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마음, 하나의 생명체" - 삐그덕거리는 아이돌 왕국

올해 초 한 연예기획사 사무실에서는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무조건적 사랑으로 뭉친 아이돌 그룹과 팬들이 최초로 정면 충돌한 것이다. 지난해 한국 비하 파문으로 쫓겨나다시피 한 그룹 2pm의 박재범 군의 영구탈퇴가 결정되면서 기획사가 팬들과 그룹 멤버들의 대면 기회를 마련한 것이 실수였다.

성난 팬들은 "같이 고생한 멤버를 성공했다고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느냐"고 거세게 항의했다. 멤버들은 상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생방송 중에 재범이 돌아오라고 깽판이라도 쳐야 하냐" , "그는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심각한 사생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말로 맞대응했다. 그 중 한 팬의 '재범 군을 용서해줄 수는 없느냐'는 질문에 우영 군의 대답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저희가 탈퇴 결정을 내린 이유는…그렇습니다. 마음과 마음 그게 제일 중요한 거죠. 믿음이라는 게, 세상에는 저희만 살아가는 게 아니잖아요.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국가, 하나의 생물, 생명체… 저희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희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사실 '세상에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탈퇴 문제를)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노기충천한 팬들은 이 선문답을 종교적 음악과 함께 편집해 인터넷에 유포했고 여기저기 패러디되면서 2pm 간담회는 올해 최고의 아이돌 코미디 쇼로 등극했다.

굳건하기만 했던 아이돌 왕국의 허점은 다른 데서도 드러났다. 아시아 전역으로 영향력을 뻗치게 된 동방신기는 노예계약 문제로 뿔뿔이 흩어졌고, 한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가 돌진하는 팬을 풀 스윙으로 내려치는 영상이 공개돼 문제를 일으켰으며, 여기에 얼마 전 사망한 한 인디 뮤지션이 생전에 음원에 대한 수입을 미니홈피 화폐인 도토리로 지급받았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기형적으로 팽창된 아이돌 시장에 대한 구조조정의 전조가 보였다.

"미친 존재감" - 조연 전성시대

'미친 존재감'을 설명하려면 '미친'이라는 단어의 재정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너무, 정말, 대단히'로도 충분하지 못할 때 쓰는 감정의 최고 표현 '미치도록', 여기에서 시작된 '미친'이라는 수식은 미친 미모, 미친 몸매, 미친 가창력 등으로 변주되며 격한 찬양이 필요한 모든 것에 사용됐다.

미친 존재감의 최초 주인공은 일명 티벳 궁녀로 알려진 탤런트 최나경 씨. 드라마 <동이>에서 '미친 열연' 중이던 배우 임성민 씨 옆에서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던 궁녀는, 무시하기엔 너무 어설프고 그렇다고 질책하기에는 너무 재미있었다.

결국 네티즌들의 캡처로 인해 벼락스타가 된 최나경 씨는 화장품 CF 모델에 시트콤 캐스팅, 게다가 얼마 후에 있을 농구 경기에서는 치어 리더로 변신할 예정이다.

'최선을 다하는 일류'는 촌스러운 클리셰(cliché, 진부한 표현)가 되었고 이제 대세는 '대충하는 이류들'이다. 대중이 엑스트라들에게 부여한 '미친 존재감'이라는 정체성은 1등에만 매력을 느끼던 한국 사회가 이제 슬슬 다양한 취향을 갖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제 점수는요" - 슈퍼스타 K, 루저에게 희망을

올해 최고의 프로그램은 국민 MC가 진행하는 버라이어티도 아닌, 톱스타가 등장하는 드라마도 아닌, 케이블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 K>였다.

지금까지는 케이블 시청률의 인기도를 공중파의 그것으로 환산할 때 곱하기 10을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슈퍼스타 K>가 시청률 14%를 돌파하면서 그 법칙은 깨져버렸다.

