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외 혁신 대표주자들 20분간 스토리텔링 형식 강연신선한 아이디어와 지식, 관객과 공유 한국판 TED지향

지식의 콘서트장이 된 잠실 실내체육관
강단 위에 한 사람이 서 있다. 편안한 옷차림의 그는 자신의 복장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객석의 청중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언가를 적기도 하고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조는 사람은 없다. 강연은 마치 대중스타의 콘서트나 기독교의 대부흥회처럼 최고의 집중과 몰입 속에서 이루어진다. 말하고 듣기의 열띤 커뮤니케이션이 끝나기까지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짧고 굵은 이 강연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시작 전부터 서로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기존 강연의 이미지를 완전히 깬 이 '지식콘서트'는 미국의 비영리단체 TED가 개최하는 포럼이다.

국내에서 TED는 이미 유명한 이름이다. TED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각 분야 유명인사들의 강연은 좋은 영어 학습자료로 쓰이면서 먼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후 애플사의 스티브 잡스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의 강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적 자극이 되며 TED의 이름을 널리 알렸다.

얼마 전 국내에서도 이런 지식콘서트가 열렸다. 지식경제부가 주최하고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주관한 '테크플러스 포럼'이 G20 정상회의와 연계해 마련된 것이다.

자전거를 끌고 나와 눈길을 끈 황창규 전략기획단 단장
이틀 동안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펼쳐진 이번 포럼은 국내외 혁신 대표주자들이 약 20분간 스토리텔링 형식의 강연을 통해 신선한 아이디어와 지식을 관객과 공유하는 한국판 TED를 지향했다.

포럼의 패러다임을 바꾼 지식 융합 콘서트

이번 행사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강연 장소의 규모와 테크놀로지 수준이었다. 보통 호텔 회의장에서 500여 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열리던 기존 지식포럼과 달리, 대규모 체육관에서 개최하여 많은 일반 대중의 참여를 가능케 한 것은 이제 지식의 공유가 특정 계층에 머무르지 않는 지식 평준화의 시대가 왔음을 체감하게 했다.

또 넓은 공간에서 치러진 기존의 포럼이나 공연에서 나타났던 뒷좌석 관람의 소외감도 이번 포럼에선 대형 다중 분할화면을 통해 완전히 불식시킬 수 있었다.

특히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야기가 주제인 이번 행사에서 돋보였던 것은 시청각적 발표 시스템의 안정된 기술이었다. 강연에서 소개되는 최고 수준의 기술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3D 영상과 넓은 공간에서도 잡음이 전혀 발생하지 않는 입체음향효과 시스템은 청중의 몰입을 최대화시켰다.

세계를 위한 혁신에 대해 강연하는 이브 도즈 교수
또 강연장 밖에서도 이런 테크놀로지를 통해 대중과 지식과 아이디어의 교류를 시도한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포럼 측은 "아이폰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오픈하고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등 '손 안의 지식창고'를 통해 강연장을 직접 찾지 않은 사람들도 아이디어의 교류와 확산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하드웨어적 측면보다 관심이 가는 것은 역시 소프트웨어다. '테크플러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이 행사는 테크놀로지를 중심으로 한 산업기술 지식축제다. 때문에 인문학이나 예술 담론은 상대적으로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의 한 관계자는 "산업기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술과 인문학의 소통'에 있다"고 운을 뗀 뒤 "이를 위해서 기술은 경영뿐만 아니라 인문학 또는 문화예술과 소통하며 '인간을 위한 기술'과 '예술적 가치를 가진 새로운 명품기술'을 고민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번 테크플러스 포럼 역시 '한국에서는 왜 아이폰을 만들어내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이번 포럼의 강연자들을 면면은 이처럼 달라진 기술의 패러다임을 이해가능하게 했다.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주제로 강연하는 재즈 드러머 남궁연.
젊은 천재 10인에 선정된 로봇 발명가 데니스 홍 교수, 세계적인 증강현실 기업 토탈이머전의 필리프 드 파소리오가 '산업 기술'을, HP의 타드 브래들리 수석부회장과 디자인 기술 경영의 대가 로베르토 베르간티가 '경제 경영'을, 최초의 가상현실 고안자이자 사상가인 재런 레이니어와 세계적인 디지털 인문학 권위자 올리버 그라우가 '인문 사회', 그리고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와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 등이 '문화 예술' 분야를 맡아 기술과 인간이 만나는 새로운 시대의 지식을 이야기했다.

