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시대의 우리 소설 읽기]김윤식 문학평론가 펴내… "소설 들고 근대를 때려 부숴야"12편의 명문 중 김연수론, 박상륭의 잡설품론 가장 공들여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가 새로운 평론집 <다국적시대의 소설읽기>를 출간했다
오늘은 기자가 변사처럼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김영하의 <빛의 제국>, 조경란의 <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최근 영미권 시장에서 유료로 팔린 우리 소설이오. 국내 한 출판 에이전트가 해낸 성과라지요?

해마다 노벨상 시즌이 되면 한 원로시인의 집 앞에서 문학 담당기자들이 진을 치는 진풍경도 연출되오. 아마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 혹은 기대겠지요? 이런 풍경을 보면 영화처럼 우리 문학도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기도 합디다.

하지만 여전히 그 노벨상인가 뭔가가 발표된 10월이 지나면 쓸쓸한 기운을 지울 수가 없는데 말이지요. 예술의 수준을 스포츠처럼 등수 매겨 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번번이 '낙방'하다 보니 궁금해지긴 합디다.

우리 문학은 정말로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그 형식과 내용이 '세계적 수준'에 이르렀을까?

소설가 박상륭
얼마 전 이에 관한 책 한 권이 출간됐소. 이름하여 <다국적 시대의 우리 소설 읽기>. 저자는 김윤식 문학평론가요. 지금의 20~30대 중에는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독자도 있겠지만, 글 꽤나 읽는다는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 그는 전설 같은 존재. 도대체 왜? 잠시 그의 전작 중 한 권을 읽어 볼까요.

'맨 먼저 근대가 소년 앞에 (A)국민국가의 형태로 다가왔소. 이를 공부하는 데 4년이 걸렸소. 두 번째 마주친 것은 (B)자본제 생산양식. A, B로 말미암아 고무되거나 뒤틀린 문학만이 근대문학일 수밖에'

이 글이 실린 책 제목이 <내가 살아온 한국현대문학사>인데, 한 치 과장 없이 이 말을 붙일 수 있는 이가 바로 김윤식 문학평론가요. 2000년 8월 정혜신 박사가 그의 책을 헤아렸을 때 순수저술 101권, 편저 24권, 번역 5종, 감수 7종이었소. 그 후 얼마나 더 썼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답니다.

2001년 서울대 정년퇴임 이후 만 9년 동안 "얼추 30권을 낸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뿐. 이 '인간문화재급 학자'(정혜신, <남자 대 남자> '변화를 좇는 빈 배, 변화를 품는 거목')가 새로 들고 온 책이 <다국적 시대의 우리 소설 읽기>요.

그런데 '세계화 시대'가 아니라, '다국적 시대'라고 말했것다. 여기서 다국이라 함은 앞서 말한 A, 즉 국민국가를 의미함을 눈치챌 필요가 있소. 요컨대 그는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 속의 인류, 즉 근대의 테두리 안에서 여전히 문학을 읽고 있다는 것이외다.

소설가 김연수
선생이 말하기를, "맞아요. 나는 뒤에 가는 사람이다 그런 뜻이지." 하지만 이제 일개 국가(한국)의 틀에서 문학을 읽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국가 혹은 국가와 국가 사이(다국)에서 발생하는 견고한 틈을 인식하며 문학을 읽어야 하는 시대가 됐고, 그도 그런 수준쯤은 된다는 것. 제목은 이런 뜻을 함축하고 있소.

다국적 시대와 세계화 시대는 어떻게 다를까?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역작 <액체근대>에서 이 시대를 일컬어 '모든 견고한 것들이 무너지고'라고 말했소. 세계화 시대에는 국가 장벽이 무너진다는 것을 우회한 표현. 그렇다면 그 형식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정치가 국가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 바우만에게 이 시대는 세계화 시대요.

한편 소설이 자본제 생산양식의 한계에서 출발했고, 국민국가의 비호 아래 발전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 이 상식을 발판 삼아 잠깐 유추해 볼까요. 고로 그것은 근대의 테두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하기, 소설 쓰고 읽기는 "뒤에 가는 사람"의 몫이라는 것. 다시 말해 소설가와 소설 비평가는 여전히 근대를 살고 있다는 것. 세계화 시대와 다국적 시대가 갈리는 지점이오.

아, 이 양반 말 참 많네. 서두가 길었소. 이 '견고한 것들'이 무너지는 시대, 우리 작가들은 그 견고한 것들의 잔재(소설)를 들고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책 한 권을 들고 선생을 만났소. 동부이촌동 딸깍발이 선비를.