프리랜서 전향 후 여기저기서 구박받던 김성주 아나운서는 "60초 후에 공개하겠습니다"라는 첫 유행어를 갖게 되었고, 심사위원 엄정화는 나긋나긋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여성스러운(?) 심사평으로 비논리의 아이콘이 되었으며, 출연자들은 '일진설', '게이설', '왕따설' 등에 시달리며 연예인이 되기도 전에 혹독한 유명세를 치렀다.

이 중 최고의 유행어는 단연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공개하기 전 멘트인 "제 점수는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가수 이승철의 음주운전 사고 소식에 "제 알코올 농도는요"라는 제목이 붙을 정도였으니, 이 정도면 대국민 유행어라 할 만하다.

결과적으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허각은 루저 축에도 끼기 힘든 163cm의 키에, 중졸 학력, 편부 슬하의 가정환경, 배관공 경력 등 드라마틱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을 갖추고도 미국 유학파 출신의 훈남 존박을 누르고 인간 승리를 거두었다.

"어차피 우승은 존박이야"라는 이하늘의 확언을 뒤집어 엎고 모든 88만 원 세대 루저들에게 희망을 준 결말은 훈훈했지만, 사회가 그에게 준 점수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이벤트성 동정표인지는 알 수 없다. 허각의 기적은 쭉쭉빵빵 꽃미모 아이돌 판 속에서 2010년을 넘어 내년까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얼리어닭터" - 진짜 서민은 누구인가?

올해 마지막 달의 최대 이슈는 단연 닭이었다. 롯데마트가 5000원짜리 튀김 닭 '통큰 치킨'을 선보이면서 전대미문 닭 스캔들의 서막이 열렸다.

전국 치킨 프랜차이즈들의 항의로 7일 만에 판매가 중단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까지의 높은 치킨 가격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서민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2차 대전은 내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5000원이라는 치킨 가격이 대형 유통사이기에 가능한 것은 확실하다. 롯데마트 측은 방문 예약만 가능하게 함으로써 '치킨을 먹으려면 쇼핑을 하라'는 통큰 치킨의 본래 목적을 확고히 했다.

치킨의 마진을 포기한 그들을 일반 치킨집과 비교하는 것은 불공정하지만, 문제는 프랜차이즈 치킨 회사의 가격이었다. 1만 원에서 1만 2000원 선이었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만 1만 6000원에서 1만 9000원에 이르는 치킨 가격은 일반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소비자들은 "봉황으로 튀겼냐"며 흥분했고 닭 원가를 공개하라고 소리를 높였다. 몇몇 치킨 가게 점주들이 '대형 마트가 이렇게 나온다면 서민들은 무얼 먹고 사냐'며 읍소하자, 대번에 '서민은 통큰 치킨을 먹고 산다'는 대답이 올라오는 등, 닭 싸움은 전국민적 토론거리로 확산됐다.

얼마간 '얼리어닭터'(치킨을 사기 위해 아침 일찍 마트 앞에 줄 서는 사람), '계천절'(통큰 치킨 판매 시작일인 12월 9일), '닭세권'(롯데마트 5분 이내 권역) 등 신나게 패러디물을 양산했던 롯데표 치킨은 7일 천하를 끝으로 운명했고 또 다시 통큰 치킨의 장례식이 온라인 상에서 거하게 치러졌다.

이제 예상 가능한 미래는 첫째, 브랜드 치킨의 가격 상한선이 생겨난다, 둘째, 서민들의 치킨 소비량이 줄어든다, 이도 저도 아니면 다크호스인 홈플러스가 제 3의 사고를 쳐 전 국민의 관심이 그곳으로 이동한다.

"야~이 빵꾸똥꾸야!" - 재미있는 걸 어쩌라고

황정음, 유인나, 윤시윤 등 올해 최고의 스타들을 배출한 김병욱 감독의 <지붕 뚫고 하이킥>은 노년의 로맨스, 삼류대 출신 백수, 의사를 짝사랑하는 식모, 무능한 남편 등 한국 사회의 아픈 구석을 코믹하게 짚어내며 늘 마지막을 "Cause you're my girl~"로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막판의 호러 엔딩으로 팬들을 안티로 바꿔놓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이 시트콤이 2010년 대박 상품임에는 틀림없다.

