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 자세로 경청하고 인문학적 소양 바탕한 대화와 몸가짐에서

드라마 <시크릿가든>
"그럼 신사일 것이란 말은 어떤 의미인가요? 혹시 정의가 있다면 어떤 건지, 가르쳐 주지 않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야."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중에서)


전문가에게 물었다. 신사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우리 아빠가, 남편이, 상사가 젠틀맨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전문가들은 젠틀맨의 조건을 'ABC'라고 말한다. A는 외모(Appearance), B는 행동(Behavior), C는 의사소통 능력(Communication)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공존하며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의뢰 결과, 한국 중년남성이 젠틀맨이 되려면 하드웨어(외양)와 소프트웨어(행동, 의사소통기술)의 전면개조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

워밍업: 따뜻한 카리스마 갖는 법

중년남성들은 가끔 식당에서 여성에게 의자를 빼주거나, 엘리베이터에서 버튼을 대신 눌러주면서 자신이 신사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홍순아 삼성CS아카데미 본부장은 '매너'와 '에티켓'을 구분하라고 조언한다.

국립극장서 전통 음악 배우는 CEO들
"에티켓은 타인과의 관계를 맺을 때의 규칙입니다. 지키지 않으면 실례하는 것이죠. 매너는 '에티켓 플러스 알파'를 갖춘 행동입니다. 매너 있는 행동은 감동을 줍니다."

여기서 유념할 사실은 70~80년대 '매너'라고 불린 남성의 행동도 이제는 에티켓이 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자동차 문을 열어주는 것이 1980년에는 '신사적 행동'이었지만, 이제는 여성이 문에 부딪치지 않게 손으로 머리 위를 살짝 잡아주는 제스처는 취해야 매너 있는 행동이 된다는 것. 한마디로 젠틀맨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더 배려할까?'를 염두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중년남성들이 원하는 젠틀맨은 어떤 모습일까? 이미지컨설팅업체 누에이미지의 김은진 대표는 "요즘 CEO들은 특정 인물을 롤모델로 삼지 않는다. 자신의 특징 중에서 세련되고 기품 있으면서도 감성적 이미지를 끌어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따뜻한 카리스마'를 갖춘 남자를 젠틀맨으로 생각한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세련되고 기품 있는 이미지는 차가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감성적 이미지와 상충된다는 것이다. 김은진 대표는 "외모를 통해 세련되고 이성적인 인상을 준 후, 대화와 태도에서 감성적인 측면을 드러내라"고 조언한다.

"외모보다도 태도나 말투를 단시간에 고치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인 훈련으로 몸에 익혀야 하죠."

21세기 신사의 자격으로 전문가들은 '소통과 나눔'을 주제로 한 한국일보 경제부, 산업부 회의 장면
젠틀맨의 소프트웨어, 행동과 화법의 정석을 배워보자.

Step1. 역지사지가 기본입니다

젠틀맨의 기본은 '역지사지 자세'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배려 깊은 행동은 자연스럽게 우러나온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다면 왜 남성들은 젠틀맨이 되지 못할까? 홍순아 본부장은 "배려를 잘못 활용하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남성들은 흔히 자기 위주로 '이게 매너다'하고 행동해요. 상대방을 위주로 배려하는 것이 매너 있는 행동이지만, '이렇게 하면 좋아 할거야',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죠."

김미희 이미지컨설턴트는 "테이블 매너를 폭넓게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얼마 전 처음 뵌 분들과 식사를 하는데 메뉴가 삼계탕이었어요. 상대방이 여성이라는 것과 첫 만남인 걸 고려했다면 메뉴 선택이 잘못됐다고 할 수 있죠. 식사 메뉴도 테이블 매너 중 하나입니다."

물론 몇몇 매너와 에티켓으로 젠틀맨이 되는 것은 힘들다. 역지사지 자세를 어떻게 '체화'할 수 있을까? 김정운 명지대 교수가 쓴 칼럼 '한국 남자들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이유'는 '의미공유'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이다. 교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어떻게 공유되는 것일까? 김정운 교수는 같은 글에서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라고 대답한다. 인간이 인지적·논리적 의미공유를 가능케 하는 것은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통해서다.

연인들이 놀이공원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공포영화를 보는 것은 인위적이라도 과장된 정서 공유의 경험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함께 구성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이 자신과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한다는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공유는 가능해진다.

