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체

디자인 생활의 다단계 매뉴얼

이정혜의 '동지들', '에코파티메아리' 매장, '킷토스트' 등 흥미로운 사례등
  • 에코파티메아리의 현수막 가방
버거운 이야기는 이제 그만 두자. 문제는 그렇게나 중요하고 근사한 디자인 문화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일 테니 말이다.

디자인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지고 행해지는 무수한 것들 중에 진짜 쓸모 있는 사례만 골라 매뉴얼을 만들어 봤다. 단계를 따라가다 보면 디자인이 얼마나 유용한 삶의 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Step 1. 시작은 자기 점검부터

"일단 옷장을 열어 보세요. 옷장이야말로 우리가 어떤 물건을 어떻게 쓰면서 살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소죠. 옷들 중에 꼭 필요한 것, 버려야 하는 것,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해 보세요. 내가 혹시 물건들에 압도당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비밀 많은 디자인씨>의 저자 김은산은 소비생활의 균형감각을 회복하는 것이 디자인의 권리를 찾는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부추겨진 소비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디자인 능력을 가리는 가장 큰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 이정혜 디자이너의 '동지들'
옷장 속에서 낡았지만 자꾸 손이 가는 옷, 절박한 심정으로 샀으나 어쩐지 팽개쳐 놓게 된 옷,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정이 든 옷, 더 입고 싶지만 옷감이 좋지 않아 헤져 버린 옷 등등과 마주치다 보면 자신의 욕망까지 정직하게 돌아보게 된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는 나와 물건 사이 '관계도 그리기'를 제안한다. 가장 싼 것과 가장 비싼 것, 가장 자주 쓰는 것과 갖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것, 나를 위로하는 것과 불편하게 하는 것 등등 여러 기준으로 물건을 나누어 배치해 보라는 것이다.

"그 풍경을 보면 내가 물건을 어떻게 다루고 있고 물건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 한눈에 들어올 거예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필요로 하는지 알면 디자인을 대하는 나름의 기준이 생기지 않을까요?"

Step 2. 좋은 디자인으로부터 배우기

이정혜 디자이너는 지난해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린 <패션의 윤리학-착하게 입자> 전에 '동지들'을 선보였다. 우리의 제멋대로인 체형들을 적당히 눈감아줄 것 같은 인상의 이 옷들은 '165cm에 48kg 몸매도 아니면서 어디 감히'라고 말하는 듯 새침한 요즘 옷들과는 다르다.

  • 에코파티메아리
선과 모양은 자연스럽고 소재는 부드러워 몸마다 친하게 감길 것 같다. 저 옷들의 맵시는 입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우러나온다.

"일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옷이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 보았어요. 세월에 따라 변하는 우리 몸에 맞춰지는 옷 말이에요. 나아가 몸의 변화 하나하나가 아름답게 드러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동지들'은 우리가 사고파는 것으로 대체해 버린 물건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법을 일러준다. 소중히 대하고 오래오래 서로 길들여져 갈 것, 나를 비추어 볼 것. 소비생활의 지혜는 삶의 지혜로 이어진다.

소비량이 줄어드니 환경에 좋고, 욕망이 정돈되면 삶의 태도도 정갈해진다. 아끼고 돌볼 줄 아는 마음이 물건만을 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정혜 디자이너는 "디자인에 앞서 물건을 보는 시선부터 돌아보자"고 말한다.

"패스트패션이 유행이라죠. 싼 옷이 넘쳐나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득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런 옷들은 한 계절 지나면 버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지잖아요. 어떤 물건을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사용할 때마다 기억을 덧붙이며 새록새록 소중하게 대하는 즐거움은 허락되지 않죠. 저는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오래 사용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떤 물건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야 디자인을 보는 눈도 생기지 않을까요?"

Step 3. 디자인의 비밀 캐기

디자인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디자인 감수성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전문가용 지식을 권하는 것은 아니다. 마침 일반인의 눈높이로부터 디자인의 일상적 효용을 짚어주는 친절한 책들이 최근 출간됐다.

