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새로운 미학의 발견] <나누기 중개소>, <액체달> 물물교환 프로젝트 등 색다른 시도화폐 가치와 다른 가치 본보이고 그영향력과 가능성 탐색

<나누기 중개소>전에 전시된 김종우 작가의 '합의점을 찾을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가설과 그것의 증명'
"이혼한 부부의 재산을 잘 나누어 드립니다."

지난 9월 현대판 솔로몬을 자처하며 등장한 <나누기 중개소>는 법률사무소가 아니다. 변호사가 아닌 미술 작가들이 자문위원으로 나섰다. 본보기로 김무영, 김아미 부부의 재산 분배 사례를 공개했다.

우선 둘이 함께 투자한 부동산의 경우, 땅따먹기와 사방치기로 소유권을 정한다. 서로에게 주었던 선물들은 빼앗아 와 다른 용도로 탈바꿈시킨다. 장화를 화분으로 쓴다든지 셔츠를 가방으로 만든다든지.

딱히 누구의 것이랄 것 없는 물건들은 벼룩시장에 내놓아 낯선 물건들로 바꾼 후 나누어 갖는다. 애완견의 경우는 조금 복잡한데, 아내가 맡아 기르되 개의 털로 쿠션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기상천외한 상황은 물론 현실이 아니다. 9월 한 달간 진행된 <나누기 중개소> 전시 내용이다. 내용은 발랄하지만, 담고 있는 고민거리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이 전시장에서는 무엇도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가 신봉하는 가장 객관적인 잣대가 빠진 것이다.

<나누기 중개소>전에 전시된 서지선 작가의 '땅따먹기'
전시의 해법들은 돈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가 무엇에 의미를 두고,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맛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한수옥 작가는 "아무리 기성품이라도 깃든 추억이 다르면 그 의미도 달라진다. 사람마다 소유의 방식이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전시를 기획한 계기라고 설명했다.

미술의 저울에 오른 가치의 문제

결국 이 전시의 주제는 가치의 문제다. 우리는 어느새 모든 가치를 화폐 단위로 수렴하는 데 익숙해졌지만, 가치의 본뜻은 '사물의 쓸모', '인간 욕구의 목적', '관계에 의해 부여되는 대상의 중요성' 등이다. 대상 자체의 실용성, 인간성, 대상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 등이 얽힌 복합적인 개념인 것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하에서 그 문화적 의의는 생략되어 왔다. 화폐의 틀에 갇힌 가치는 쉽게 측정하고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욕구도 화폐를 축적하려는 방향으로 급격히 부추겨져 왔다.

이런 변화는 오늘날 많은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예를 들면 부동산 투기는 화폐 가치로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과 땅의 가치를 밀어내 버린 행위다. 환경오염을 당연시하는 개발 사업,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당하는 교육·노동환경 등 문명의 보편적 문제들의 바탕에 가치의 전도가 있다. 교환의 편의를 위해 고안된 수단으로서의 화폐가 그 자체로 욕망의 목표가 되고 심지어 물신으로 군림하게 된 현상이다.

최근 인문사회학계의 연구들은 인류에게 다양한 가치가 있었고, 그것이 곧 풍부한 문화적 토양이었음을 재조명함으로써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 칼리지 사회인류학과 교수인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에서 북미 원주민 사회를 예로 든다.

<나누기 중개소>전에 전시된 김기문 작가의 'Flea Market'
일정 수준 이상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이 잔치를 베풀어 그것을 소모하는 포틀래치, 부족 간 평화를 유지한다는 의미로 교환했던 상징적 물건인 왐펌 등은 사회마다 가치에 대한 정의와 접근 방식이 달랐음을 증명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경제적 인간', 물질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과 화폐 가치의 절대성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 근거다.

가치의 문제를 다루는 최근 한국미술 작업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미술만의 방식으로 말을 건다. 화페 가치와 다른 가치들을 본보이고 그 영향력과 가능성을 탐색하는 새로운 미학이 발견되고 있다.

다른 가치의 공공성 찾는 물물교환 미술

올해 6~7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한국작가 단체전 <액체달>에서 홍현숙 작가는 물물교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국의 '아름다운 가게'에서 구한 옷들을 우즈베키스탄과 독일의 시장에서 현지인의 옷들로 교환했다. 작가에게 옷은 입었던 이들의 특성과 문화적 배경이 담긴 오브제다. 따라서 옷을 교환한다는 것은 각각에 배어 있는 감각과 체험을 소통시킨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다른 사회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소통의 일부다. 돈을 빼고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의 형식 속에는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다른 가치를 경험하게 하는 미술의 기능은 공공성과 연결된다. 공공미술의 경향 속에서 물물교환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일깨우는 형식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재작년 서울시 북아현동에서 진행된 도시갤러리 프로젝트에서 작가들은 주민들의 물건과 함께 거기에 깃든 사연과 시간을 수집했다. 주민들은 헌 물건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추억을 털어 놓았고, 과거와 주변과의 관계를 되새겼다. 그 이야기들이 곧 북아현동의 역사였다.