'정서공유의 경험이 가능하려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야 한다. 말귀 못 알아 듣는 한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경험에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를 경험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 증상을 정신병리학에서는 '감정인지불능'이라고 한다.' (같은 글)

내면의 느낌을 알고 표현하는 것, 이것이 역지사지의 출발이다.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충고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Step2. 닥치고 좀 들으세요

쌍시옷 들어가는 욕은 아니지만, 간혹 '카리스마'를 들먹이며 자기 감정을 막무가내로 말하는 남성들이 있다. 그러나 단언컨대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같은 막말을 어설프게 입에 올리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김주원으로 봐주길 꿈꾸면 안 된다. 그런 말은 드라마 속 김주원이라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젠틀맨식 대화는 어떤 관계에서든 일방향으로 흐르는 게 아니라 탁구공처럼 주고받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말처럼 쉬우면 왜 현실에서 젠틀맨이 없겠는가.

전문가들은 "한국 남성들은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것을 힘들어 한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나이와 직급의 격차가 높은 사람들과의 대화는 주고받기보다 일장연설로 끝나기 쉽다.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는 명언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남자는 많지 않다. 때문에 중년남성들을 대상으로 한 대화 훈련에서는 언제나 '경청'이 우선순위로 꼽힌다. 말이 많은 남성에게도, 과묵한 남성에게도 언제나 "잘 들어라"고 조언한다.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줄 때 '당신을 존중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기 때문이다.

김미희 이미지컨설턴트는 "욕심을 내려놓으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말을 잘 할 수 있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상대방과 대화할 때 경청이 가능하고, 잘 듣는 것에서 훌륭한 대화가 시작된다.

경청의 구체적인 매뉴얼도 있다. 홍순아 본부장은 "대화를 할 때 공감, 진행, 정리의 순서를 따르라"고 권한다.

"우선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해줍니다(공감).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어야 하고요(진행). 이때 '그래서 어떻게 됐어?'라고 물어보는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흔히 남성들은 대화를 할 때 어떤 해답을 주려고 해요. 해답을 주기 전에 공감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대화의 내용을 정리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단계(정리)가 마지막으로 따라와야 합니다."

이처럼 대화에서는 '리액션'이 중요하다. 실제로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대화에서 말의 내용이 차지하는 비중은 20%가 안 된다고 말한다. 나머지 80%는 표정과 목소리, 말하고 듣는 태도 등이 차지한다.

말하기는 훈련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사람의 성정이기도 하다. 과묵한 남성이 하루 아침에 달변가로 변하기는 어렵다. 김미희 이미지컨설턴트는 경청과 더불어 '미소'를 권한다.

"무뚝뚝한 사람이 갑자기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하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웃는 것은 웃으며 말하기보다는 쉬워요. 상대방과 마주칠 때 웃다 보면, '마음의 문을 연 것'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Step3. 마이클 샌델 정도는 외우세요

신사의 기본 항목 중 '교양'이 있다. <남자의 자격> 멤버들이 '젠틀맨' 미션을 수행한다면서 전시회와 클래식 공연을 찾은 이유는 교양을 넓히기 위함이었다. 젠틀맨은 예술에 대한 식견만큼이나 인문학적 소양도 필요하다.

1960년대 신사는 <타임즈>지와 <판취>지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지만, 2010년대 신사는 인문서와 경제서를 들고 다닌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각각 60만부 와 20만 부 이상을 판매하며 지난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됐다.

김은진 대표는 "자신의 전문지식만을 가지고 대화하기는 힘들다. 상대를 설득할 때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통찰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요컨대 전문지식이 없는 상대방을 대화로 아우르는 힘이 인문학적 소양에 있다는 말이다. 최근 인문서 인기는 출판계 이변이 아니라 시대의 반영인 셈이다.

때문에 최근에는 기업 임원이나 정치인의 이미지를 컨설팅할 때도 인문서를 추천해서 읽고 토론하는 훈련을 추가하는 추세다. 참여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쟁점을 뽑아내고, 스스로 개념을 만드는 능력을 갖춘다. 토론을 통해 경청하기와 논리적으로 말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예전에는 무조건 강한 이미지를 원했지만 요즘에는 부드러운 이미지를 원하는 남성들이 많습니다. 접근하기 쉽고 튀지 않지만, 눈에 띄는 남자이길 원하죠."

10여 년간 기업임직원과 경영자들의 이미지를 컨설팅한 어느 전문가의 말이다. 2010년대 남성들이 바라는 남성상은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 젠틀맨의 사전적 정의에 근접해지고 있다. 이제 마음처럼 몸도 젠틀맨이 되어 보자.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