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으로 간 영화감독]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송일곤, 데이비드 린치 감독 3人3色 전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엉클 분미
세상에 영화감독만큼 종합예술인이어야 하는 직업도 없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물론 세트를 구성하고 카메라의 앵글과 배우의 동선에 신경 써야 하며, 음악도 골라야 한다.

그뿐인가. 때론 현장을 장악하기 위한 카리스마 연기도 해야 하고 수많은 이해 관계자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발휘해야 한다.

그러니 영화감독의 끼가 영화관 밖에서까지 발휘된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소설가와 화가, 음악가 등 다른 직함을 '겸업'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최근엔 특히 영상 매체를 활용한 작업들로 무게 중심이 옮아간 미술계와의 교류가 잦다. 영화감독들에게 더 폭 넓고 혁신적인 영상적 상상력을 허락하는 디지털 미디어의 발전도 이런 추세에 한 몫 한다.

마침 국내에서도 영화 감독의 미술 전시가 활발하다. 영화팬에게도 미술 관객에게도 흥미진진한 현장들이다.

데이비드 린치의 회화 작품
영화와 미술을 넘나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활약상

<플랫폼 2010: 프로젝티브 이미지>가 열리고 있는 아트선재센터 3층에는 총 4개의 영상이 상영 중이다. 달리는 픽업 트럭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남녀의 클로즈업, 역시 달리는 픽업 트럽 뒷자리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춤 추는 한 남자의 풀샷, 그리고 숲 속 정체불명의 물체를 몽환적으로 찍은 롱샷까지.

첫눈엔 제각각인 것처럼 보이지만, 흥겨운 음악이 이들을 불러 모은다. 들을수록 귀를 끌어 당기는 불협화음처럼 4개 영상은 전시장 전체에 정형화되지 않은, 기이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작품 '미지의 힘'이다. 작가의 본거지인 태국의 상황을 알면 이해하기가 좀 쉽다. 태국은 2006년 쿠데타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경제적으로도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서민과 노동자들에게는 힘든 삶의 환경이다. 이 와중에 픽업 트럭이 사람들을 싣고 다니는 것은 흔한 풍경이 되었다. 개발되는 현장마다 인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고단한 삶의 와중에도, 사람들은 불만을 품기보다는 차라리 술에 취해 있는 편을 택한다고 한다.

송일곤의 '고기잡이 소년과 군인들'
"노동자들은 도급업자에게 이끌려 공사장을 전전하며 도시와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아 다닌다. 픽업트럭에 실린 유랑민들은 태국의 풍경이 되어 버렸다. 2006년 태국의 정치적 혼란기에는, 정치인들에 의해 고용된 노동자들이 방콕으로 이동해 시위대와 반시위운동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 당시 대다수의 노동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버스와 픽업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하는 데 만족했다. '미지의 힘'은 우리가 살아가는 비결인 무기력과 무지를 기념하는 설치작업이다."(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이제 픽업 트럭 뒷자리에서 춤을 추는 남자와 그 주변으로 지나가는 황량한 풍경의 미스터리가 풀렸다. 하지만 또 다른 영상, 숲 속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는 무슨 뜻일까. 태국의 문화적 뿌리인 자연과 종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자연의 순환을 품은 정글과 윤회를 강조하는 불교는 사람들에게 운명에 순응하는 법을 가르쳤다. 현세의 고단함은 전생의 업이거나, 생과 생이 연쇄되는 거대한 질서 속에서 한낱 찰나의 일일 뿐인 것이다.

국내에는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널리 알려진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영화와 비디오 아트를 넘나들며 활약 중이다. 아니, 특정 작품을 영화 혹은 미술로 구분하는 것은 단지 편의에 의해서이고 사실 그의 모든 작품은 영화관에서도 전시장에서도 상영될 수 있다.

송일곤의 '빈 방'
황금종려상 수상작으로 한국에서도 일반 개봉한 영화 <엉클 분미>의 경우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The Primitive Project'라는 일련의 예술 작업의 일환이었다. 이는 감독이 태어나고 자란 태국 북동부 지역을 기억하는 취지의 프로젝트로 <엉클 분미에게 보내는 편지> 등 몇 편의 단편과 책, 사진 등으로 구성되었다.

