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분위기서 맛보는 3스타 셰프의 음식 각광

푸아그라를 먹으려면 수트부터 꺼내 입어라?

청바지에 티셔츠만 입고도 푸아그라와 달팽이, 랍스터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최고의 셰프들이 훌륭한 조리 기구와 최첨단 테크닉을 동원해 공들여 만든 음식들이다.

이곳에는 점잖게 와인을 디캔팅하는 소믈리에나 휘황찬란한 크리스털 잔, 은 촛대는 없지만 대신 8시간 동안 푹 끓여 만든 양파 스프, 오늘 새벽 현지에서 날아온 굴로 만든 튀김, 오븐에서 저온 조리해 공처럼 동그랗게 만든 수란, 구제역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전라도 나주의 A++급 한우 스테이크가 있다. 비스트로의 편안함과 별 3개급 셰프의 자존심이 만나 탄생한 가스트로 비스트로에 대하여.

소박한 주방에서 열리는 화려한 만찬

비스트로는 캐주얼한 식당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래의 정확한 의미는 프랑스의 가정식 식당이다. 최고의 공간에서 최상의 음식과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파인 다이닝에 비하면 아무나 들어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밥집인 셈이다. 이탈리아에서는 트란토리아라고 하고 일본으로 따지면 이자카야가 비슷하며 한국에서는 백반집과 같은 개념이다.

루이쌍끄의 버섯 두오모
드레스 코드도 없고 뻣뻣하게 서서 쳐다보는 직원도 없는 비스트로의 자유로운 분위기에, 음식만 가스트로노미(gastronomie: 정통 미식, 파인 다이닝과 같은 의미) 급인 가스트로 비스트로(gastro bistro)는 최근 국내에서 가장 각광 받는 레스토랑의 형태다.

청담동에 위치한 한 가스트로 비스트로. 칠이 벗겨진 베이지색 벽에는 못질한 구멍이 숭숭 나 있고 흑백 사진이 액자 없이 걸려 있다. 오래된 집에 있을 법한 고색창연한 갈색 식탁에는 깨끗이 빤 린넨 테이블 보가 깔려 있지만 고급 레스토랑의 그것이라기 보다는 청결하고 자존심이 강한 할아버지의 주방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식탁에 음식이 올라오면서부터 이제까지의 검소한 분위기는 반전이 된다. 크로와상 속에는 부드럽게 브레이징한 달팽이가 들어 있고, 돼지 안심은 요즘 유행하는 수비드(저온 조리) 기법으로 완벽하게 요리했으며, 큼지막한 랍스터가 박혀 있는 리조또에는 샤프란이 아낌 없이 들어가 있다.

심지어 주전부리로 나오는 빵에 곁들여지는 소스 조차 올리브 트러플 오일, 푸아그라 빠테 등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올라가는 재료와 별 차이가 없다.

"경직된 분위기에서 먹는 장식적인 음식보다는 편안한 분위기 속의 먹을 만한 음식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셰프로서 질 좋은 고기, 기능이 훌륭한 프라이팬을 고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음식의 급이 높아질 수 밖에 없죠. 그러나 비싼 한우와 푸아그라를 쓴다고 해서 그 식당을 비스트로가 아닌 파인 다이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겁니다. 가스트로 비스트로는 이렇게 비스트로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입니다."

레스쁘아
가스트로 비스트로가 출현한 배경 중에는 3스타급 셰프들의 전업이 있다. 현재 유럽의 유명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중에는 적자로 인해 문을 닫는 집이 속출하고 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세컨드 비스트로를 차려 그 손해를 메운다.

톱 셰프가 꾸리는 비스트로는 당연히 동네 주먹구구식의 비스트로와는 음식의 맛이나 테크닉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를 보일 수 밖에 없다.

국내 가스트로 비스트로의 유행을 주도하는 이들은 유학파 요리사들이다. 유럽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젊은 셰프들은 좁쌀만한 장식에 목숨을 거는 '셰프 놀이'가 싫어서 혹은 제대로 된 비스트로 하나 없는 국내 환경을 개탄하며 강남 등지에 비스트로를 차렸다.

물론 고객들로서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평소 접근하기 힘들었던 3 스타급 음식이 호텔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밖으로 알아서 걸어 나와준 것이다. 비스트로에서는 갖춰야 할 격식이 대폭 줄어든다는 점도 사람들의 마음을 한결 편하게 해준다.

