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미술의 경계 넓히고 우리 삶을 실시간 사건으로 번역

<2010 ATU>의 오프닝 퍼포먼스인 작가 웁쓰양의 '영화관 그림장수 압수수색사건'
#1 11월30일 밤 9시 무렵 서울 이태원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분홍색 풍선을 든 여자의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거리를 가로질렀다. 어리둥절해한 것은 목격자만이 아니었다. 무리 속에서도 "어디로 가는 거예요?", "왜 이렇게 빨리 가요? 고등학교 다닐 때 벌 받았던 것 같네"하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이들이 거리로 나선 까닭은 무엇일까?

#2 "여기서 장사 하시면 안 됩니다."
"먹고 살려고 나왔는데 좀 봐주세요."
"자꾸 이러시면 물대포, 음향대포 동원하겠습니다."
경찰과 노점상 사이 실랑이가 벌어진 이곳은 거리가 아닌 한 영화상영관 출구다. 영화를 보고 나오던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린다. 알고 보니 노점상은 자신의 그림을 팔러 나온 화가다.

물대포라며 분무기를 꺼내고, 음향대포라며 라디오를 들이대는 경찰은 단호한 태도와는 달리 어설프기 짝이 없다. 심지어 나중에는 화해 분위기로 전환된다. 옆에 앉아 있던 거리의 악사가 명랑한 노래를 불러준다. 사람들은 안심하고 갈 길을 간다.

첫 번째 광경은 김지선 작가의 '해밀톤'이라는 퍼포먼스다. 서울 이태원에 위치한 임시 미술전시장 '공간해밀톤'의 1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작별을 고하는 프로젝트 <19금 퍼포먼스 릴레이>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태원이 관광 지역이며, 해밀톤이라는 이름을 가진 관광 호텔이 있다는 점에 착안해 공간해밀톤의 관객들을 해밀톤호텔까지 가이드 투어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물론 관객 스스로 관광객 역할을 맡는다는 설정은 미리 고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문도 모르고 분홍색 풍선을 따라 나선 사람들은 해밀톤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이 이상한 상황의 정체를 궁금해 해야 했다.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홍성민 작가의 '줄리엣'
두 번째 광경은 작가 웁쓰양의 퍼포먼스 '영화관 그림장수 압수 수색 사건'. 서울 홍대 앞 KT&G 상상마당에서 12월1일부터 열리는 통섭예술프로젝트 <2010 ATU>의 오프닝 퍼포먼스로 마련된 이 사건에는 오늘날 미술작가들이 처한 현실과 미술의 자리에 대한 질문이 있다.

작가 웁쓰양은 2009년 실제 재래시장에서 그림을 파는 퍼포먼스 '거리그림場-고등어를 사려다 그림을 사다'를 벌인 적이 있다.

처음에는 그림 한 장당 2만 원을 받으려다 비싸다는 주변 반응에 1만 원으로 가격을 내렸던 당시 경험을 통해 그는 "미술과 대중 사이에 벽을 없애려면 사람들 눈높이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이번 퍼포먼스도 그런 취지로 구상했다.

단 두 개의 퍼포먼스를 예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감이 오지 않는가. 퍼포먼스의 세계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흥미진진하게 펼쳐져 있는지. 오늘날 미술의 경계를 넓히고 우리의 삶을 실시간 사건으로 번역해내는 퍼포먼스의 현장으로 초대한다.

예술 장르가 만나 벌어진 퍼포먼스

샐러드의 <샐쇼1, 2>
퍼포먼스가 활발한 첫 번째 현장은 매체, 장르 간 융합이 일어나는 다원예술의 장이다. 다양한 예술적 범주들이 만나고 넘나드는 순간 자체가 퍼포먼스다.

