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브랜드 런칭, '통영 12공방' 전 등 현대적 가능성 확인선순환 유통구조 만들고, 장인 발굴 육성 위한 교육 프로그램 필요

<한다(韓多)-한다 공예 브랜드>전
"쓰고 버리고, 쓰고 버리고... 소비 주기가 짧아지면서 물건들이 수명도 단축되고 있죠. 덩달아 디자인이 기능할 수 있는 일상 속 자리도 좁아지고 있어요. 이런 삶이 맞는 걸까요? 손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오래 사귀며 사용했던 전통공예는 이 시대의 소비 패턴을 반성하게 합니다."

전통문화의 모티프를 적극적으로 다루어온 디자이너 마영범은 요즘 전통공예에서 '디자인이 없는 시대'의 갈피를 잡고 있다. 디자인이 화두로 떠올랐지만 정작 인간과 교류하는 디자인은 없어진 시대, 전통공예품에 배어 있는 손맛과 생활의 켜는 길 잃은 디자이너에게 지침이 된다.

디자이너뿐이랴. 디자인과 더불어 사는 현대인 모두에게 전통공예는 가르침을 줄 수 있다.

일본 디자이너 기타 도시유키는 <디자인 미래를 바꾸는 전통의 힘>에서 전통공예의 정신과 감성이 "편리한 일회용을 대체할 긍정적이고 가까운 미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만든 사람의 뚝심, 사용한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쌓여 발전된 기능, 자연과 함께 한 생활 방식 등이 현대 사회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통공예를 다양하게 되살리는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현재에 대한 반성과 미래에 대한 제안을 함께 담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월드 IT쇼 2010에 전시된 김기호의 금박 아이폰 케이스(사진제공 한구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월드 IT쇼 2010에 전시된 최종관의 채화칠 아이폰 케이스(사진제공 한구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담뱃갑으로 간 나전, 아이폰 케이스로 간 자수

올해 초 KT&G에서 출시된 프리미엄급 담배 에쎄 골드리프는 특별한 담뱃갑 디자인으로 화제를 모았다. 박재성 나전칠기 명장이 나전 기법으로 만든 소나무 문양을 담뱃갑에 넣은 것.

작년 열린 '월드 IT쇼 2010'의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전시관에서는 자수와 자개, 금박과 한지 등을 소재로 한 아이폰 케이스들이 선보였다. 전통공예 작가들이 만든 이 작품들은 아이폰이라는 최첨단 기기에 전통공예를 덧입히는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오늘의 물건에 적절히 적용된 전통공예는 전통공예가 따분하다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깬다. 나전과 자수 등 옛 여인들의 방과 옷차림을 장식했던 기법들은 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어떤 접목은 파격적이다. 작년 전주한지문화축제에는 한지드레스가 등장해 한지를 붓글씨 쓰는 종이로만 알고 있던 많은 관객을 놀랬다. 한지 특유의 차분한 결이 살아 있는 드레스는 당장 입어보고 싶을 만큼 탐났다.

작년 전주한지문화축제에 전시된 한지드레스
패션교육기관 에스모드 학생들의 실험적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는 뜬금없는 상상력의 결과가 아니다. 한지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옷감은 물론 건축 내장재로 쓸 수 있을 만큼 질기고 튼튼해진다. 한지 갑옷이 있었을 정도다. 전통공예와 현대적 디자인의 만남이 옛 것에 대해 아는 만큼 다채로워질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공예 장인과 디자이너의 만남

최근 몇 년 사이 현대화된 전통공예 사례가 낯설지 않게 된 데에는 지자체가 주도한 사업들이 한몫 했다. 전통을 보존하는 동시에 지역 경제와 문화를 활성화하는 취지의 디자인 프로젝트들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전주시가 대표적이다. 전주시는 한지산업지원센터를 운영하고 매년 5월 전주한지문화축제를 여는 등 한지문화를 다각적으로 조명·전파해 왔다. 한지를 소재로 한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에 투자하기도 했다. 올해 초에는 덴마크 주재 한국대사관을 한지로 리모델링했다. 무형문화재 김재중의 전통문살을 활용해 한국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전주 무형문화재와 디자이너의 협업을 주선해 명품공예브랜드 '온Onn'을 런칭하기도 했다. 소목장 조석진, 악기장 고수환, 한지발장 유배근 등의 공예 장인이 이상철, 김백선 아트디렉터와 함께 가구, 악기, 생활용품 등 다양한 품목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전주한지로 리모델링한 덴마크 주재 한국대사관
통영시 역시 전통공예 기반을 바탕으로 3년 동안 공예 장인과 디자이너의 협업 프로젝트 '통영12공방'을 진행했다. 통영은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어 각종 군수물자와 생활용품을 조달했고, 덕분에 공예가 발전할 수 있었다.

나전칠기를 비롯한 소목, 주석, 칠 등을 담당하는 12공방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이다. 작년 무형문화재 나전장 송방웅과 박재성, 두석장 김극천, 염장 조대용 등과 마영범 디자이너가 협업한 결과물은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선보인 박재성 장인의 TV 수납장은 신비로운 자개 문양과 리모컨을 누르면 TV가 수납장 안으로 들어가는 기발한 기능으로 주목받았다.

마영범 디자이너는 이 경험을 살려 6명의 공예 장인과 6명의 디자이너를 매칭해 화장품 브랜드 설화수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한 설화문화전 <수작(手作)>을 꾸리기도 했다. 나전장 송방웅의 화장품함에는 디자이너가 제안한 새로운 방식이 적용됐다.