드레스 코드 따위는 필요도 없으며, 소리 내어 종업원을 부를 수도 있고, 좀 오래 앉아 있는다고 해서 비싼 와인을 시켜야 하는 부담감도 없다. 음식을 담는 모양도 분위기에 맞춰 푸짐해지고 투박해진다.

"파인 다이닝에서 하는 식으로 소스로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고 정교하게 가루를 뿌리다 보면 음식이 다 식어버려요.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한 접시에 3~4명씩 달라 붙습니다. 비스트로에서는 격식 없는 담음새로 그 인건비를 줄이고 대신 음식에 투자하는 거죠."

그러나 소박한 비스트로라고 해서 싼 가격과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 인테리어나 담는 모양만 소박할 뿐이지 정작 음식에 들어가는 재료와 테크닉은 최고급이기 때문에 가격도 그에 따라 자연히 올라간다. 그라노의 어란 파스타는 4만원이고 의 와규 꽃등심 스테이크는 7만5000원이다.

가스트로 비스트로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좋은 점은 각 나라의 대표 요리를 정통 레서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비스트로는 태생 상 오리지널리티와 맞닿아 있는데 가정식 식당에서 유래한 만큼 지방색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홈메이드 음식이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해산물 크림 파스타 같은 한국형 이탈리안 대신 계란 노른자로 만든 정통 까르보나라를 맛볼 수 있다.

"손가락만큼 나와야 프렌치라는 것은 편견입니다. 정작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 중에는 한식처럼 푸짐한 것들이 많아요."

이제 막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한 가스트로 비스트로는 종종 국내 고객에게 혼선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작은 식당이라서 부담 없이 들어갔는데 왜 이렇게 비싸냐는 불만부터, 최고급 식당인줄 알았는데 왜 서비스하는 사람이 부족하냐는 불만까지 다양하다. 이는 현재 어중간한 한국의 레스토랑 분류 때문이다.

까슐레 드 메종
"지금 국내에는 진짜 파인 다이닝도 없고 진짜 비스트로도 없습니다. 6만~8만 원대에 5가지 코스를 내는 레스토랑이 일반적으로 파인 다이닝으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서비스나 음식이나 최고급 레스토랑에 한참 못 미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설픈 서비스와 음식에 쓰는 돈이 못내 아깝게 여겨졌다면 가스트로 비스트로는 새로운 해답이다. 시장에서든 분식집에서든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려는 미식가 본연의 태도는 가스트로 비스트로와 일맥상통한다.

보통이 아닌 보통의 프렌치
정통 프렌치 가스트로 비스트로,

외국인들이 구절판과 신선로만 알고 잘 끓인 김치찌개의 참 맛을 모른다면 한국인으로서 그렇게 서운할 수 없다. 프랑스 요리도 마찬가지다. 큰 접시 한 가운데 손톱만하게 올려진 달팽이 요리는 프랑스 음식의 전부가 아니다.

는 국내에 비스트로의 개념이 전무하던 2008년 임기학 셰프가 삼성동에 문을 연 프랑스 식당이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정통 프랑스 요리로는 국내에서 한 손 안에 꼽힌다.

"동네 비스트로 같은 공간에서 프랑스인들이 가장 즐겨먹는 '보통의' 프렌치 요리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이 곳을 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셰프 다니엘 블러드의 'DB 비스트로 모던'과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카페 그레이'에서 일한 임 셰프는 화려한 장식이나 퓨전 음식을 배제하고 정통 프렌치 레서피를 고집한다. 그 중 하나가 장시간 조리로, 의 요리 중에는 짧게는 1시간에서 길게는 40시간씩 조리한 음식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프랑스 가정식의 대표 주자이자 국민 해장국인 양파 스프는 이 집의 시그니처 메뉴다. 거칠게 썬 양파를 낮은 불에 오래 졸이다가 와인을 넣고, 8시간 이상 끓인 닭 육수를 부어 만든다.

18시간 동안 브레이즈(기름에 지진 재료에 물을 넣어 약한 불로 오래 끓이기)한 돼지 족과 30시간을 들여 콩피(고기를 기름에 재워 낮은 온도에서 오래 익히기)한 삼겹살, 갈비를 42시간 동안 저온에서 브레이징한 포토푀(고기와 야채가 들어간 국물 요리)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3일 전부터 준비에 들어가야 한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들은 냄비에 푸짐하고 소담스럽게 담겨 나와 한층 입맛을 돋운다. 일요일은 쉬며 점심 시간은 12시부터 3시, 저녁 시간은 6시부터 10시 반까지다.