<액체달>전에 전시도니 홍현숙 작가의 '물물교환 프로젝트'
이런 프로젝트들에서 미술은 소통의 적극적인 모티프로, 관객을 사회적 관계에 참여시킨다. 어떤 영향 속에서 자신이 '만들어져' 왔는지 스스로 성찰하게 한다.

가치의 패러다임 뒤집기

미술이 전적으로 화폐 가치의 편에 설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아트스페이스휴 김노암 대표의 말처럼 "미술은 원래 비합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시대와 사회에 발 딛고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가치 판단의 주된 관계들, 당대의 패러다임과 사회 구조 속에 놓일 수밖에 없다. 미술은 때때로 이 점을 답습하는 듯 비튼다. 그럼으로써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을 기괴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한 예로, 조동광 작가는 버려진 트로피를 모아 거대하고 기형적인 트로피를 만든다. 수집과 조립을 통해 화폐 가치가 없는 것을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트로피에는 딱히 화폐 가치는 아니더라도,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가 주어진다. 누군가는 트로피들의 과장된 형과 빛에서 도시 문명의 단면을 읽어낼 것이고,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것이다. 이 과정은 화폐 가치가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를 대체해가는 현황에 대한 교란이다.

리혁종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버려진 나무를 주워 조각하는 것을 넘어, 작품 판매와 그 이후까지 생각한다. 작품이 판매되면 개발 위협에 노출된 토지를 구입해 소농에게 제공하거나 공동체의 소통을 도모하는 평상을 보급하겠다는 '공약'이 작품에 포함되어 있다. 판매 역시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에 아예 전시장을 가게로 꾸미기도 한다.

옥인 콜렉티브의 <콘크리트 아일랜드>전 오프닝 퍼포먼스인 '오픈 컷'
지난 4월에는 <마이너스 자본주의 샵>을 열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가치의 전환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방식과 정반대다. 화폐 가치가 더해지는 방향으로 교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화폐 가치가 없는 것을 화폐 가치로 바꾼 후, 공공적 사용 가치로 되돌린다. 가치의 전복인 셈이다.

사회적 맥락 속 미술 가치의 재구성

이런 작업들은 오늘날 작가와 미술이 처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장의 힘이 커지면서 경제적 논리와 미술에 대한 이상을 조화시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스타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들 사이에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고, 한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약육강식의 경제적 논리가 고스란히 침투한 현재의 미술 제도 속에서 작가의 생계 유지는 작업 내용, 작가의 이상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미술을 둘러싼 가치의 경합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이다. 작가들은 생활과 작업을 오가는 경험에서 사회적 맥락 속 미술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추출해내곤 한다.

작가 그룹 옥인 콜렉티브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재개발 계획이 있었다. 작년 김화용 작가가 살던 옥인아파트가 철거되기 시작했을 때 동료 작가들이 이곳에 모여 함께 작업한 것이 출발점이었다. 당시 자신의 거주지가 외부의 가치 판단으로 사라진 기억, 사회적 현장에 미술을 위치시켜 본 경험은 이후 옥인 콜렉티브 작업의 바탕이 되었다. 미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내외부의 가치 구조를 성찰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다.

지난 9월 열린 전시 <콘크리트 아일랜드>에서 가치를 상정하고 교환하는 다양한 방식을 제안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오프닝 퍼포먼스로는 헤어 디자이너들이 돈이 아닌 가치들을 커트 서비스 비용으로 받는 '오픈 컷'을 진행했다. 참여한 빈도해, 윤영중 헤어 디자이너는 각자 원하는 책이나 CD, 10인치 이상의 담쟁이 사진, 미용실 로고디자인과 얼굴 드로잉, 2시간 분량의 영상 편집 강의 등을 받고 손님의 머리카락을 잘라 주었다.

전시장에는 인터넷 라디오 스튜디오를 마련해 다양한 정보를 방송했다. 집에서 커피를 로스팅하고 푸딩을 만드는 법 같은 생활밀착형 정보부터 사회권에 대한 논의까지 아울렀다. 진시우 작가는 "방송 내용을 관통하는 것은 '잉여가치'라는 점이다. 정해진 목적을 떠나 나눌 수 있는 가치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 가치의 모습을 돌아보는 미술 작업들은 미술뿐 아니라, 우리 삶의 환경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이들 작업의 교훈을 일상에 적용시키는 뒷일은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뜻이다. 돈과 가치를 구분하고 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정당하고 즐겁게 가치를 추구하는 일, 사는 데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진실을 회복하는 일 말이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