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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도시 남자'가 뜬다

일 중독에 빠져 고독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남성 지칭
  • SBS <나쁜남자>의 김남길
# 그냥 우연히 인공지능과 상대하는 대화 프로그램을 사용해 봤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고 신비로운 게 마치 뉴요커가 된 기분이었다. 왠지 멋지다! 나는 과묵하고 차갑지만 하이 테크놀로지와 공감하는 시크한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아직까지 면허조차 없는 이유를 말하라면 지구의 중력 때문이다. 하루 잠자는 시간이 12시간, 일 년 중 300일 정도 집에서 지내지만 귀찮아서 면허를 아직 안 딴 건 아냐. 바빠서 그렇지. 나는 바쁜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우선 프리랜서의 캐주얼하고 스마트한 고뇌가 엿보이는 책상의 배치. 'ㄱ'자로 놓인 책상은 지식인님조차 되려 나에게 '윤아 미니홈피 주소 좀 알려 주삼'이라고 물어 볼 것만 같은 스마트 가이의 상징적인 지적 배치. 난 워커홀릭의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그리고 마치 바쁜 뉴요커의 삶에 찌들어 아침은 스타벅스 커피로 바삐 때우고, 퇴근 후 블루 블랙의 조명이 은은한 유러피언 타입의 레스토랑에 앉아 고등어조림을 고독하게 시켜먹을 것 같은 남자의 개인 책꽂이. '타미와 함께 하는 ABC 첫걸음'을 앞이 보이게 배치하는 건 세계로 나갈 용기를 갖춘 진취적인 남자란 뜻이지.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침대 위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고대문자가 가득한 각종 문서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널브러져 있는 고가의 노트북. 그리고 침대 한 편의 알 수 없는 여인의 찢어진 사진은 사랑의 아픔을 지닌 고독하지만 왠지 어머니께 만수무강하시라는 문안전화를 할 것 같은 도시 효자남자의 이미지.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의류브랜드 PAT의 아우터
만화가 조석은 2008년 웹툰 만화 <마음의 소리>에서 '차도남'이라는 단어를 구슬프게 읊조린다. 그는 한심하리만치 집구석에 틀어박힌 남자(자신을 빗대어)의 자기 변명적 남성성을 드러내며 중얼거린다.

"나는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지저분한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는 남자의 모습을 '워커홀릭'이라고 합리화하고,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내 여자'를 들먹이며 가슴이 따뜻한 척한다. 만화 속 남자는 자신의 방에 갇힌 채 자아도취에 빠져 살아가는 남자의 표상이다.

이 '차가운 도시의 남자'는 2년이 지난 지금 또 다른 의미로 진화했다. 바늘로 살을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차가운 면모에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도시적 미적 감각을 지닌, 완벽주의자 같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할 것 같은 온정이 있는 사람. 여성들의 감성이 바라는 이상형으로 바라본 '차가운 도시 남자'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이지만 긍정적인 의미의 남성을 설명하고 있다.

'차가운 도시 남자'를 줄여 '차도남'이라고 하고, 여성들에게까지 그 의미는 확대돼 '차도녀'로도 발전했다. 최근에는 남을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긴다는 의미의 '업신여김'이라는 의미까지 부상해 역시 줄임말인 '업신'이 화제의 키워드로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이 단어들은 인터넷을 기반으로 형성된 화제의 키워드다. 인터넷 가상공간에선 텍스트에서 이미지로의 전환이 대중화되면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는 패러디 문화가 발전했고, 블로그나 미니홈피 등 1인 미디어가 이 어휘들을 전달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주제나 이미지를 가진 단어들은 급속도로 퍼져나가 유행이 되고 결국에는 표준화되기도 한다.

  • 의류브랜드 올젠 니트웨어
'차도남', '차도녀', '업신' 등도 차가우면서도 도도한 현대인을 지칭하면서 그 속에는 비꼬는 의미가 서려있는 신조어로 등극했다.