영상 작업이 상영되는 무대에서 무용 공연이 벌어지고, 설치 작업 가운데에서 전자음악과 시낭송이 들려오기도 한다. 이런 퍼포먼스를 즐기려면 오감을 다 열고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순간 주어진 시각적, 청각적, 촉각적 단서들을 하나로 엮어 경험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접점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봄>은 이런 최신의 퍼포먼스 경향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다. 올 봄에 진행된 제4회 <페스티벌 봄>에서도 주목할 만한 퍼포먼스들이 선보였다. 홍성민 작가는 5명의 '줄리엣'들을 무대에 세웠다.

5명의 연극배우를 5명의 연출가에게 보내어 각각 줄리엣 역할을 연습하도록 한 후, 한 무대에서 동시에 연기하도록 한 것. 배우들이 로미오도 없는 무대에서 자신만의 줄리엣을 표현하는 동안, 관객에게는 그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분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과제가 주어졌다.

<페스티벌 봄>에서 공연된 정연두 작가의 '시네매지션'
평론 활동까지 퍼포먼스가 됐다. '조용한 글쓰기'의 관객들은 이영준 평론가가 글 쓰는 광경과 대면했다. 글의 내용만큼이나 글 쓰는 버릇, 컴퓨터 모니터에서 커서가 깜박이는 속도, 제스처와 분위기까지 중요한 무대 요소였다.

관객들은 평론가가 머뭇거리거나 저질러 버리는 문장에서 그의 망설임이나 확신까지 읽을 수 있다. 썼다 지우거나 되돌아가는 제스처에 개입하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윤리일까, 미학일까, 정치일까. 그래서 도대체 평론이란 무엇일까. 평론가의 책상은 어느새 관객들의 질문으로 어질러졌다.

다양한 미디어 기술과 결합한 퍼포먼스는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술에 점령당한 일상을 재현하기도 한다. 퍼포먼스 작가와 기술 사이 조화와 갈등은 우리가 스마트폰에 대해 겪는 일의 확장판일지도 모른다.

올해 초 미디어아티스트 강은수는 입은 사람의 움직임을 전시장의 영상과 음향과 연결시키는 재킷을 선보였다. 재킷을 입은 무용수의 무용이 공간의 빛과 소리로 번역되는 퍼포먼스는 디지털 기술과의 '접속'을 통해 타인과 대화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기도 했다.

퍼포먼스, 삶의 현장으로 가다

슬로러시에서 진행된 유병서 작가의 '그랜드 투어'
작년 10월부터 12월까지 세 달 동안 이주호 작가는 철거 중이던 왕십리 뉴타운 재개발 지역에 머물렀다. 사람들이 떠났지만 삶의 흔적이 남은 공간들이 작가의 발목을 잡았다.

그 와중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아주머니 한 명이 살고 있었다. 작가는 떠난 사람들이 어디로 갔을지 의문이 들었다.

어느 날 목격한 철거 장면, 포클레인이 "사마귀 같은 기세로 집들을 장난감 부수듯 무너뜨리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작가는 빈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바쳐 선을 긋고 색을 칠했다. 그럼으로써 곧 신기루처럼 사라질 이 지역을 기억하려고 했다. 일종의 제의였던 셈이다.

자본의 이해에 의해 급격히 바뀌는 삶의 환경, 일상의 역사가 단절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밀려나고 한 사람의 인생의 기억이 조각나는 현장에도 퍼포먼스가 있다. 많은 작가들은 이런 정치사회적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몸으로,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재개발 지역의 공황 상태를 퍼포먼스로 표현하고 기록한 임민욱 작가의 'New Town Ghost', 'Portable Keeper' 등의 영상 작업, 철거 중인 옥인아파트를 미술 전시장으로 바꿔 놓은 작가 그룹 옥인콜렉티브의 퍼포먼스 등이 그 예다.

이주호 작가의 '2009년 왕십리'
어떤 퍼포먼스는 이런 상황을 직시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 대처하는 전략으로써 기획되기도 한다. 상상력을 동원해 현장의 의미를 바꾸는 시도들이다.