한국어로 한국 넘어서기는 가능한가

이 변사의 이야기가 기사 핵심을 벗어나고 있다굽쇼? 천만에요, 우리문학이 세계문학이 되려면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이것 이외에 이 책은 관심이 없습니다요.

다시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로 돌아와서 여기, 작가들 앞에 미션 임파서블이 기다리고 있소. 우리문학이 세계문학이 되려면, 견고한 것들의 잔재(소설)를 들고 견고한 것들(근대)을 때려 부수어야 한다는 과제가 그것. 우선 국가를 부숴야겠지요?

동부이촌동 딸깍발이 선비가 김연수를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 있소. 일단 대결의지를 보인 작가니까.

김연수의 묘안은 무엇인가? 선생은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요. '한국어로써 한국어 글쓰기의 넘어서기는 어떻게 가능한가'(269페이지), 말하자면 김연수론 되겠습니다. 여기서 선생님 한 말씀 들어 보시겠습니다.

"김연수가 집중하는 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것. 이 민족을 뛰어 넘는 방법은 뭐냐, 이 사람에게는 글쓰기죠. 헌데 김연수는 조선말밖에 모르잖아. 우리말로 글을 아무리 써봤자 민족주의를 못 뛰어 넘지. 그럼 어째야 하느냐. 번역할 수밖에 없지. 민족주의를 털어내고 할 수 있는 한국어의 글쓰기."

잠깐, 김연수 소설을 안 읽은 독자를 위해서 한마디. 김연수의 최근 소설은 마치 외국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한 뉘앙스를 줍니다. 변사는 이들 작품을 읽으며 '김연수가 생계형 번역으로 문체가 바뀐 건가? 아니면 번역을 염두하고 문체를 바꾼 건가?' 의심한 적이 있었소.

영문과 출신인 그는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우리말로 번역했는데, 이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성당>을 일본어로 번역한 그 포즈를 연상시킵니다. 하루키는 카버를 비롯해 피츠 제럴드 등 영미문학의 정통한 일본어 번역자로 알려졌는데, 그는 이런 방식 즉 일본소설이 아닌 영미소설로 문학을 익혔고 때문에 그의 소설이 영어로 번역될 때 구성이나 문체에서 소실되는 언어가 적습니다.

다른 일본작가보다 유리한 '스타트 라인'에서 소설을 쓴다고 볼 수 있지요. 때문에 김연수뿐 아니라 김영하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판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고 했을 때, '어떤 문체변화를 시도했을까?' 하는 의문에 작년 소설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봤지만, 오랜 기간 묵은 작품이 군데군데 섞여있어 그런지 문체변화는 안보입디다.

각설하고, 다시 김연수로 돌아와서. 이 변사는 한편으로 김연수의 번역투 문체가 한국어의 특징을 없애버리는 것은 아닌가, 노파심을 가진 적도 있었소. 제 작품이야 수월히 번역되겠지만, 모름지기 작가란 모국어의 첨단을 걷는 자인데, 이 말이 영어로 기운다면 문제가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영어는 보편어. 다국적 시대에 어쩔 거야?"

"한국어와 영어 차이를 극복하려면 보편어로 따라가야 해요. 고대 라틴어나 한자가 보편어라면 지금은 영어가 보편어죠. '언어마다 각각 특징이 있을 뿐이지'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우리와 영미권(의 국력 혹은 문화예술 수준)이 똑같다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거죠. 김연수는 이걸 알고 있고, 우리말을 될 수 있으면 영어 쪽으로 접근해 가면서 글을 쓰고 있죠. 우리 문학, 소설이 당면한 중요한 과제죠. 월평 쓰면서 작품을 읽어보면 그런 걸 의식하고 쓰는 작가가 있고, 그런 걸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쓰는 작가도 있는데, 일류 작가 같으면 적어도 그 정도는 의식하고 써야 해요."

그걸 의식하는 작가 혹은 번역될 수 있는 작가는 또 누군가요?

"가령 이승우의 경우 의식하지 않지만 번역될 수 있는 소설이에요. 이 작가는 관념으로 써요. 관념은 고도의 지적인 작업이야. 우리는 관념에 훈련이 안 돼있고, 한국어는 감정적인 언어예요. 그러니까 물컹물컹한 게 한국어죠. 이승우는 그런 언어가 아니라, 단도처럼 단단한 쇠를 갖고 글을 써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계속 그렇게 쓰면 돼요. 서구어로 번역될 수 있는 것은 이승우 언어밖에 없어. 딴 소설은 번역이 안 돼."