메트로섹슈얼에서 '차도남'까지

도시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이처럼 많았던 적도 없었다. 2000년대 들어서 젠더를 구분 짓는 신조어들이 등장하면서 그 의미는 더 간결해지고 직설적이 됐다.

남성을 지칭하는 단어들을 살펴보자. 1990년대 마크 심슨은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이라는 이름으로 남자를 칭했다. 그는 메트로섹슈얼을 두고 도시에서 일하거나 살면서 높은 소비력을 지닌 미혼 남성을 일컬었는데, 예민한 예술적 감수성을 가지고 자신의 외모와 스타일을 꾸미는 데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이 단어는 2000년대 들어서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처럼 손톱에 매니큐어를 칠하는 남성이나 화장하는 남자 등 게이라는 오해를 받는 이성애자들을 통칭했다.

  • KBS <매리는 외박중>의 김재욱
메트로섹슈얼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허물어지며 그 성격이 모호해지는 성향을 보여준다. <대한민국 컬처코드>의 저자 주창윤 교수는 "나르시시즘으로서의 자기애가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확장되었다"고 표현했다.

이후 등장한 남성상은 메트로섹슈얼의 여성성이 아니라 마초적 남성성을 강조한 '위버섹슈얼(uebersexual)'이다. 독일어에서 온 위버섹슈얼은 최고의 남성이라는 뜻으로 자신감, 정열, 리더십 등 강인한 남성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꽃미남'의 메트로섹슈얼보다 남성적인 면이 부각된 위버섹슈얼은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자신감으로 가득한 남성적 매력을 과시한다.

외모나 패션 등에 대한 관심보다는 태도나 행동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러셀 크로 같은 근육질 몸매의 마초적 성향의 남성이 위버섹슈얼이다.

사회적 현상이 반영된 남성상도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건너온 '초식남'이 대표적이다. 초식남은 일본의 여성 칼럼니스트 후카사와 마키가 사용한 단어로, 초식동물처럼 온순하면서 착한 남자를 일컫는다. 이들의 성향은 20대 젊은 남성층에서 주로 생겨났으며, 자신의 가치를 더욱 중시하는 성향을 보인다.

초식남은 메트로섹슈얼이나 위버섹슈얼에 비해 남성성을 중시하진 않는다. 여성스러운 취미와 감수성, 꼼꼼하고 섬세한 성격으로 부드러운 남자들이다.

  • 손석희 교수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외출하기보다는 집에 있는 것을 즐긴다. 즉 사회적인 관계보다는 내면적인 자기애에 관심이 깊은 특징이 있다. 자신의 가치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연애보다는 독신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 "카페모카로 주시는데요, 코코아 파우더 많이 넣지 마시고요, 휘핑크림은 빼주세요"라고 당당하게 커피 주문을 하는 남자라면 초식남일 가능성이 크다.

"손석희 교수는 역시 차도남" MBC 배현진 아나운서는 지난달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10주년 공개방송의 애청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

배 아나운서가 방송 중 일본의 '시마네현'을 '시네마현'이라고 말한 실수를 그 자리에서 지적받았기 때문이다. 손석희 교수처럼 전문직에 종사하며 차분한 어조와 냉철함으로 쉽게 다가가기 힘든 남성이 차도남이다. 세련된 멋과 시크한 말투가 특징이지만 얼핏 보이는 내면의 따뜻한 온정도 숨어있다.

지난해 열풍이었던 '나쁜 남자'보다 사람(여자)에 대한 정이 있으며, '된장남'보다 소비면에서 절제가 있다.

이렇듯 도시의 고독한 남성을 대변하는 차도남은 인터넷 상에서 여성을 지칭하는 '00녀'보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 신조어다. 주창윤 교수는 이런 현상을 "인터넷 공간의 젠터 정치학"이라고 규정하며 인터넷 공간은 현실과 단절된 공간이라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권력구조가 그대로 반영된 곳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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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개똥녀', '된장녀', '루저녀', '복어녀' 등은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여성들을 통칭한다. 인터넷 공간은 젠더 문제에 있어서 대단히 차별적인 공간이라는 논리를 낳게 한다. 남성을 지칭할 때는 비판이나 비난의 대상이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을 담는 신조어들이 많다는 것이다.