극 중 복숭아 뺨을 가진 귀여운 주인집 딸 정해리(진지희 분) 양은 버르장머리를 상실한 '미친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는데,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향해 외치는 "야~이, 빵꾸똥꾸야!"는 입에 착착 붙는 어감으로 벨소리로도 만들어지는 등 최고의 유행어가 됐다.

방통심의회는 극중 해리가 어른들에게 버릇없는 언행을 사용하는 행위는 다른 아동들의 가치관 형성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빵꾸똥꾸라는 단어에 대해 권고 조치를 내렸는데 이 소식을 전하던 YTN의 앵커가 초인적인 힘으로 웃음을 참다가 거의 울면서 뉴스를 진행하는 바람에 또 하나의 화제 동영상이 탄생했다.

웃음을 규제하려다가 더 큰 웃음을 만들어낸 방통심의회에 감사의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빵꾸똥꾸가 끼칠 수 있는 해악은 오직 하나, 탤런트 진지희 양이 예민한 사춘기 소녀로 성장했을 때 그 이름 앞에 여전히 빵꾸똥꾸가 따라 붙을 가능성뿐이다.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 곤란하면 천호식품에게

"산수유, 남자한테 참 좋은데, 남자한테 정말 좋은데…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직접 말하기도 그렇고."

천호식품 산수유 광고에 쓰인 카피는 톱스타나 영상미 하나 없이 올해 최고의 CF를 만들어냈다. 이 멘트의 탄생 배경은 건강식품 광고에 성분 표시를 금지하는 법을 안타까워한 김영식 회장의 탄식이었다고 하지만, 산수유의 특성상 상당히 에로틱하게 들린다는 점에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대박 광고를 탄생시켰다.

이후로 말하기 곤란한 모든 예민한 문제들에는 이 멘트가 도용되었다. "담뱃세 인상, 참 하고 싶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박근혜, 갈등봉합에는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심지어 "천호식품 광고 참 싫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까지. 결과적으로 법원에 의해 허위 과대광고가 아니라는 판결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은 격.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 한도 넘은 마녀 사냥

2010년은 타블로라는 개인에게는 악몽과 같은 해다. 타블로의 스탠포드 석사학위에 대한 의구심으로 시작된 온라인 사이트 '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타진요)'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의 학력을 포함한 그의 노래, 그의 인격, 그의 가족, 그의 인생 전체를 의심하며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괴롭혔다.

동문들과 교내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줘도 '합성이다', 성적 증명서를 보여줘도 '위조다', 지도교수가 직접 나서자 '매수했다'로 일관하는 그들에게 타블로의 학력은 천호식품 사장 말처럼 "정말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는" 문제였다.

결국 경찰이 나서서 그의 성적증명서를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센터에 감정의뢰하는 블록버스터 급 확인 작업이 끝나고 나서야 사건은 종료되었다. 이번 일에서 가장 끔찍한 사실은 사람들이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타블로를 놓아주었다기보다는 하도 오래 물고 늘어졌더니 싫증나서 하나둘 관심을 돌렸다는 것이다.

결국 눈물까지 쏟아낸 그에게 겨우 주어진 것은 '타블로 씨, 힘내세요.' 한 마디뿐. 남 잘난 꼴은 못 보는 오랜 한국병, 연예인이라는 신특권층에 대한 끝없는 분노, 온라인 세상의 예의실종 등 온갖 문제가 한 사건에서 터져 나왔다.

"아시아의 2대 불가사의는 황금만능주의인 중국이 공산주의국가가 된 것과, 부자를 미워하는 한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지 않은 것"이라는 한 미래학자의 말을 흉내내자면 "특권층에 대한 분노를 가진 한국이 아이돌 왕국이 된 것은 기적과도 같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