현시원 큐레이터의 <디자인 극과극>은 한국의 평범한 가정집 부엌에서부터 선거운동이 벌어지는 거리, 대중문화사와 현대미술 갤러리까지 종횡무진 누비며 디자인의 단서를 찾아낸다. 디자인이 이렇게 가까이에,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모험담이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필기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모나미 153 볼펜의 '전설'을 채집하고, 농촌 작업복 출신으로 한국적 패션문화의 비공식 대모가 된 '몸빼'의 변천을 밝힌다. 육영수 여사의 올림머리, 앙드레 김의 체크무늬 목도리, 지 드래곤의 모히칸 스타일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시도하는가 하면 골목을 누비는 배달원을 인터뷰하며 철가방의 성공 원인을 추리한다.

  • 에코파티메아리 김효진 디자인 팀장
현시원 큐레이터에 따르면 "할머니가 식탁보 만들고, 아이들이 교과서에 낙서하는 것도 디자인 행위"다. 그렇다면 우아한 디자인에 지레 겁먹고 이 재미있는 일이 남의 몫인 줄 아는 것도 손해 아닌가 말이다.

김은산의 <비밀 많은 디자인씨>는 "물건을 둘러싼 환경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생활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디자인"이라고 전한다.

이 책 역시 일상적 관점에서 디자인의 역사와 현황을 살핀다. 디자인의 사례만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의 정치적 의미까지 다룬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면 이 책은 아파트를 가장 한국적인 디자인으로 꼽으면서, 높은 층수에 얽혀 있는 투기와 상승의 욕망을 생각한다. 공공디자인을 이야기하면서는 디자인의 사회적 영향력을 사회적 약자와 미래 세대를 위해 발휘하자고 제안한다.

정말, 세상을 바꾸려 했던 디자인들에 대해 읽다 보면 '디자인=스타 디자이너가 만든 명품 브랜드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란 어처구니없는 오해는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만다.

"디자인을 잘 사용하기 위해 우리의 디자인 능력을 사용하자"는 <비밀 많은 디자인씨>의 교훈을 받아들여 심화학습을 하고 싶다면 양요나디자인학교(www.dicoo.co.kr)를 찾아가 보자. 양요나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이 교육 사이트는 디자인 능력을 길러주는 동영상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5년 동안 디자이너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오프라인 강의를 바탕으로 한 내용이고, 누구나 들을 수 있도록 수강료를 대폭 내렸다. 1년에 1만 원이면 매주 업데이트되는 강의를 이용할 수 있다.

Step 4. 디자인의 가능성 체험하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에코파티메아리라는 매장을 체험해볼 것을 추천한다. 타폴린 라인이라는 '신상'이 출시됐다는 소식이다.

같은 소재로 백팩부터 토트백, 필통과 카드케이스까지 만들어졌다. 몸체는 옅은 회색, 여기에 검정색과 상큼한 노란색, 파란색, 보라색 등의 디테일이 포인트로 더해져 있어 세련됐다. 게다가 천하무적일 것 같다. 견고하고 방수도 잘 될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막과 광고판, 트럭 덮개였다.

에코파티메아리는 아름다운가게 재활용사업부 산하 브랜드다. 기증받은 물건들을 소재 삼아 새로운 물건을 디자인해낸다. 매장에는 한때 소파였던 가죽 가방과 파우치, 헌 옷으로 만든 인형 등이 가득하다.

  • 킷토스트의 시계 테이블
현수막으로 만든 가방에는 아직도 당시의 뜨거운 구호가 또렷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디자인 요소로 거듭났다. 이 독특한 패턴에서 한국의 거리 문화를 발견한 외국인들이 많이 사간다.

