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영 베이커리', '플랫폼 슬로우러쉬' 등 현대미술의 다양한 실험들

인영 베이커리&아트 에이전시
지난해 12월 27일 사방팔방 아파트인 은평뉴타운의 한 상가 1층에 '인영 베이커리'가 문을 열었다.

이름도 입지도 영락 없는 동네 빵집이지만, 이상하게도 빵 굽는 냄새는 어디에서도 나지 않았다. 뭐 하는 곳인가, 싶어 들어가 보았더니 금속공예품과 사진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누구나 동네 빵집처럼 편안하게 드나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지은 이름이에요." 회화, 사진 작업을 해온 장인영 작가가 작업실 겸 갤러리로 차린 공간이다. 정식 이름은 '인영 베이커리 & 아트 에이전시'. 자신의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 젊은 작가들을 모으고, 동네 주민들까지 불러들이는 것이 장인영 작가의 목표다. "놀이터 같은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요."

요즘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전시 소식을 듣고 찾아갔더니 영 엉뚱한 장소가 나타나는 경우, 미술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미술을 발견하는 경우 말이다.

단순히 갤러리라고 하기엔 너무 많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들이 많다. 다양해진 미술 공간은 현대미술의 반경을 넓히고 있다.

에서 열렸던 이정민 개인전 '옥상 삼부작'
미술 공간은 팽창 중

김달진미술연구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0년 새로 생긴 미술 공간은 44개였다. 2009년 미술 공간이 총 100개였으니 한해 동안 44%가 늘어난 것이다.

미술 공간의 증가는 미술에 대한 사회적 수요와 의도가 반영된 결과다. 김달진미술연구소는 기업의 예술 경영을 주된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기업이 갤러리를 만들거나 문화 사업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지자체의 도심재생사업의 일환으로 공공미술이 각광받은 것도 영향을 미쳤다. 여러 도시의 구도심에 작가 레지던시가 들어섰다. 이들 공간은 지역적 맥락과 미술이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미술 공간의 수만큼 그 스펙트럼도 다양해졌다. 전형적인 갤러리보다 복합 문화 공간이 더 주목받으며, 미술의 다양한 '활용'을 이끌어냈다.

에서 열렸던 정은영 개인전 '시연'
현대미술 역동성 반영하는 미술 공간의 다변화

하지만 미술 공간의 다변화는 무엇보다도 현대미술의 역동성에서 기인한다. 공간 자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작가는 창작하고, 관객은 구경하는 이분법적 소통 방식과 제도화된 미술계의 질서를 바꾸는 가능성의 장으로, 지역성을 끌어들이고 일상에 개입하는 가능성의 장으로 미술 공간이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을 전시 공간이자, 수시로 대화와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광장으로 개방하고 있다. 이런 공간은 기존 미술 제도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인사동 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일한 경험이 있는 장인영 작가는 "다양한 작가들을 소화할 만한 갤러리와 큐레이터가 부족한 것 같다. 작가들 스스로 미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그런 갈증 때문"이라고 말했다.

삶의 환경과 긴밀히 호흡하는 미술 공간도 늘어나고 있다. 성북동의 한 '오래된 집'은 1년간의 작가 레지던시 기간을 거쳐 지난 9월 공개됐다.

플랫폼 슬로우러쉬
개발과 재개발의 틈바구니에서 방치되어 있던 이 허름한 집은 작가들의 삶을 통해 주거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는 동시에 미술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런 프로젝트는 급변하는 삶의 환경에 대한 미술적 질문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미술 공간=갤러리와 미술관'이라는 상식은 고리타분하다. 어떤 미술 공간은 심지어 일시적 존재를 그 소임으로 삼는다. 프로젝트 그룹 슬로우러쉬가 운영한 는 지난 6월부터 12월까지 인천 송도국제신도시의 한 상가에 생겼다 없어졌다.

일정 기간 동안 신도시의 빈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 의 취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곳에서 진행된 프로젝트도 송도의 지역성을 탐색하는 것이 많았다.

매립지이기 때문에 역사성이 없고, 개발의 욕망만으로 건설된 송도를 상징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채은영 큐레이터의 표현대로 '떴다방'처럼 운영된 는 현실의 틈새를 치고 빠지는 미술적 화법이었던 셈이다.

지금 미술 공간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미술 공간의 문을 두드리면 현대미술의 다채로운 풍경이 보인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