있었으니 맥주와 탁주다.

'군문(軍門)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할 때는 탁주만을 쓰고, 농민들의 보리술과 탁주 역시 금하지 말아야 한다.'(고나무 <인생, 이맛이다> 재인용)

<조선왕조실록>에는 또한 '모미주(牟米酒)' 양조법이 있다. 여기서 모미란 보리를 뜻한다.

'보리쌀을 밥 짓듯 잠깐 익게 해 물에 사흘간 담가 굵은 보에 건져 볕에 돌같이 굳게 말려 다시 옥같이 찧어 법에 따라 이 술을 빚으면 좋다.' (고나무 <인생, 이맛이다> 재인용)

현대적 개념의 맥주는 구한말 개항과 함께 시작된다. 1933년 일본의 대일본맥주(주)가 영등포에 조선맥주(주)를 설립한 것이 우리나라 맥주회사의 시초다. 같은 해 12월8일 기린맥주(주)가 역시 영등포에 소화기린맥주(오비맥주 전신)를 설립했다. 1945년 광복과 함께 두 맥주회사는 미군정에 의해 관리되다가 적산관리공장으로 지정된다. 1951년에 민간에 불하, 동양맥주(오비맥주 전신)와 조선맥주(하이트맥주 전신)로 바뀌었다.

1992년 진로쿠어스맥주(주)가 설립되면서 국내 맥주업계는 오비맥주, 하이트맥주, 카스맥주 등 3사 체제로 들어간다. 그 후 외환위기 겪으면서 진로의 부도로 카스맥주(주)가 오비맥주(주)에 인수되며 다시 2파전으로 줄어든다.

21세기 비어벨트

21세기 비어로드는 어떤 모습일까? 맥주는 유럽으로 건너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술로 유럽을 나눈다면 '와인벨트'와 '비어벨트'로 나눌 수 있다. 영국, 아일랜드, 독일, 벨기에, 체코 등 북유럽 국가들이 맥주 강대국이다. 이들 나라를 하나로 묶은 곳이 이른바 '비어벨트(Beer Belt)' 지역이다. 주요 와인 생산 국가들이 속해 있는 '와인벨트(Wine Belt)'보다 위도가 조금 높다. 북유럽의 경우 포도 재배가 어려워 각지에서 보리를 원료로 맥주를 제조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비어벨트 지역을 살펴보면 체코 쪽으로 가면 라거의 전통이 강하고, 영국 및 아일랜드 쪽으로 가면 에일의 전통이 강하다. 생산량이나 소비량으로 볼 때 전 세계적으로 라거가 대세다. 특히 라거 가운데 필즈너 계열의 맥주가 전 세계 맥주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국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맥주는 거의 모두 라거다.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을 보면 체코가 1위, 아일랜드가 2위이지만, 맥주의 본고장으로 알려진 독일이 꼽히는 건 이런 배경 때문이다. '독일=맥주'의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15세기경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서 탄생한 라거(Lager) 맥주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맥주의 효모가 발효를 끝내면 거품과 함께 위로 떠오르는 상면발효가 주류였지만, 이 시기 효모를 맥주통 밑에 가라앉혀 발효시키는 '하면발효법'(Bottom-Fermentation)이 새로 개발됐다. 라거는 하면발효를 위해 일정 기간 창고(독일어로 라거)에 맥주를 저장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라거가 오늘날처럼 대량 유통되기 시작한 건 1800년대 중반 독일 맥주회사 슈파텐의 제들마이어가 영국의 '페일 에일'(에일 맥주 가운데 색이 밝은 것)기술을 가져와 라거에 도입한 '페일 라거'를 만들면서부터다. 라거가 에일을 누르고 맥주의 주류가 된 건 1950년대부터다. 모튼 카우츠란 뉴질랜드인이 라거 맥주 생산기간을 단축시키는 기술을 발명했다. 곧바로 라거 맥주가 양산되기 시작해 순식간에 라거가 에일을 압도하게 됐다.

이밖에 비어벨트에서 만들어지는 각 국가의 대표 맥주를 연대 순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스텔라 아르투아 since 1366
라틴어로 별(Star)을 뜻하는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는 1366년 이래 맥주마을로 불려온 벨기에 루벤에서 유래된 600년 전통의 라거 맥주다. 스카치 위스키를 만드는 방식으로 생산돼 체감 알코올도수가 본래 도수인 5.2도보다 높게 느껴진다.

크로넨버그 1664 since 1664
프랑스 판매 1위인 '크로넨버그 1664' (Kronenbourg 1664). 1664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3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며 에펠탑 형태의 병 모양으로 프랑스 파리를 연상하게 하는 시각적인 멋까지 느낄 수 있다. '홉 중의 캐비어'로 불리는 알사스산 홉으로 목 넘김이 부드럽고 진한 벌꿀의 맛과 향이 오래 남는 것이 특징이다.

기네스 since1759
아일랜드의 명물, 기네스 맥주는 1759년 아서 기네스(Arthur Guinness)가 만들었다. 구운 보리의 구수하고 쌉쌀한 향이 깃든 '드라이 아이리시 스타우트' 맥주로 흑맥주의 글로벌화에 성공한 대표적인 케이스. 상면발효로 만드는 포터비어(Porter beer)다.

하이네켄 since1863
1863년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하이네켄은 당시 하면발효라는 새로운 양조 방식과 암스테르강 물을 사용한 전략으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오늘날 세계 맥주 시장을 평정한 세 가지 맥주 상표 중의 하나로 세계 어디를 가도 있을 정도로 널리 퍼져 있다.

벡스 since 1873
독일 북서부 브레멘에서 창시자의 성을 상표로 1873년 만들어진 벡스(Becks)는 전통적인 독일 맥주 제조법에 따라 제조돼 전세계 120여개 국에서 판매되는 정통 독일 라거맥주다.

칼스버그 필스너 since 1904
안데르센과 함께 덴마크의 2대 자랑거리로 불리는 칼스버그가 생산하는 맥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맥주가 칼스버그 필스너(Carlsberg Pilsner)다. 로고는 1904년, 덴마크의 건축가 토르발트 빈데스뵐(1846-1908)이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아르누보 양식을 바탕으로 디자인한 것으로 로고 위에 그려진 왕관은 덴마크 왕실이 인증한다는 일종의 라이센스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칼스버그를 왕실을 의미하는 '커트(Court)'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참고서적: <맥주, 세상을 들이켜다> 야콥 블루메 지음/ 따비 펴냄
<인생, 이맛이다> 고나무 지음/ 해냄 펴냄
<술꾼의 품격> 임범 지음/ 씨네21북스 펴냄
<유럽 맥주 견문록> 이기중 지음/ 즐거운상상 펴냄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