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중심의 평등적 사고, 타인에 대한 배려, 교양, 세련된 외양…

중년의 연예인들이 모여 101가지 미션을 수행하는 TV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 멤버들이 2011년 새해 첫 도전한 미션은 '젠틀맨 되기'였다. 제작진이 밝힌 기획 의도는 '남자라면 모름지기 최소한의 문화생활을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정찬을 먹고, <색채의 마술사 샤갈전>을 관람했고, 발레공연을 보았다. 이런 것이 젠틀맨 되기의 필요충분조건이냐를 두고 인터넷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젠틀맨의 조건을 논할 때, 문화예술 소양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유행한 '따뜻한 카리스마'란 말과 함께, 젠틀맨은 이 시대가 바라는 남성의 모델처럼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젠틀맨의 정의나 조건을 콕 찍어 말하기란 애매하다.

우리 시대 젠틀맨의 조건은 무엇일까? 젠틀맨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춰야 할까?

젠틀맨: 교양 있고 예의 바른 남자

영국신사의 전형으로 꼽힌 햄릿. 시대와 사회에 따라 신사를 정의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사진은 영화 <햄릿>(Hamlet)
젠틀맨(Gentleman).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신사(紳士)로 번역돼 구한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말이다. 젠틀맨의 어원은 젠트리(gentry)다. 중세 후기 영국에서 귀족은 아니지만 실력과 재산을 가진 존경받는 사람들을 젠트리(좋은 가문의 사람이란 뜻)로 불렀다.

국어사전에서 신사는 '사람됨이나 몸가짐이 점잖고 교양이 있으며 예의 바른 남자'로 정의된다. 교양과 예의의 기준이 시대와 사회마다 달라지듯, 신사의 의미와 조건도 시대마다 달랐다. 일례로 동아일보 1964년 7월 28일자 칼럼 '신사의 자격'이란 칼럼에 이런 말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이 함레트(햄릿)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상적 영국 신사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함레트가 갖춘 자질과 능력이란 용기, 관용, 학식, 기지, 세련된 몸가짐, 검술, 음악과 극(劇)에 대한 취미 등이었다. 당시 신사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 수 있고, 르네상스 시대의 전형적인 완인을 뜻하는 것 같다.'

이어 '한층 완화된' 1960년대 신사의 조건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전문직에 종사하는 계층이어야 하고, 둘째 등산 스포츠 명화감상 등을 취미생활로 하고 <타임즈>지와 <판취>지를 옆구리에 끼는 등 교양미를 갖춰야 한다. 셋째 인격 면에서 말이 적고 예의에 바르고 정직하고 약속을 지키며 페어플레이 정신을 가져야 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와 비교해 얼마나 완화된 건지 모르겠지만, 1960년대 신사 역시 완인이 돼야 할 듯하다. 20년이 지나 신사의 자격은 이렇게 바뀐다.

'신사라 함은 남자의 내면의 격을 표현하는 기본 덕목이다.' (동아일보 1984년 3월 3일자 칼럼 '신사의 현대적 조건')

왜 한국에는 젠틀맨이 없을까?

'점잖고 교양이 있고 예의 바른 남자'라는 사전적 정의든, '내면의 격을 갖춘 남자'란 80년대 식 변형이든, 한국사회에서 젠틀맨 찾기란, 자유시장경제 시스템에서 완전고용 달성하기만큼이나 어려운 것 같다. 왜, 한국사회에는 진정한 신사가 없을까?

대기업 CEO와 임직원들을 상담하는 컨설턴트들에게 물어보았다. 한국 중년남성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라고.

홍순아 삼성CS아카데미 본부장은 '상명하복의 수직관계'를 지적한다.

"일례로 기업체에서 강연을 하다 보면, 남성들은 직급에 따라 앉을 자리를 찾아요. 실무진들이 앞좌석에 많이 앉습니다. 여성 직원들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거든요."

성격이 급하고,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것도 한국 남성들의 공통된 태도 중 하나다.
"한국 남성들의 특징은 타인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한다는 겁니다."
일단 '예의 바른 남자'란 신사의 조건에서 대다수 중년 남성들은 우수수 탈락한다.

박노자 오슬로대학 교수는 2009년 출간한 책 <씩씩한 남자 만들기>에서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는 대한민국이 요구하는 바람직한 남성상의 표준은 '국가를 개인의 우위에 두고, 애국이라는 정신적 가치와 신체 단련이라는 육체적인 힘을 동시에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남자'라고 말한다. 이런 마초적인 남자가 아무리 프랑스 요리를 코스별로 먹어 치운다고 해도 젠틀맨이 될 리 만무하지 않을까?

노르웨이에 있는 박노자 교수에게 이메일로 물었다. '2000년대 한국적 남성성'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박 교수는 위계서열이 강하는 점을 꼽았다.

"유교적 가족관과 근대적 학력주의, 학벌주의가 겹쳐져 있어서 한국 남성들에게는 주로 후배와 선배가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학벌 서열이나 연령 서열에서 '동기', '동갑'도 있지만, 그 사이에서도 성공의 정도, 신분 등에 따라서 꼭 보이지 않는 서열이 잡힙니다. 한국 남성 사이에 평등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박 교수는 한국 사회가 남성에 대해 가장 잘 쓰는 외래어가 '카리스마'와 '리더십'이라는 점을 꼽았다. 그만큼 한국 남성은 강함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틀에서 보면, 서열이 낮은 가족 구성원(아내, 자녀 등)의 의사를 존중하는 젠틀맨은 '약하다'는 인상을 준다.

"일단 소통 중심의 수평적인 가족이 되면 남성 가장의 '체면'이 문제 될 수 있습니다."

뿌리부터 박힌 불평등 의식을 고치지 않고서 젠틀맨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2011 한국형 젠틀맨을 찾아서

현실에서 젠틀맨을 찾기 어렵다면, 젠틀맨의 정의를 새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2011년 젠틀맨은 어떻게 정의될까?

박노자 교수는 같은 책에서 '미래의 남성성'을 언급한 바 있다. 배려와 돌봄을 갖춘 남자다. 그에게 2011년 젠틀맨의 조건을 물었다. "경쟁을 상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신자유주의적 한국 사회의 핵심어는 경쟁인데, 경쟁을 강요당해도 옆에 있는 사람을 배려부터 해주고, 경쟁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야말로 신사겠지요."

누에이미지 김은진 대표는 2011년 젠틀맨 조건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경제적 여유, 타인에 대한 배려, 교양, 클래식 수트에 대한 애정이다.

젠틀맨의 어원이 젠트리(좋은 가문의 사람)에서 왔듯, 일단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타인과 대립이 있어도 자신의 말로 설득할 수 있을 만큼 배려와 교양미를 갖춰야 한다. 수트를 입은 직장인은 많지만, 정석대로 입는 한국 남자는 거의 없다. '칼질'만 잘하는 게 아니라, 세련된 언행까지 갖춰야 젠틀맨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젠틀맨을 마다할 상사와 부하, 직원과 아내가 있을까?
담배 끊고, 다이어트하고, 밥을 사도 당신 곁에 사람이 없는 이유는, 당신이 젠틀맨답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에는 '젠틀맨'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