60년대 정부와 공산당 게릴라 사이의 전투가 있었던 나부아라는 지역을 중심으로 역사와 현재,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소년들을 겹쳐놓는 내용이다. 이 결과물 중 일부는 11월17일까지 열리는 <미디어시티서울2010>에 전시되고 있다.

그의 영화 작품에도 비디오 아트 작품의 특성이 녹아 있다. 예를 들면 '미지의 힘'이 가진 것들, 여러 개의 이야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와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혼합하는 기법,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한 초현실적 은유, 일상 속에 뿌리 깊은 불교 사상 등은 <엉클 분미>에서도 발견된다.

죽음을 앞둔 분미 아저씨에게 오래 전 죽었던 아내가 유령의 모습으로, 행방불명되었던 아들이 괴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분미 아저씨가 전생을 찾아 나서는 여정 주변으로 정글과 태국의 신화가 펼쳐지는 이 영화는 근현대사 속에서 발생한 태국적 삶의 형태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간간히 언급되는 정치적 억압과 혼란의 기억이 바닥에 깔린 가운데 사람들은 욕망하고 체념하며, 정신 분열과 비약을 통해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룬 파로키의 '딥 플레이'
영화와 미술의 경계에 있는 이 감독, 이 정체불명의 작품들이 양쪽 모두에게서 열렬히 지지받는 이유는 영상이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의 공기를 몸으로 전해주는 매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도, 강렬하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플랫폼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

올해 5회째를 맞는 미술 프로젝트 <플랫폼>은 영화와 미술의 경계지대가 확장되는 최근 추세를 반영해 영화관과 전시장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미술 작가들의 작업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영화 감독들의 작업은 전시장에 설치된다.

백남준을 비롯해 김수자, 정연두, 임민욱, 준 양, 로렌스 워너 등 비디오 아티스트들의 대표작과 신작을 볼 수 있고, 60~70년대 일본과 미국의 비디오 아트, 실험 영화의 선구자인 렌 라이에 대한 강연도 마련된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과 함께 특별히 조명되는 영화감독 겸 미술 작가는 하룬 파로키다. 초기 영화 감독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작품을 오마주한 '그리피스 영화의 구조에 대하여', 영화사 속에서 공장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은 장면을 찾아 편집한 '110년 동안,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2006년 독일월드컵 결승전 관련 영상으로 구성된 '딥 플레이' 등 3개의 작품이 전시장 한 층을 채우고 있다.

그 중 '딥 플레이'는 오늘날 대중 매체를 통해 전파되는 영상에 얼마나 많은 기술과 자본이 집약되어 있는지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방송사의 생중계 영상과 경기장 외관 영상, 선수들의 이동 경로 영상, 그들의 신체적 능력을 수치화한 컴퓨터 그래픽 영상, 이런 영상을 실시간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영상 등 12개의 영상이 동시에 관객들을 둘러싼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중 '엉클 분미에게 보내는 편지'
전시장은 영상에 포위된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공간 같다.

<플랫폼2010: 프로젝티드 이미지>는 11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위치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다. 마지막 <플랫폼>이다. 작품 상영 일정은 홈페이지www.platformseoul.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송일곤 감독의 여정과 함께 하세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위치한 아뜰리에아키에서는 송일곤 감독의 첫 사진전 가 열리고 있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미지의 힘'
송일곤은 <꽃섬>, <거미숲>, <마법사들> 등의 작품으로 이국적인 감수성을 선보였던 감독으로 최근에는 쿠바 내 한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시간의 춤>을 만들었다. 는 작년 인도와 쿠바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을 모은 전시다.

하지만 물론, 단순한 여행 사진전은 아니다. "순서대로 관람하고 그 과정을 통해 당신의 이야기를 만들라"는 감독의 당부가 있다. 긴 여정의 일부를 추려 하루 동안의 일처럼 구성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흐름은 관객의 발걸음과 생각을 동시에 이끈다.

전시는 '신비한 길의 여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이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몇 대의 차만 오간다. 바닷가에서는 '바라보는 소년과 소녀'의 뒷모습을 만났다. 막 분주해지기 시작한 거리에서는 손에 손을 잡고 일터로 향하는 맹인들과 마주쳤다. 바다에서는 '어부'가 그물을 쳤다.