'이탈리안 집' 햄버거
달팽이 & 푸아그라 안주
프렌치 가스트로 펍, 루이쌍끄

기분 좋은 저녁 식사 후 2차로 한 잔 하러 간 자리에서 마요네즈투성이의 안주 때문에 기분이 잡쳤다면? 생각 없이 걸치는 한 잔 술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권리를 달라~ 달라~

3개월 전 압구정 로데오에 문을 연 루이쌍끄는 프렌치 가스트로 펍이다. 가게 문을 여는 시간은 오후 5시. 저녁을 먹기 위해 들른 손님들은 트뤼플 향의 버섯 볶음과 통후추가 알알이 박힌 스테이크를 시켜 배를 채운다.

어느덧 저녁 9시가 되어 사위가 깜깜해지면 모던 샹송은 라운지 음악으로 바뀌고 와인과 맥주가 돌기 시작한다. 메뉴 중 절반이나 차지하고 있는 안주 목록에는 트뤼플 오일로 맛을 낸 양송이 슬라이스, 수제 푸아그라 비네그렛, 붉은 참치살 야채 볶음 등이 올라와 있다.

"영국에 흔히 있는 펍에 파인 다이닝을 접목한 가스트로 펍이에요."

영국식 술집인 펍에 고급 레스토랑 음식을 같이 파는 가스트로 펍은 최근 뉴욕과 런던에서 대유행 중이다. 뉴욕식은 술집답게 왁자지껄한 맛이 있지만 루이쌍끄는 그보다는 살짝 정돈된 분위기로, 포근한 담요가 걸쳐진 의자에 앉아 칠판에 손 글씨로 써놓은 메뉴를 보며 새벽 1시까지 저렴한 하우스 와인과 맥주를 마실 수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을 돌며 경력을 쌓은 이유석, 김모아 셰프는 계란을 오븐에서 저온조리해 공처럼 아주 동그랗게 만든 수란이나 5kg짜리 질 좋은 도미를 구워 만든 방게 소스 도미 구이를 선보인다.

닭, 돼지, 소, 3종류의 고기로 우린 육수로 끓인 양파 스프는 하루에 7인분 정도만 만들며, 그나마도 맛이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버리기 때문에 이를 맛볼 수 있는 손님은 일일 5명 정도다. 밤 10시 이후에는 와인 콜키지가 5000원, 월요일은 쉰다.

독도 꽃새우로 만든 파스타
정통 트라토리아, 그라노

손님들의 수다와 주방장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가득 찬 동네 음식점. 이탈리아의 대중 식당 트라토리아는 주민들의 향수가 고여 있는 추억의 장소다.

통후추 스테이크
산티노 소르티노 셰프가 지난 6월 압구정동에 연 그라노는 정통 트라토리아를 표방한다. 캐주얼한 공간, 격 없이 수다를 떠는 서버와 고객, 여기에 멧돼지도 상대할 정도로 위풍당당한 풍채에 천둥 같은 소리로 웃는 셰프를 보고 있으면 정말로 이탈리아의 한 동네 식당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라노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이탈리안 셰프가 만드는 오리지널 남부 이탈리아 음식. 9년 전 한국에 온 이래 한 번도 레서피에 있어서 타협한 적이 없는 그는 최근 한국 식재료에 반해 통영과 거제도, 제주도를 오가며 제일 좋은 재료들을 공수해 음식에 반영하고 있다.

"한국의 해산물은 정말 최고다. 제주 흑돼지는 말할 것도 없고 멧돼지와 시금치도 훌륭하다."

제주 흑돼지로 만든 미트볼과 독도 꽃새우를 넣은 파스타, 제주도 말고기를 곁들인 전채 요리는 그 결과물이다. 소르티노 셰프는 지난 1월 식당 지하에 스테이크를 전문으로 하는 그라노 더 그릴을 열면서 점심 메뉴로 햄버거를 시작했다.

자유롭고 펀(fun)한 식당 분위기에 맞게 '이탈리안 잡'이라는 이름을 붙인 햄버거는 전남 나주 A++급 한우를 갈아 만든 패티에 고르곤 졸라 치즈를 넣어 고소하고 촉촉한 맛이 일품이다.

주방은 저녁 10시 반에 마감하지만 그 이후로는 와인을 마시는 손님들이 몰려든다. 손님이 집에 가는 시간이 곧 문 닫는 시간으로, 매일매일 한 가지 와인을 대폭 할인해주는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