원래 목판에 붙이는 자개를 금속판에 붙이고 레이저로 잘라 모양을 낸 후 나무통에 씌운 것. 완성된 작품은 자개의 영롱함을 단정하고도 세련되게 품어냈다.

2010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전시된 '통영12공방' 작품 중 자전장 박재성의 TV수납장
전통공예의 현대화 과제

하지만 한계도 있다. 전통공예의 현대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실제 대중적 수요를 이끌어낸 프로젝트는 드물다. 생활 속에서 쓰일 수 없는 공예품은 디자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기껏 탈바꿈한 공예품들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유통 구조와 소비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예 장인은 물론 지자체도 안정적 수익 구조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경험이 부족하고 시장을 개척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통영12공방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통영시청 방현화는 "프로젝트를 통해 생산된 공예품은 고가였기 때문에 지역 내에서 판로를 확보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마영범 디자이너는 "전통공예를 현대적으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곧 팔리도록 만들겠다는 의미인데 지자체들이 유통 시스템을 마련하는 데 미숙했다"고 말했다.

전통공예의 생산·소비 저변을 넓히려면 보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연구 사업도 그 중 하나다. 서울디자인센터 디자인연구개발팀 김유진 선임연구원은 디자이너는 물론 소재 개발자, 판매자 등 디자인 산업 관련 종사자들이 쉽게 접근해 활용할 수 있도록 전통공예를 디자인 자원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통공예가 대중적으로 순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설화문화전 <수작(手作)>에 전시된 나전장 송방웅의 설화문 화장품함
공예 작가, 장인을 발굴·육성하는 교육 프로그램도 중요하다. 몇몇 명장을 중심으로 한 지원 사업으로는 전통공예를 지속시킬 수 없다.

작년 한국공예문화진흥원과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이 합쳐져 탄생한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공예와 디자인을 융합할 수 있는 인력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커리큘럼은 공예와 디자인의 관계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에서부터 전통공예의 브랜드화 전략까지 포함한다. 작년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된 첫 교육 프로그램에는 전국 24개 대학의 공예·디자인 전공 학생 300여 명이 참여했다.

무엇을 변형하고 무엇을 살릴 것인가

소재와 기법, 모양과 용도와 정신…. 전통공예의 어떤 요소를 보존하고 어떤 요소를 시대에 맞춰 변형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전승해야 할 전통에 대한 기준과 맞닿아 있다. 마영범 디자이너는 "공예품을 매개로 이어지는 무형의 가치"를 강조했다. 여러 세대를 거친 공예에는 절로 깊은 지혜와 사연이 깃들게 마련이다. 때론 그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도 현대 디자인의 몫이다.

<한다(韓多)>전에 전시된 서천부채장 이광구의 공작선
3월 5일부터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위치한 논밭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다(韓多)-한산 공예 브랜드>는 한산 공예품을 내세우지만, 사실 천 년 된 한산 오일장과 그곳을 둘러싼 삶에 대한 전시다.

충남무형문화재 서천부채장 이광구의 공작선에서는 정교한 솜씨는 물론,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장인의 세월을 넘는 성실함이 묻어난다. 짚풀로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한상도 장인의 짚풀 주전자와 새집은 재치 있고, 3대째 대장간을 이어오는 김창남 장인의 미니 도끼에는 손자를 기원하는 시부모가 며느리 허리춤에 슬쩍 꽂아주었다는 민담이 전해진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를 통한 전통시장 활성화 시범사업(문전성시)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 프로젝트는 공예인과 공예품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생활 공간으로서의 시장의 가치를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주관인 (사)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와 쌈지농부의 작가팀은 8명의 지역 공예 작가, 장인을 대상으로 물건 자체는 물론 포장, 마케팅에 대한 디자인 컨설팅을 했고, 이를 통해 탄생한 물건들에 '한산의 다양한 문화 가치'를 뜻하는 '한다'라는 브랜드를 달았다. 짚풀 컵 홀더와 솟대 오르골, 천연염색된 모시 머리핀 등 '경쟁력' 있는 품목들이 추가됐다.

현대화 제안에 심사숙고한 이광구 장인도 공작선의 크기를 줄이고 손잡이를 간소화한 후 가격을 낮춰 출시했다.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유통·마케팅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앞날을 지켜볼만 하다. 전시를 통한 판매가 끝이 아니다. 한다 브랜드는 앞으로 한산장터의 상설판매장과 쌈지농부의 유통망을 통해 소비자들을 만날 계획.

브랜드 운영은 장기적으로 공예인들 자신에게 맡겨질 예정이다. 프로젝트의 목적 중 하나가 전통공예의 자생력을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다움문화예술기획연구회의 추미경 상임이사는 "공예인들이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 주는 소비자를 만나면서 점점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보았다"며 이런 활기가 지역 문화 활성화로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다 브랜드의 소비자들은 장인의 자부심과 열정까지 가져가게 되는 셈이다.

전통공예를 살리는 디자인 프로젝트는 이처럼 잊혔던 생산자와 소비자 간 관계까지 회복시키기도 한다. 이는 지극히 현대적인, 익명의 거래의 폐해를 줄이는 대안인지도 모른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들에 대해 우리는 애정을 갖지 못한다. 헤프게 놀리고 함부로 버린다. 하지만 사람이 깃든 물건에는 마음을 쓰게 된다. 만든 이의 정성과 상상력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겨우 물건 하나로 누군가의 삶의 중요한 부분과 만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전통공예가 오늘날 디자인에 일깨워주는 바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