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인들, 사회 안전망 확보 위한 연대 행동 나서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권익 개선과 복지 향상을 위한 '공연예술인 경력인정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한 강지영 씨(가명)는 졸업을 앞두고 뮤지컬 작품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프리랜서로서 소규모 무용단과 계약해 거의 없다시피한 보수를 받으며 고된 생활을 하느니, 안무도 하고 연기와 노래도 하며 '상대적으로' 많은 계약금을 받을 수 있는 뮤지컬 세계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동안 세 편의 작품을 하며 그가 받은 돈은 5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원래 책정된 금액도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작사는 공연이 끝날 때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어기거나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액수를 깎기 일쑤였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강 씨는 다시 무용 전공 학생들을 상대로 레슨을 시작했고, 난방도 안 되는 스튜디오에서 추위를 견뎌가며 카탈로그 모델 일로 돈을 벌었다. 그러나 몸을 지나치게 혹사시킨 결과, 그에게 남은 건 배우로서의 경력이 아닌 각종 부상과 우울증, 만성피로뿐이었다.

예술가의 가난한 삶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요즘 공연예술계에 입문한 젊은 지망생들 중 입신양명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무작정 뛰어드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이들은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낭만적인 예술관을 갖는 대신, 보다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안정적인 창작 활동을 위한 경제 활동을 따로 지속하고 있다.

# 대학원에서 극작을 전공하고 있는 이미정 씨는 주중에 10~12시간 정도의 과외수업을 하고, 주말에는 관광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얻는 수입은 150만 원 정도. 반면 글쓰기로 인한 수입은 일 년에 100만 원도 안 되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이름 있는 작가라면 모를까, 글쓰기로 인한 수입만을 기대하며 창작 활동을 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공동위원장을 맡은 박정렬 서울연극협회장과 이종일 한국무대감독협회 부이사장
이처럼 주객이 전도된 상황에서 그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선택할 때 우선적으로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되는 일인가를 고려한다. 다른 예술가들에 비하면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편이지만, 이렇게 사는 한 앞으로 안정적인 인생계획을 세우기가 어려운 것은 이 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씨는 "예술가 집단에 국한되는 특별한 정책보다는 예술가 집단을 포함해 노인, 미성년자, 병자, 장애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는 사회적 안전망 확보가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공연예술인도 일반인 대우해 달라

얼마 전 서울 종로구 동숭동 아르코예술극장에서는 이런 사회적 안전망 확보를 위해 공연예술인들이 모여 눈길을 끌었다. 문화예술계 종사자들의 권익개선과 복지향상을 위한 '공연예술인 권익 공동대책위원회'(위원장 박동순·박장렬·이종일)를 통해 공연예술인들이 연대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서울연극협회와 한국무대감독협회, 무대예술전문인협회, 한국뮤지컬협회, 한국조명가협회, 한국배우협회, 한국소극장협회, 한국연극연출가협회, 한국프로듀서협회 등 11개 단체가 참여한 이날 회견에서 공대위는 성명을 통해 "고양문화재단 해고자 5명의 복직과 공연예술인들의 경력 인정 법제화, 공연예술인 복지를 위한 예술인 복지법 입법"을 촉구했다.

민주당 최종원 의원
이번 공대위의 출범은 지난해 12월 고양문화재단의 정규직 공연예술인 5명이 프리랜서 활동 경력을 인정받지 못해 부당해고되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시작됐다. 고양문화재단 직원 5명은 지난해 12월 '입사 당시 4대 보험이 보장되지 않은 경력이 포함돼 있었다'는 총리실의 감찰로 인해 해고 처분을 받았다. 이에 직원들은 경기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를 했고 지난 2월 9일 부당해고 구제신청이 받아들여졌다.

공대위의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종일 한국무대감독협회 부이사장은 "배우와 스태프 등 공연예술인 대부분이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4대 보험 가입이 고정 급여를 기준으로 결정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하며 "예술인의 경력을 데이터베이스로 관리하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번 공대위 출범을 통해 그동안 배우나 연출가, 작가 못지않게 어려운 생활을 해온 무대감독들의 열악한 여건도 밝혀져 관심을 모았다. 이 부이사장은 "몇몇 대형 라이센스 뮤지컬의 무대감독들은 기본적으로 생활이 되겠지만, 이들 몇 명을 제외한 대다수의 무대감독들은 정확한 임금 기준도 없어 제작사에서 주는 소액 임금으로 연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크게 메인 그룹과 어시스턴트 그룹으로 우리가 가이드라인을 정해 제작사에 제시하면서 합리적인 임금 기준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공동위원장을 맡은 박장렬 서울연극협회 회장은 "이번 사건을 발단으로 앞으로 '예술인 복지법' 통과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라고 계획을 밝혔다. 박 회장은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연극인들의 복지 여건 개선을 위해 여러 극장들이 연대해 자체 운영하는 통합발권 시스템을 만드는 한편, 공연예술인들을 위한 협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회견에 참석한 연극인 최종원 민주당의원도 "앞으로 지자체의 보조를 통해 예술인공제회를 활성화하고 4대 보험과 관련한 '예술인 복지법'을 수정해 정기국회에 통과시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동안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출현했던 예술가의 복지문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화두에 올랐다. 하지만 이런 담론들이 현실화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고, 현실화된다고 해도 그 제도가 얼마나 예술계의 가난을 구석구석 해소해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이 외치는 것은 예술가'만을' 위한 특별법이 아닌, 예술가'도' 보호해줄 수 있는 안전망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약자로서 차별받아 온 문화예술인들의 외침은 그래서 더 처절하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