여기서 잠깐, 부사와 형용사가 발달한 우리말은 감정표현에 능하고(선생님 표현으로는 "물컹물컹한") 명사가 발달한 영어는 사실 기술에 적합하다는 것이 삼척동자의 두 번째 상식. 때문에 영어는 소설에, 우리말은 시에 좀 더 적합하다는 것이 문학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요.

한편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 수상 후 "한국에 노벨문학상 후보를 누구라고 보느냐?"는 국내 기자들 질문에 "이승우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에둘러 말한 바 있습니다요. 이때 변사는 이승우 소설 저변에 깔린 기독교 사상 때문에 의미전달이 수월했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비결은 기독교가 아니라 관념이었군요.

세계인 넘어서 우주인되기

김연수가 국가 안에서, 국가를 때려 부수려고 꼼지락거리는 동안, 우주로 나아간 사람이 있소. 김동리에게서 사유의 젖줄을 대고 자라나 그 아비를 넘어선 박상륭이오. 맞소, 농촌작가 이문구와 나란히 서기 싫어 졸업사진(서라벌예대)도 안 찍었다는 그 콧대 높은 문인 박상륭. 재작년 이런 말을 했지요.

"박 모 선생(박상륭 자기 자신)은 아주 젊어서 단편 몇 편 썼을 때 한국문학을 했고, 종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문학이 아니라 동양의 문학을 했습니다. 동양의 문학을 했다는 건, '마음의 우주'의 문학을 했다는 말이 돼요."(본지 2281호 한국초대석 '잡설은 소설·철학·경전 아우르는 텍스트')

아, 선생 두 분이 나오니 헷갈리는군요. 김윤식 선생님을 딸깍발이 '김 선비'로 바꿔 부르지요. 김 선비는 박 모 선생의 '우주의 문학'에서 우리문학의 세계성을 읽어냈습니다. 그걸 이렇게 쓰셨군요. '샤머니즘의 우주화, 우주화된 샤머니즘'(301페이지). 요컨대 박상륭의 잡설품론 되겠습니다.

박 모 선생을 만나기 전 이 변사는 눈물을 흘렸는데 이유인 즉, 그 잡설(장편 <잡설품>)이 너무 어려운 잡설이라서. 이 난해함이 변사의 무지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김 선비도 글쓰기 전 5번을 읽었다는군요. "내가 애를 써서 썼어요. 그건…. 내 아니면 못 써." 자 이제 한 말씀 들어 보시겠습니다.

"김동리가 제일 아낀 제자 둘이 이문구와 박상륭인데 나중에 이문구만 감싸고 박상륭은 내친 거야. 왜냐면 김동리는 한국 샤머니즘을 했고, 박상륭은 샤머니즘을 세계화했으니까. 박상륭은 인류를 갖다 상대하지, 쩨쩨하게 한국인을 상대하지 않는다고. 저 사람은 세계인이야."

<잡설품>은 희랍신화, 기독교, 노장사상과 티베트 불교까지 포섭합니다. 박 모 선생의 작품은 현세(희랍신화)에서 영생 즉 한 번의 거듭남(기독교)을 거쳐 끊임없이 태어나는 윤회(불교)로 나아가는데요, 이게 또 복합문체(여러 문장을 안은 문체) 혹은 복의문체(여러 뜻을 한 문장에 품은 문체)로 겹겹이 둘러싼 형식입니다.

아, 변사 말발이 밑천을 드러냅니다. 좋은 글은 요약이 안 되는 글이라던가요. 김 선비께서 세계문학으로 돌파한 작품으로 이 작품을 꼽았는데요, 잠시 김 선비의 '잡설품론'을 볼까요.

'잡설편이 아니라 잡설품이 아니겠는가.(…) 전자가 문학(수사법)의 범주라면 후자는 종교(비의)의 범주이니까. 品이란 다르게는 경전 품목을 가리킴인 것.(…)잡설품이란 경전의 일종이다. (…) 경전을 설한다는 것. 이게 참주제 아닙니까. 그런데 그 설하는 방식이 잡소리식이라는 것' (303~306페이지)

세계적 문학을 가늠하는 잣대는 보편어와 세계사 인식 틀의 획득. 김연수가 우리말을 붙잡고 보편어로 가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면, 박 모 선생은 세계사 인식틀을 확장시켜버린 쪽에 가까운데, 이 열쇠구멍이 바로 샤머니즘. 그의 소설 계보를 그리면 희랍신화, 기독교를 거쳐 다시 불교와 노장사상으로 되돌아오는 바, 그러니 <잡설품>의 시동이 호서(서양)에서 호동(동양)으로 올 수밖에요. 박 모 선생의 저 잡설("동양의 문학을 했다는 건, '마음의 우주'의 문학을 했다는 말")은 시정잡배의 잡설은 아니라는 소리.