달라진 문화 환경에 적응해야 기업 살아남아

환경(Eco), 예술(Art), 아이디어(Edge), 감성(Touch), 통찰력(Insight) 등으로 분류된 이번 포럼의 주제는 앞으로의 기술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시사해준다. 소비자 혹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기술이 수용하고 개발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 소주제들인 것이다.

포럼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단상에 오른 황창규 지식경제 R&D 전략기획단 단장은 '산업기술 혁신비전'을 주제로 이야기를 꺼냈다.

황 단장은 앞으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융합(convergence)'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송나라의 청자기술로 청자를 빚고, 상감기법을 추가한 우리의 문화재에서도 나타나듯이 융합의 정신은 이제 산업 발전에서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술 산업의 방향을 'Humanitech'라고 제시했다. 사람과 기술이 하나되어 이루어지는 융합의 가치라는 것이다.

'디자인의 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하는 김현선 대표
그는 10년 후인 2020년, 예측가능한 세계의 4가지 키워드를 Healthy world, Eco-friendly world, Smart world, Co-prospering world로 정의하면서 건강과 친환경, 기술을 통한 소통, 균형 발전이라는 이 키워드들이 융합을 이뤄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기업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이어진 '환경' 섹션의 강연들과 그대로 이어졌다. 첫 번째 초청강연자로 무대에 오른 타드 브래들리 HP 수석 부회장은 "기술은 사람의 감정과 연결에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며 "그런 변화의 힘을 배가시키는 요소들을 파악해 비즈니스와 경제회복을 가속화시킬 요소들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HP 역시 정보가 가장 중요한 자원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한 정보를 적절한 곳에 적시에 사용하며 전 세계의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뒤이어 무대에 오른 이브 도즈 인시아드 경영대학원 교수도 "시대의 변화로 상호보완적인 기업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며 브래들리 부회장의 말을 뒷받침했다.

그는 "전 세계 모든 이로부터 배워 '윈-윈'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국가를 초월하는 개념이 출현했다"고 설명하며, 이를 '메타 내셔널 모델'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노키아, 스타벅스, 에어버스, 시세이도도 처음에는 승자는 아니었지만 전 세계 정보를 집결시켜 활용함으로써 업계 선두가 될 수 있었다"고 해석했다.

디자이너답게 감각적인 의상을 입고 나와 주목시킨 카림 라시드
예술과 아이디어로 소통하는 기술이 성공한다

이날 가장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예술과 아이디어 섹션의 강연들이었다. 로베트로 베르간티 밀라노 폴리테크니코 교수는 "아이디어와 기술이 풍부한 사회에서 기업은 어떻게 경쟁해야 할까"라고 물었다. 잠시 후 그는 자신의 질문에 답 대신 닌텐도 위(Wii)를 예로 들었다.

그는 "닌텐도 Wii의 성공은 기술이 훨씬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기술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전까지의 게임이 단순히 게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의 발전에만 치중했다면 Wii는 경험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는 것.

그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땀도 나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Wii는 기술의 혁신이 아니라 의미의 혁신에 성공한 게임"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근본적인 혁신을 위해서는 고객의 말을 듣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며 청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지금 전 세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애플의 제품들도 실은 사용자 중심이 아니라는 분석이다. 그는 "우리는 늘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를 듣지, 그가 우리 이야기를 듣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회사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낸다는 의미였다.