그 와중에 사랑을 기리고 춤을 추고 자리를 지키는 여자들, 몇 세대에 걸친 생사를 겪은 거리의 풍경이 있다. 땀으로 흠뻑 젖은 한 남자의 등과 고기잡이 소년, 군인들이 지나갔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을 클로즈업한 사진에는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입을 굳게 다문 노인의 눈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소년의 물고기였고 그 소년을 바라보던 군인들이었고 땀 흘려 일하던 남자이기도 했다. 사제인 그는 지금 신전으로 향하고 있다."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
어떤 사진이 인도이고 어떤 사진이 쿠바인지, 등장인물이 누구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저 사진이 품은 무궁무진한 모티프를 벗 삼아 관객 스스로 길어 올리는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런 전시는 어쩌면 모든 영화 감독이 꿈꾸는 소통 방식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이 지은 이야기가 관객 각자의 삶 속에서 생명력을 얻기를 결국, 바란다. 그래서 가끔은 어둡고 닫힌 영화관 바깥으로 외출해보는지도.

전은 11월 30일까지 열린다. 송일곤 감독의 팬은 물론, 여행과 이야기 만들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찾아볼 만하다. 070-7522-7713

한 손에는 카메라 한 손에는 붓,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컬트 월드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한 패션 브랜드 꼼데가르송의 플래그십 스토어에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

데이비드 린치의 '인랜드 엠파이어'
건물 지하에 마련된 미술 전시장 식스의 개관전으로 미국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것. 전시 제목이 <어두운 방>이라니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기괴하고 난해한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의 명성에 걸맞다.

꼼데가르송이 초청한 것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작품들뿐만이 아니다. 독창적 스타일과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대중문화를 발칵 뒤집어 놓고, 주류 영화계까지 평정한 그의 행보가 늘 실험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꼼데가르송의 브랜드 정체성과 통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언론의 악평이 쏟아졌지만 심야극장에서 인기리에 장기상영되며 컬트 문화 현상이 된 <이레이저 헤드>, 미국 TV 드라마의 전설로 남아 있는 <트윈 픽스> 등이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미국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을 증명한다.

1990년 <광란의 사랑>으로 수상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2006년 베니스영화제가 안긴 평생공로상 등은 세계영화계가 그의 업적에 보낸 지지의 표시다.

국내 관객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또 다른 직업은 화가다. 영화를 공부하기 전 미술학교에 다닌 이력이 있다. 자신의 영화를 "움직이는 회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감독의 고백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는 어머니가 알록달록한 어린이용 책 대신 준 흰 종이에 아무 제약 없이 그림을 그리는 데에서 자유를 만끽했다고 한다. "그리는 행위는 나를 진화시키고 확장한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여행"이라는 말은 회화 작업에 대한 그의 애정을 드러낸다.

영화 작품 활동이 뜸한 요즘에도 붓만큼은 놓지 않은 듯,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미국 내 미술 전시회 소식은 종종 들려 온다. 그가 선보이는 회화 작품은 영화만큼이나 재기 발랄한 악몽 같다. 미술에 본격적으로 입문하던 시절 영향 받은 것으로 알려진 마크 로스코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다.

"나는 캔버스마다 그림이 스스로 그려질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하려고 노력한다. 합리적 판단이나 훼방 없이 아이디어가 꽃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지성에 갇히지 않고 세상을 환히 보는 능력 말이다. 우리의 지적 능력은 많은 놀랍고 환상적인 것들을 목 조른다. 하지만 이성과 논리를 빼면 세상은 무한하다(infinite)."(데이비드 린치 감독)

내면을 분출한 회화들은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놀라운 작품 세계의 한 기원과도 같다.

<어두운 방>에는 총 12편의 단편영화와 최신 회화 작품들이 전시된다. 이중에는 감독이 자신의 유료 웹사이트를 통해서만 공개했던 단편영화들도 포함되어 있다. 꼼데가르송의 디자이너인 레이 카와쿠보가 직접 디자인한 전시 공간도 작품을 만나는 흥미로운 통로다. 전시는 11월 5일부터 시작해 내년 1월 2일까지 이어진다. 02-749-2525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