이 두 글(김연수론, 잡설품론)이 이촌동 김 선비께서 제일 공을 들인 글이라는데, 다국적 시대 우리 소설을 읽은 나머지 10편의 글도 명문입니다 그려. 그의 전공 근대문학사에 발붙인 글들이니까.

자, 다른 얘기 좀 들어 볼까요? 박상륭이 김동리에게서 사유의 젖줄을 대었듯, 김 선비에게도 이런 사람이 분명 있었겠지요? 그에게 정신적 스승은 단연 루카치, 저 서슬 퍼런 70년대 그 스승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가야, 걱정 마라 인류가 나아가는 길이 문학에 있단다. 그는 이 장면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가 쓴 책 중에 <이광수와 그의 시대>란 게 있는데, 그걸 쓰려고 일본을 두 번 갔어. 첫 번째가 하버드 옌칭연구소 돈으로 동경을 간 건데, 거기 루카치 책이 있잖아. 그때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루카치도 국내에서 금서였어. 대번에 샀지. 밤을 새 읽었어. 읽고 나니 새벽 전차 소리가 들리더군. 그 책 속에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 있었어. 그 번역 원고를 내가 갖고 있어요. 아직도."

이촌동 김 선비의 청년 시절을 더 볼까요.

I go to prove my soul

"인류의 가치 있는 행위가 많이 있지만, 문학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했지. 안 그러면 내가 뭣 때문에 했겠어? 대전제가 있지. 인류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유토피아로 가느냐, '사람은 가슴마다 유토피아를 갖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느냐. 1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 그걸 했어. 문학도 인류가 나아가는 방법에 한 가지다. 그걸 가르쳐 준 게 루카치야."

대체 루카치가 뭐라고 했길래요? 루카치 <소설의 이론>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하오. '우리가 갈 수 있고, 가야 할 길을 하늘의 별이 지도의 몫을 하고 그 별 빛이 우리 앞길을 비추는 시대는 복되도다.' 신과 인간이 함께 살던 에덴동산에 갑자기 신이 사라집니다.

성경에서는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라고, 신이 사라진 게 아니라 인류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하겠지만, 실제 인류사에서는 근대 국민국가와 자본제 생산양식이 출현했을 때. 자본주의 시대, 상품 속에 물신화된 나를 찾기 위해 소설 주인공들은 길을 떠납니다. 그 책에서 루카치가 유일하게 영어로 쓴 단 한 줄은 'I go to prove my soul.'

루카치가 말하기를, 아가야 자본주의 세계에서 훼손된 가치를 찾아 인류가 나아간 길, 이게 소설이란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소설을 읽고 있는 거야."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왔군요. 견고한 것들의 잔재를 들고 견고한 것들을 때려 부숴야 하는 우리 작가들은 어떻게 됐나요? 프로도가 '절대 반지'를 찾아 세계평화를 이룬 것마냥, 우리 작가들은 근대를 때려 부수는 데 성공했나요? 그래서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랐나요?

"근대를 벗어난 건 아니고, 다국적으로 가까이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발버둥치고 하는 것에 긴장이 생기고. 우리 작가의 존재 이유가 그렇지 않겠는가…. 세계화되어 버리면 나로서는 논의할 자신이 없고, 나는 아직 '세계화됐다'라고 생각하지 않고요. '아직 많은 작가들이 나처럼 다국적 시대에 골머리를 앓고 헤매고 있다.' 큰 틀에서는 나는 그렇게 보고 있어요. 사람들이 세계화됐다고 말하는 데, 나는 그 문턱에 우리 모두 쭉 서 있다고 생각해요."

자 이제 정리가 되나요? 아직 모르겠다는 이 변사를 위해 김 선비께서 인터뷰 말미에 친절히 정리해 주시네요.

"다국적 시대에 그 '국'을 뛰어넘는 건 박상륭, '국'을 못 뛰어 넘고 고민하는 게 김연수죠. 그리고 꼭 인류사를 공부하라는 것. 소설로도 인류사를 공부할 수 있다는 걸 나한테 가르쳐 준 사람이 루카치이고."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