에코파티메아리 상품들은 공정 전체가 친환경적이다. 가공하는 데 화학약품이 필요한 소재는 쓰지 않는다. 가능한 한 손으로 작업한다. 예쁘게 만드는 것보다 공정 하나를 줄이는 게 더 중요하다. 부자재 사용도 자제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절제미 있는 디자인으로 이어진다. 군더더기가 없다. 가방 속도, 지갑 속도 간소하다. 이런 물건들과 더불어 살다 보면 차림도 간소해질 것 같다. 꼭 지녀야 할 것만 구별하는 눈도 밝아질 것 같다. 디자인이 욕망을 가누는 법을 가르쳐줄 수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한번 물건을 사면 언제까지나 A/S된다니, 평생 교육까지 함께 얻는 셈이다.

물건을 사는 것 이외에도 디자인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 많다. 에코파티메아리는 다양한 캠페인을 마련해 사람들을 초청한다. 가죽팔찌나 인형 등 간단한 물건을 직접 만들어보는 워크숍을 열고, 매장과 프로그램 운영을 함께 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

우리가 너무 쉽게 얻고 쓰고 버리고 또 탐내는 물건들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공정이 어떤 이야깃거리와 사회관계를 낳는지를 살짝 들여다보고 싶다면 에코파티메아리 홈페이지(www.mearry.com)의 공지사항을 주목해보는 것도 좋겠다.

에코파티메아리 김효진 디자인팀장 인터뷰
환경에 대한 진심을 가지세요


에코파티메아리 디자인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각각의 상품에 소재의 히스토리가 담겨 있습니다. 에코파티메아리의 디자인은 형태를 독특하게 만들기보다 소재에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것입니다."

가장 호응이 높았던 디자인은 무엇입니까.
"소재를 재활용하는 데 대한 소비자들의 이해도가 아직은 그렇게 높지 않습니다만, 질 좋은 가죽으로 만든 카드케이스나 타폴린 백팩은 꾸준히 팔리는 편입니다. 유용하다는 점에서 마음을 얻은 것 같습니다."

반면 기대만큼 소통을 이끌어내지 못한 디자인은 무엇입니까.
"현수막을 이용해 만든 가방들입니다. 이들 제품은 현수막의 원래 색과 타이포에 따라 각양각색입니다. 그래서 디자인의 질이 일관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현수막의 특성상 한글 타이포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국내 시장에서는 이런 디자인이 호응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한 요인이었습니다."

최근 한국사회의 디자인 경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친환경디자인이 화두 중 하나로 떠오르면서 소재부터 사용 이후까지의 과정 전체가 디자인의 주제가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디자인 원칙이 있습니까.
"환경에 대한 진심을 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작업을 하다 보면 더 멋진 생각을 담아 더 멋진 디자인을 완성하고 싶은 욕심이 끝없이 납니다. 하지만 제 욕심만으로 작업을 하기에는 지구가 이미 너무 많이 망가져 있습니다. 환경에 대해 한번 더 염려하고 고민하려고 합니다. 이런 마음을 현실화하기 위해 한 디자인대학원에서 그린디자인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환경을 위한 활동을 해보고, 불편한 점을 디자인으로 해결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재활용소재를 다룬 경험이 디자인 작업과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재활용소재를 다루면서 하나의 옷, 하나의 가방 등 기성품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졌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재킷을 수십 개의 조각으로 해체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손길이 닿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삶을 둘러싼 사람들,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분야의 특성상 보여주는 작업에 치우치기 쉬운데, 이런 경험이 작업에 진지하게 임하도록 만드는 것 같습니다."



Step 5. 디자인 생활과 친해지기

지난 여름 서울 이태원 도깨비시장길에 돌연 나타난 킷토스트는 단연 디자인 생활의 흥미로운 사례로 꼽을 만하다. 5명의 미대 졸업생 혹은 휴학생으로 구성된 이들은 가구, 가방, 의류, 조명, 문구, 출판물 등 "대량생산만 빼놓고는 모두" 만들어내는 전방위적 집단이다.

