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 충남 세계대백제전 등 다양한 시도들

세상에 유물 없는 박물관이 있을까? 팥앙금 없는 붕어빵처럼 있을 것 같지 않은 박물관이 경북 안동에 있다. 바로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이다.

화석이나 옛 물건 하나 없이 3D 영상, 내비게이션, 가상유물과 '장원급제게임' 등 디지털 기술로 가득차 있다. 관객들은 스크린에 상영되는 하회탈춤을 따라 추고, 건반을 눌러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연이 담긴 놋다리 밟기를 해볼 수 있다. 불교에 대한 퀴즈를 맞추면 사이버 봉정사가 지어지고, 안동이라는 지명의 연원인 고창전투가 입체영상으로 다가온다.

이곳은 이름만 박물관이 아니라 법적으로도 박물관이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해 시간이 좀 걸렸다. 2007년 개관할 때는 문자와 음향, 영상 등 '무형의 증거물'을 유물로 인정하지 않는 기존 박물관 법 때문에 박물관으로 등록되지 못했다. 이후 안동시를 비롯한 관계기관의 노력으로 2년 만에 박물관법을 바꾸며 제1호 디지털박물관이 됐다.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의 사례는 역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국사 교과서의 근엄한 문장과 건조한 연표를 뛰어나온 역사는 다양한 표정과 화법으로 다양한 공간과 문화 장르 속에 확산되고 있다.

역사 스토리텔링, 지역 문화와 만나다

안동 전통문화콘텐츠 박물관
그 중심에 스토리텔링이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말 그대로 역사적 사실에 살과 뼈를 붙여 솔깃한 이야기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인과 관계와 새로운 해석, 연표에서 생략되었던 사람의 마음을 포함시키고, 국사 교과서와는 다른 화법으로 사람들을 역사로 초대한다.

몇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팩션의 인기는 스토리텔링의 잠재력을 증명해 왔다. 역사가 이토록 흥미로울 수 있다는 데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더 많은 역사의 스토리텔링화를 이끌어냈다.

최근 눈에 띄는 역사 스토리텔링 사업들은 상당부분 지역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역사 스토리텔링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문화, 경제까지 활성화하려는 지자체의 관심이 높아져서이기도 하고, 지역마다 생생한 소재들이 땅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가을 충남 공주와 부여 일대에서 열린 세계대백제전은 백제의 문화를 뮤지컬과 퍼레이드 등으로 스토리텔링화한 프로그램으로 약 370만 명의 관객을 유치했다. 지역에서 열리는 역사문화축제의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축제가 끝난 후에도 여파는 이어지고 있다. 충남도와 공주시가 만화 전문 출판사 대원씨아이와 함께 세계대백제전을 겨냥해 기획한 <>은 국내에서 성공한 후 최근 태국에서도 출간됐다. 동성왕과 왕의 일대기를 판타지 장르로 풀어낸 이 만화는 지난 3월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 출품한 후 태국 수출의 기회를 잡았다.

2010세계대백제전
많은 지자체들이 또 다른 성공 사례를 목표한 사업 계획을 내놓는다. 경상북도는 신라, 가야, 유교 등 지역의 3대 문화적 자원을 스토리텔링화하는 '3대문화권사업'을 2년째 추진 중이다. 올해에는 22개시군 19개 사업에 770여억 원의 예산을 쓴다. 그 내용 대부분이 관객이 역사와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유교 문화와 관련한 박물관과 체험 프로그램을 갖춘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 신라 화랑의 심신수련 프로그램과 삶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신화랑풍류체험벨트',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는 '삼국유사가온누리' 등이다.

이천시는 최근 도자와 도공을 소재로 한 소설 <천년의 만남>을 한국문예산업연구원과 함께 출간했다. 대한민국 도예명장인 한 도공의 험난하고도 꼿꼿한 삶을 중심으로 국보 133호인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의 사연, 도자를 매개로 한 한국과 미국의 원수들 간 인연 등이 펼쳐진다.

이는 작년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선정된 이천시가 도자 문화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고 인프라를 다지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지자체가 천편일률에 실속 없는 특산물 축제에서 벗어나 문화 콘텐츠화에 눈을 돌린 것은 문화 연구, 창작의 영역에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천년의 만남>을 쓴 노수민 작가는 "몇몇 스타 작가 외 대부분의 작가는 자신의 글만 써서는 생활하기가 어렵다. 이런 프로젝트는 작가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령
안동대 문화산업전문대학원 유동환 교수는 "지역 문화와 역사의 스토리텔링 사업은 실험적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공공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장의 결과가 중요하다기보다 의미를 두고 긴 호흡으로 추진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비료를 뿌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개척하는 이야기들

진행중인 몇몇 사업들은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능성을 개척해 기대를 모은다.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연구개발센터 양진건 교수는 추사 김정희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되살려냈다. 당시의 자취를 따라가는 코스인 '추사의 길'을 기획한 것이다.