그는 혁신적인 기술이 나오기 위해서 기업은 사용자보다는 해석자들에게 다가간다고 설명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다시 돌아왔을 때 기존의 틀을 깨고 아이맥을 만든 것도 컴퓨터 디자이너가 아닌 화장실 디자이너를 채용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는 "여러분과 같은 경험을 보면서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며, 참신한 해석을 얻기 위해서는 이처럼 틀을 벗어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재즈 드러머 남궁연은 등장과 함께 드럼 연주로 강연을 시작해 좌중을 완전히 압도했다. 그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익숙한 주제로 강연을 했지만, 예의 달변과 위트로 음악을 통해 풀어낸 예술과 기술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프리젠테이션 화면에 Analog와 Digital이라는 단어를 띄워 이어령의 Digilog 대신 Dialog로 결합시킨 그는 "다른 두 문화가 만나면 대화를 해야 최적의 결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최근의 음반들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전문적인 기술의 설명에 할애를 더 많이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며 아쉬워한다.

그는 이런 현상에는 시쳇말로 '(소름) 돋는다'며 '감탄'하지만 감동은 없는 한계가 있다며, 이것이 바로 현재 기술과 예술의 관계가 아닐까 하고 좌중에 질문을 던졌다.

그는 또 재즈의 구조를 통해 소통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원곡-즉흥 변주-다시 원곡'으로 구성되는 재즈의 연주 형식은 그대로 원곡에 대한 존경과 변즈의 자유가 공존하는 이상적인 소통의 형태라는 것. 그는 이처럼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아날로그 정신이 기술에 깃들어야 비로소 감탄만이 아닌 감동을 줄 수 있는 기술이 가능하다며 객석의 박수를 이끌어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중요해진다

감성과 통찰력 섹션에서도 강연자들은 공통적으로 인간 감성의 중요성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김현선디자인연구소의 김현선 대표는 '디자인의 시대는 끝났다'라는 선언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감성의 회복을 위한 공간 디자인의 예로 청계천의 경관 디자인, 부산과 거제도를 연결하는 대교, 서울의 대표색 선정 등을 들며 "그동안은 디자인이 형태 중심이 됐지만 이제는 감성의 회복을 위한 디자인에 초점을 둘 때"라고 진단했다.

이를 위해 그가 제안한 것은 제로 디자인(Zero-Design). 그는 가로등 없애는 대신 경관 벽으로 조명을 제공하는 일본 마쯔모토성의 사례를 들고, 우리나라에서도 미래의 디자인을 위해 현재 '비움의 디자인'을 실천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 대표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을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통일성과 표준화를 강조하면서 창의성이 점점 사라지고, 디자인이 그 순간을 느끼게 하는 것을 저해하는 경우도 있다"며 "비록 디자인에서 디지털 기술의 도입으로 비인간화된다는 비판도 있지만, 기계를 통해서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고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준다는 면에서 더 인간적인 면도 있다"고 해석했다.

또 그는 이전에는 2D 디자인만 가능했다면 오늘날은 3D 디자인에서 멀리는 4D 디자인까지 이동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4D 디자인은 가상 공간에서 디자인이 가능하고, 중간 유통 없이 고객에게 상품을 바로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같은 디자인 환경의 혁신은 고객 입장에서는 자신이 정확히 원하는 디자인을 할 수 있게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은 앞으로 과거보다는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이 더욱 필요해졌다고 부연했다.

한편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은 미디어 아트를 매개로 감성과 통섭이라는 창조산업의 두 키워드를 이야기했다. 그는 10년 동안 아트센터 나비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미디어 아트 혹은 디지털 아트의 무궁무진한 활용가능성을 설파했다.

노 관장은 "자원이 한정되었을 때에야 인간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거기서 바로 창의성이 나온다"며 "창조산업의 피라미드 도형 꼭대기가 순수예술이라면, 제일 밑이 출판사업이고, 중간에 있는 것이 바로 미디어 아트와 같은 응용예술"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들이 삼각 피라미드 속에서 서로 소통이 될 때 융복합의 발전도 가능해진다"고 강연을 마무리했다.

TED가 신개념의 콘서트인 이유는 청중들이 순간순간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또 여느 강연장과는 다른, 콘서트장에 가까운 넓은 공간에서 강연을 한다는 것은 강연자들에게도 긴장되는 도전이다.

실제로 이번 포럼에서도 어떤 강연자들은 여유 있는 모습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긴장감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포럼이 끝난 후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표정을 보면 이번 한국판 TED는 어느 정도 신선한 재미와 지적 자극을 주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