스스로는 "딱히 디자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바깥에는 디자인 그룹이라고 입소문이 좀 났다. 테이크아웃드로잉 한남, 더북소사이어티, 문지문화원 등에 독특한 책장 모듈을 설치했고 지난달에는 문래예술공장 옥상에서 열린 한 인디밴드의 공연 무대를 담당하기도 했다.

토스트 가게를 개조해 마련한 근거지이자 매장은 그들의 디자인 자산이 생활임을 생생히 증언한다. 줍거나 얻은 재료로 만든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걸기엔 너무 컸던 시계"는 테이블로 개조되었고 동네 어린이에게 버림받은 레고 블록은 미러볼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다채로운 불빛을 내뿜는 조명이 되어 있다. 포대자루 가방, 주판으로 뚜껑을 만든 나무 필통, 당구대를 잘라 만든 테이블 등등 모든 물건 속에 반전과 유머, 재기가 있다.

"디자인을 전공하거나 따로 배운 사람은 없어요. 오히려 아르바이트 경험이 더 도움이 됐죠. 예를 들면 저는 주문생산도 하고 DIY 강의도 하는 목공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때 배운 것을 활용해 가구를 만들어요. 다들 경험이 풍부해요.(웃음)"

멤버 중 한 명인 박길종은 "집에서 필요한 것을 직접 만들다 보니 이렇게 팔기까지 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디자인의 영감 역시 일상에서 얻는다.

"오래된 동네 골목을 다니다 보면 신기한 평상들이 많아요. 다리마다 덧댄 흔적이 남아 특이한 형태가 된 평상도 있고요. 기성품에서는 나올 수 없는 구조죠. 이런 물건들이 저희 작업에 힌트를 주는 것 같아요."

이런 것이 바로 디자인 생활이다. 킷토스트는 당신 역시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옛날 사람들도 필요한 걸 직접 만들어 쓰지 않았냐고.

물론 모두가 전문적인 디자이너가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디자인이 원래 이렇게 인생 경험으로부터, 일상생활로부터, 자신의 필요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아는 순간 삶을 스스로 디자인해보겠다는 우리의 용기와 의지, 자신감도 강해지지 않을까.

무엇이 좋은지, 삶에 어떤 가치를 담고 싶은지, 누구와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는지, 내 삶이 사회와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까지 한번 더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디자인이라고 강요되는 비싸고 강압적인 것들, 그것이 부추기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의 환경을 돌보기 위해 어떤 디자인을 지지하고 어떤 디자인은 반대해야 하는지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마침, 킷토스트도 이달부터 일요일마다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일들을 벌일 예정이라니 이들의 디자인 생활이 궁금하다면 들러보는 것도 좋겠다. 친해지면 노하우를 귀띔해줄지도 모른다. 찾아가는 길은 킷토스트 홈페이지(www.kit-toast.com)에 친절히 안내되어 있다.

  • 페이스북
  • 트위터
  • 구글플러스
  • 카카오
배너
2019년 11월 제2802호
  • 이전 보기 배경
    • 2019년 11월 제2802호
    • 2019년 11월 제2801호
    • 2019년 10월 제2800호
    • 2019년 10월 제2799호
    • 2019년 10월 제2798호
    • 2019년 10월 제2797호
    • 2019년 09월 제2796호
    • 2019년 09월 제2795호
    • 2019년 09월 제2794호
    • 2019년 09월 제2793호
  • 이전 보기 배경
저번주 발행호 다음주 발행호
  • 지면보기
  • 구독안내
  • 광고문의
  • * 지면문의
    전화 : 02-6388-8088
    팩스 : 02-2261-3303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 온라인 광고
    전화 : 02-6388-8019
    팩스 : 02-2261-3303
    메일 : adinfo@hankooki.com
    주소 : 서울시 마포구 월드컵북로56길 19 드림타워 10층

많이 본 기사

주간한국 유튜브 채널

서진의 여행 에세이

영주, 산사의 추억 영주, 산사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