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갤러리] 서용선 개인전 학고채갤러리 4월 10일까지

23st 출구, 2010
미국 뉴욕, 호주 멜버른, 독일 베를린…. 유서 깊은 도시들의 풍경이지만 한눈에 지명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다. 랜드마크보다는 생활공간, 사건보다는 공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얼굴은 뚜렷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스쳐 가거나, 잠깐 멈추었거나, 기다리고 있다. 서용선 작가의 투박한 터치는 자세한 사연을 묻지 않는다. 도시인의 일상이 박물관의 나비 표본처럼 포착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스쳐 가거나, 잠깐 멈추었거나,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알 것 같다. 같은 도시인이어서일까.

익명의 공간일수록 사람들은 제각각 본다. 관광객이 신기한 풍물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동안 문화인류학자는 경관에 새겨진 습성을 읽을 것이고, 시인은 기어코 사랑의 흔적을 찾아낼 것이다. 서용선 작가는 교환교수로 머물렀던 도시들에서 도시 그 자체와 마주쳤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룩되고 변화하고 적응하고 저항한 문명의 집약으로서의 도시, 혹은 그런 특정한 삶의 방식.

서용선 작가는 뉴욕 지하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하철은 사람의 몸에 흐르는 핏줄과 같다. 도시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는 피의 흐름 속에는 역시 사람들이 있다. 도시인 모두는 쇠로 만든 지하철을 기다린다. 다음 장소로 옮겨 가기 위해, 쇠로 무장한 힘의 속도 속에 우리의 감각을 밀어 넣는다.” 지하철에 ‘실린’ 우리의 몸은 정해진 철로를 따라, 주어진 시간표대로, 햇볕 한 줌 쬐지 못한 채 숨 가쁘게 순환한다. 그것이 도시적 삶이다. 서용선 작가가 그린 지하철 연작 속에서 뉴욕 사람들은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소용돌이에 시간을 맡긴 것처럼 보인다. 우리라고 다른가.

그래도 사람들은 도시의 경계에서 저마다 성을 쌓고, 틈을 낸다. 서용선 화가의 눈은 종종 비주류적 삶에 닿는다. 히스패닉의 식당을 기웃거리고, 철조망 너머로 인간의 남루한 숙소를 들여다보는 개를 그린다. 자신을 투영한 것일까. 옆에 폭탄이 떨어지더라도 결코 붓을 놓을 것 같지 않은, 결연한 형체의 ‘그림 그리는 남자’가 누구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들여다보는 개, 2010
정영목 서울대 교수는 이 작품들에 대해 “지극히 심화된 자본주의의 진면목을 지닌 뉴욕 맨하탄,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등 역사적 도시 공간의 정치성을 그렸다”고 평했다. 단지 정치적 공간을 주시했다는 점을 넘어, 자신의 삶의 실체와 조건을 치열하게 고뇌했다는 점에서 서용선 작가의 <시선의 정치>는 뼛속까지 정치적이다.

<시선의 정치> 전은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학고재갤러리에서 4월10일까지 열린다. 정영목 교수가 20여 년간 서용선 작가의 작품세계에 대해 쓴 글을 엮은 <시선의 정치-서용선의 작품세계>도 함께 출간됐다. 02-720-1524~6


14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2010
그림 그리는 남자 1, 2010
케이크 고르는 남자, 2010
남미계 식당, 2010
스왓슨 거리 1,2010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