미술 연구와 실천을 위한 프로젝트 그룹 슬로러시는 인천 송도국제신도시의 한 상가 건물에 임시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역사성과 장소성이 거세된, 한국적 자본주의 욕망이 담긴 하나의 알레고리로서의 송도신도시"를 활용하는 프로젝트들을 기획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송도국제신도시의 <유령 The Invisible> 같은 상태를 여러 각도에서 탐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정은영 작가는 공사장의 '함바 식당'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였다 흩어지는 상황을 포착했고, 유병서 작가는 홍대 앞 재개발 지역과 성남 모란시장, 송도국제신도시를 잇는 길을 통해 한국사회의 다양한 역사성과 장소성을 비교 체험할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군사지리적 관점, 풍수지리적 관점으로 이 도시를 해석한 작업들도 있었다. 지난 12월5일에는 국제업무지구역, 세계도시축전, 잭니콜라스골프장, 인천대학교캠퍼스 등 송도국제신도시 곳곳을 둘러보는 '어반 피크닉'이 진행됐다.

하우스 프로젝트
이 모든 일들이 송도신도시를 예술적으로 다시 경험해보는 퍼포먼스다. 슬로러시의 채은영 큐레이터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실천적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거대한 외부의 힘에 의해 주어진 환경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상상력과 개성을 발휘하며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 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환경을 바꾸고 관계를 주선하는 퍼포먼스

퍼포먼스의 일시성은 이주가 보편화된 현대사회의 상황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난 10월 한국의 텔레비전12갤러리와 일본의 얼터너티브스페이스플랫은 이주의 경험 자체를 퍼포먼스로 만든 <>를 벌였다.

오래된 집을 개조했다는 공통점을 가진 두 갤러리에 각각 일본 작가 아키히토 오쿠나카와 한국 작가 이단이 4주 동안 거주하며 '미션'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이 낯선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은 문화가 무엇인지, 삶과 문화가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작가들에게 주어진 미션 중 하나는 거주국의 미신과 속담, 관용어 등을 실행하는 것인데 낫 놓고 기역자를 모르고, 시험 날 아침에 미역국을 먹고, 종로에서 뺨 맞은 후 한강에서 눈을 흘기는 일본 작가의 퍼포먼스는 '자연스러웠던' 한국사회의 풍습을 낯설게 만든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작가들의 '시장에서 생긴 일' 퍼포먼스
작가들은 또한 갤러리의 이전 모습인 집을 재현해 낸다. 이를 위해 주변 사람들을 탐문하고, 삶의 흔적을 찾고, 상상하고 설치한다. 이 모든 행동은 퍼포먼스인 동시에 4주간의 생활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보는 것 역시 특정한 결과물 이전에 그 동안 작가들의 감정과 고군분투, 각자의 몸에 새겨진 관습과 편견을 주위 변화에 적용시키거나 바꾸어 나가는 경험이다.

결국 전시장 바깥으로 나온 퍼포먼스가 주는 가장 큰 교훈은 그 관계 맺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퍼포먼스는 기본적으로 주변과 연결되고 관객을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예술 형식이다.

공공미술 영역에서 퍼포먼스는 지역사회와의 소통의 매개가 되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들은 지난 11월26일 근처 시장에서 퍼포먼스를 벌였다. 사고 팔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장의 일상적 행위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안산시 원곡동 '국경 없는 마을'에 위치한 대안적 미술 공간 커뮤니티스페이스리트머스 역시 이 지역의 이주자들과 함께 하는 퍼포먼스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1월28일 서울 문래동의 한 철공소에서는 이주민들이 출연한 공연이 열렸다. 다문화 창작집단인 샐러드가 마련한 <샐쇼 1.2>였다. 공장을 배경으로 이주와 노동이라는 주제를 풀어낸 이 공연은 샐러드 소속 작가와 이주민들이 공동으로 창작한 것. 삭막한 공장 지역도, 소외되었던 이주민들도 이 순간만큼은 주인공이 되었다.

<19금 퍼포먼스 릴레이> 중 목정량 작가의 '채팅'
문화란 이렇게 사람의 의지로 환경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행동이라는 것을 퍼포먼스는 가르쳐 준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