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 윤석남 작가바리데기 설화 일하는 여성으로 재해석한 '블루룸'선보여

<워킹 맘마미아> 전시가 열리는 여성사전시관 내 부채꼴 모양의 모퉁이. 마땅히 버려질 장소였던 그곳이 온통 푸른 빛으로 가득 찼다.

옅은 초록의 한복을 입은 여인은 짐짓 평화로운 얼굴로 무쇠 갈고리 다리가 박힌 의자에 앉아 있다. 한 장 한 장 가위로 오려냈을 열두 개 문양의 종이 수백 장이 벽면을 채우고 파란색의 구슬은 바다처럼 넘실댄다.

<블루룸>이란 제목의 작품은 한눈에 봐도 윤석남(71) 작가의 손끝에서 빚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대모이자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쉼 없이 진화하는 현역 작가.

일하는 여성을 신화 바리데기에서 발견해 표현한 작품이다. 종종 바리데기 설화는 지극한 효심의 상징적 표현으로 등장하지만 윤석남 작가는 일하는 여성으로 재해석했다.

오귀대왕인 아버지에게 딸이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바리데기는 죽은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약수를 구한다. 무장신선을 만나 약수 값으로 나무하기, 물긷기, 불때기를 9년 동안 해주고 무장신선과 혼인해 아들 일곱을 낳은 뒤 약수를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를 살려냈다.

핑크의자 (Pink Chair)
아버지는 자신의 왕국 절반을 바리에게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하고 저승의 신이 된다. 윤 작가는 <블루룸>을 위해 바리공주 신화와 관련한 두툼한 서적을 세 권이나 읽었다.

"결국 바리는 혼을 관장하고 위로하고 저승길로 인도하는 신이 된 거죠. 이본이 300개나 되지만 전 이걸 받아들였어요. 바리공주의 지난한 삶을 보면 지금의 여성들이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림하고 직장생활도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런데 바리가 아버지의 나라를 왜 거부했을까? 아버지가 세운 나라는 아버지의 나라로 끝나기 때문이죠. 내가 해석하기엔 그래요. 자신이 새로운 걸 더해낼 수도 빼낼 수도 없는 불안한 아버지의 나라인 거죠. 구슬, 의자의 쇠고리엔 아무도 서 있을 수가 없잖습니까. 가부장제 사회인 우리의 현실과 다르지 않은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아름답게 치장하고 싶었어요."

<블루룸>은 그녀의 전작이자 자전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핑크룸>의 연작이라고 볼 수 있다. 결혼 8년 차, 서른여섯의 나이. 진지하게 자신의 길을 물어볼 새도 없이 호구지책으로 회사에 다니고는 결혼 후 온전히 살림만 하던 그녀의 삶에 파문이 일었다.

자신의 공간이라고는 주방과 거실밖에 없었던 그녀에게 자신의 삶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쇠갈고리 다리를 낀 의자에 앉은 것처럼 불안했고 <핑크룸>과 <핑크 의자>에서처럼 의자 쿠션을 뚫고 욕망이 뿔처럼 돋아났다. 그럼에도 여성은 그 위에 별다른 표정 없이 짐짓 안정을 가장한 채 앉아 있다.

4년간 서예로 붓과 마음을 다스리던 윤 작가는 마흔 줄에 본격적으로 어머니를 캔버스에 담기 시작했다.

'블루룸'
서른아홉 살에 홀로 되신 어머니는 쪼들리는 가난 속에서 6남매를 키워냈다. 자식들 앞에서 가난을 내색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강인하고 긍정적인 분이었다. 1982년, 윤 작가가 첫 개인전으로 어머니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가 왜 어머니를 그리지? 그런데 어머니를 그릴 때 왜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슬프지? 어머니는 내게 어떤 존재지? 이런 궁금증이 생겨나더군요. 어머니를 그리면서 삶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우리나라 근대사 속의 여성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됐어요. 여성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소위 여공들이죠. 어머니를 그리면서 그들까지 생각하게 됐어요."

이후 10년 이상 작가가 몰두한 주제가 바로 어머니였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개인전은 호평을 받았고 이후 두 차례 미국으로 미술공부를 위해 떠난다.

뉴욕에 머물면서 프랫인스티튜트의 그래픽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특히, 아트 스튜던트 리그는 평생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으로 리 크래스너, 에바 헤세 등 유명 여성미술가들이 거쳐 간 곳이다.

두 번째 미국을 방문했을 당시 작가는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 '마망'을 만난다. 그것은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확신과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그전까지 여성주의 미술의 방법에 대해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어요. 페인팅해야 할까, 매체가 너무 강하면 안 되지 않나. 그런데 '마망'을 보는 순간 짜릿했어요. 페미니즘 미술은 매체가 아니라 정신에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뉴욕시에서 쓰다 버린 거대한 맨홀 뚜껑 두 개가 거미의 몸통이 되었고, 버려진 수도 파이프는 기다란 다리가 되었다. 거미의 발은 거대한 서양의 낫이라니. 예측할 수 없는 매체의 사용은 그녀에게 작가로서의 전기를 마련해줬다. 이후 그녀의 작업은 거칠 것이 없었다.

미국에서 돌아와 금호미술관에서 연 두 번째 개인전 <어머니의 눈>(1993)에서 그녀는 모성을 재해석하고 여성들의 주체적인 시각을 획득하고자 했다. 1996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에 설치된 <어머니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역사 속의 여인들과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익명의 여성들을 작업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던 개인적 시간은 <핑크룸>, <블루룸> 등으로 담겼고 이름 없이 살다간 여성 선조들은 999개의 목상으로 남았다.

2000년대 들어 제작한 작품을 통해 그녀는 대립과 충돌의 역사를 넘어 평화적 공존과 소통의 회복을 촉구한다. '늘어나다' '역사 속 여성들과의 조우'라는 테마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 여성들의 감성적 접촉을 유도하고 있으며, 유기견 1025마리를 5년간 조각한 <1,025: 사람과 사람 없이>전을 통해 치유와 돌봄을 미학을 보여준다.

여전히 하고 싶은 작업이 많은 칠순의 작가는 '작가란 호기심 덩어리'라고 규정한다. 그 호기심 덕에 작업하는 시간 외엔 책, 영화, 공부를 쉬는 법이 없다. 21세기의 페미니즘이 20세기의 페미니즘에서 진화하듯, 그녀의 작품 역시 시대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