관객들은 차밭과 과수원, 해안가 등을 거치며 차와 귤에 대한 추사의 관심, 그의 사색의 현장 등을 체험할 수 있다. 심지어 편지를 매개로 한 추사의 애정 관계와 추사가 먹었던 상차림까지 여정에 포함된다. 양진건 교수는 오는 4월까지 이 코스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를 개발, 공개할 예정이다.

추사 김정희를 글씨가 아닌 한 인간으로 조명하는 신선한 시각은 제주도 역시 신혼여행지가 아닌 유배의 역사가 깃든 장구한 삶의 터전으로 다시 보게 한다. 경관에 감탄할 뿐 아니라 삶의 환경으로서의 제주도에 대해 이해하도록 만들 것이다.

추사의길
추사의 길은 양진건 교수가 구상하고 있는 유배문화 스토리텔링 사업의 출발점이다. 제주도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였던 만큼 '캐릭터'는 무궁무진하다. 양진건 교수의 말처럼 "제주도는 이야기의 보고라는 점에서 보물섬"이다. 나폴레옹이 유배되었던 세인트 헬레나섬처럼 세계인들이 이야기의 매력에 끌려 찾아오는 제주도를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다.

한옥마을과 낙안읍성, 익산미륵사지 등 호남 지역의 문화, 역사적 자원들은 스마트 기술과 만나 언제 어디서나 손 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된다.

전주대를 중심으로 전남대와 원광대, 전라북도와 전주시 등 호남 지역 공공기관과 기업들이 참여하는 스마트공간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는 스마트 기술의 시뮬레이션, 소셜 네트워크, 개인 맞춤 기능과 문화 자원을 접목시키는 연구개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이 현실화되면 색다른 호남 관광이 가능해진다. 관광객들은 스마트폰에서 검색한 다양한 추천 코스 중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스스로 코스를 발굴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 코스에 새로운 이야기나 '미션'을 덧입힐 수도 있다.

남들 다 가는 곳에서 찍은 사진 대신 '보물찾기'의 추억을 약속하는 이런 관광의 가능성은 참여자가 늘수록 높아진다. 직접 가지 않고 게임으로 관광을 즐기는 방법도 곧 출시된다. 연구센터는 한 게임업체와 손을 잡고 호남의 문화관광 명소들을 배경으로 하는 SNG( Social Network Game 소셜 네트워크 게임)를 개발 중이다.

스마트공간문화기술공동연구센터가 개발한 전통 북 애플리케이션
전통 음악과 관련한 개발 사업도 흥미롭다. 연구센터는 지난해 선보인 전통 북 애플리케이션을 시작으로 전통 악기의 소리와 연주법을 스마트 기기에서 구현하는 기술적 기반을 마련해나갈 예정이다. 한국 악기뿐 아니라 아시아 악기들까지 포괄한다. 이 기술이 완성되면 스마트폰은 북도, 해금도, 몽골의 마두금도 될 수 있다.

사업을 총괄한 김병오 교수는 "지금까지 디지털 음악 기술의 표준은 서양 음악이었지만 이 기술을 통해 동양 음악도 널리 알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구센터는 내년 여수엑스포와 자체적으로 기획한 스마트월드페스티벌에서 그 성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역사 스토리텔링이 꾸는 꿈

방방곡곡 꽃핀 역사 스토리텔링 사업들은 역사문화에 대한 질문을 부메랑처럼 되돌려준다. 그 중 어떤 것은 역사왜곡의 의혹을 받거나 특산물 축제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을 현대인의 눈과 귀와 손에 연결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재하고 있고, 실제로 사회적 역사 인식을 바꾸어 나간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역사테마파크에서 화랑의 생활을 체험할 때, 추사의 적적한 마음을 따라 걸을 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무엇을 하게 될까?

"과거의 사건들은 하늘의 별처럼 많다. 각각의 별들은 그 자체가 우주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개별적 모나드다. 그러한 모나드가 자신이 간직한 비밀을 우리에게 말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별자리의 성좌로 보일 때다." 경기대 사학과 김기봉 교수는 <역사들이 속삭인다>에서 "팩션은 우리 시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꾸는 꿈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발명됐다"고 지적한다.

역사가 스토리텔링되는 방식은 현대 한국인들이 지금을 위해 과거를 인식하는 방식을 가리킨다는 뜻이다. 우리가 저 다양한 역사 스토리텔링의 지형에서 스스로 찾아야 할 보물은 그것이 아닐까. 도대체 우리는 지금 이곳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