차도남도 워커홀릭에 빠져 고독하지만 스스로에게 열정적인 남성, 내 여자를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남성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패션으로 본 '차도남' 스타일

지금 출근길 지하철에는 차도남들이 넘쳐난다. 잔잔한 광택이 도는 매끈한 수트를 입고 명품 브랜드의 서류가방을 든 남자, 멋스러운 스키니 진에 따뜻하게 몸을 감싸게 늘어뜨린 니트웨어를 입고 서있는 남자. 이들은 어쩌면 도시의 차가운 일면과 함께 휴머니티를 보여주는 차도남일지도 모른다.

차도남은 패션계를 강타하며 적재적소에 마케팅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차도남 패션스타일', '차도남 헤어스타일', '차도남 스킨케어', '차도남 유혹하기' 등 남녀 모두에게 어필하는 마케팅 효과를 가진다.

2000년대 초 메트로섹슈얼이라는 말이 탄생했을 때와 비슷한 현상이다. 당시 패션 매거진에서 빠르게 흡수한 이 용어는 패션, 화장품 등 각 산업에서 수용했다.

특히 패션 시장은 메트로섹슈얼이라는 새로운 소비 계층을 만들어내며 다양한 마케팅으로 남성들의 소비심리를 건드렸다. '치장하는 남자'인 메트로섹슈얼은 현재까지도 패션 시장에서 어필하며 광고에서도 적절하게 쓰이는 마케팅 용어이기도 하다.

위버섹슈얼은 자연스러운 남성성을 드러내면서 역시 소비 시장의 새로운 계층으로 떠올랐다. 메트로섹슈얼처럼 패션 감각을 내세우며 쇼핑을 즐기지는 않지만,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멋을 향유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팔뚝이나 복근 등 은근히 몸매가 드러나는 흰 셔츠에 운동으로 다져진 업 된 히프 형태를 보여주는 청바지는 위버섹슈얼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다. 배용준, 비, 김종국 등 멋진 근육질 몸매를 지닌 스타들은 위버섹슈얼이라는 명칭과 함께 남성성을 강조하며 부각됐다.

차도남은 도시적인 세련된 감각과 시크한 매력이 돋보이는 패션을 즐긴다. 트렌치 코트나 수트, 야상 점퍼 등은 차가운 도시 남자를 연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꽃보다 남자>의 이민호, <나쁜 남자>의 김남길, <매리는 외박 중>의 김재욱 등은 매끈한 수트에 차분한 헤어스타일과 눈빛으로 일관한다. 이들은 더할 나위 없이 시크한 의상에 차가운 말투로 지적인 인상을 풍긴다.

한 패션 마케팅업계 관계자는 "가을/겨울 패션 아이템으로 클래식 무드가 접목된 스타일이 유행을 타고 있다. 최근에는 차도남 열풍이 일면서 이에 맞춰 부드러운 컬러의 니트웨어 제품이 트렌드다"고 설명했다.

당신도 차도남이 될 수 있다. 니트웨어 하나만으로 도시 속 차가운 남자에서 가슴 따뜻한 남자로 말이다. 트렌디한 가을 아우터에 니트 소재의 이너를 선택한다면 건강한 남성상과 함께 멋스러운 스타일까지 챙길 수 있다.

또한 수트로 시크한 멋을 내기 위해서는 니트 카디건이나 베스트로 댄디한 스타일을 추천한다. 블루나 화이트 셔츠와 함께 클래식한 이미지를 연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캐주얼하면서도 단정한 스타일이 가능하다.

시크하지만 부드러운 감성을 표현하고 싶은 20~30대 젊은 남성들의 스타일링은 차도남 시대를 활짝 열었다. 일과 사랑에 중독된 남자, 차갑지만 내 여자에겐 온정을 다하는 남자. 차도남은 어쩌면 현대 여성들이 열망하는 이상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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