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디자인센터 김유진 선임연구원장인 정신 등 한국적 디자인 자원 정리… 형태가 아닌 정신을 이어 받아야

"전통공예 장인들에게는 체화되어 있는 조형 의식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소재를 담백하게 다루는 미적 기준, 비례에 대한 감각 같은 거죠. 한국적 풍토에서 태어나고 축적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유전적인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어요. 장인들의 공통된 정신 세계를 추출해내면 한국적 디자인의 가닥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재)서울디자인센터 디자인연구개발팀 김유진 선임연구원의 올해 과제는 전통공예에 전해 내려오는 한국적 디자인의 자원을 정리하는 것이다. 전통공예의 소재와 기법을 젊은 디자이너들이 가까이 활용할 수 있게 가공해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목표. 이를 통해 이어지길 바라는 것은 고정된 형태의 공예품이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통찰력과 창의력이다.

역사 속에서 정제된 전통공예는 디자인의 가치가 수식이 아닌 구실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눈을 끌기 때문이 아니라 사용자의 생활을 돋우기 때문에 아름답다. 김유진 연구원이 전통공예의 소재와 기법에서 발견한 것은 환경, 사람과 교감한 흔적이었다.

"조선시대의 목가구는 선비의 품성을 담고 있습니다. 학문과 예술을 동시에 추구하고, 풍류를 즐기면서도 검소한 선비의 생활 그 자체죠. 예를 들면 사랑방 가구는 나이테가 화려하지 않은 나무로 만들었어요. 공부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죠. 반면 안방 가구는 나전칠기 등 화려한 기법을 썼어요."

그래서 전통공예는 디자인의 무궁무진한 금광이다. 오늘날 디자인이 만드는 이의 손맛과 사용하는 이의 소박한 일상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전통공예의 교훈은 더욱 귀하다. 3월 8일 김유진 연구원을 만나 채굴의 의의를 물었다.

전통공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디자인 연구자로서 소재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역성과 문화를 담고 있는 전통소재에 눈을 돌리게 됐다. 일본 디자인은 전통공예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젠스타일로 유명한데 우리에게도 축적된 디자인 자산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009년부터 전통공예 자원을 수집하는 중이다. 풍부한 기법과 미적 가치, 표현들을 접하며 현대 디자인을 보는 눈도 다양해졌다.

지금까지 전통공예의 가치는 명장의 특정 작품의 가치로 인식됐다. 접근 방식이 좀 다른 것 같은데.

디자인은 당대의 생활세계와 맞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 우리가 전통공예에서 이어나가야 하는 것은 정신이지 고정된 형태가 아니다. 전통공예를 보존하고 재현하는 것은 박물관의 일이다. 모던한 아파트에 투박한 조선시대 가구를 가져다 놓을 수는 없지 않나.

디자인 자원화하려는 장인의 정신 세계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면.

전주명품공예브랜드 온 Onn의 '심재心齋2'(디자인 김백선, 작가 조석진, 사진제공 (사)천년전주명품사업단)
한국의 장인들은 특유의 조형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소재 자체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내고, 화려함보다는 단순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향한다. 한옥의 서까래를 예로 들 수 있다.

일본에서는 나무를 반듯하게 켜는 반면, 한국에서는 나무를 그대로 서까래로 올린다. 나무 자체의 형태를 살리는 것이다. 이런 미적 감각이 틀에 갇히지 않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디자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공예의 가치를 현대적 디자인으로 잘 재해석한 사례를 들어준다면.

무형문화재와 디자이너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지는 전주시의 공예명품 브랜드 '온Onn'에서 선보인 목가구들은 못과 망치 없이 나무를 짜는 결구 기법 등 전통 기법을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공간에 아름답게 어울린다.

김백선 디자이너와 소목장 조석진의 협업이다. 1984년 LG하우시스가 출시했던 민속장판도 좋은 예다. 전통 한지의 색과 질감을 구현하면서도 서구식 주거 공간에 편리하게 시공할 수 있는 제품이어서 호응이 컸다.

전주명품공예브랜드 온 Onn의 '연然3'(디자인 김백선, 작가 조석진, 사진제공 (사)천년전주명품 사업단)
제대로 발굴해 대중화시켜보고 싶은 전통공예 기법이 있다면.

목가구의 '목리(나뭇결)'를 두드러지게 하는 낙동기법이다. 오동나무를 얇게 켠 후 표면을 살짝 지지고 지푸라기로 뭉개어 털어내면 나이테가 또렷해진다. 옻칠이 천 년 갈 때 만 년 간다는 황칠도 되살려보고 싶다.

중국 자금성에 쓰인 기법이다. 한국에서는 황칠나무가 주로 남도 지방에서 났는데, 조선시대에 왕실의 조공 요구가 너무 심하자 사람들이 일부러 베어버렸다고 한다.

최근 지자체의 전통공예 현대화 사업이 활발한데 긍정적인가. 한계는 없나.

전통공예에는 지역성이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지자체가 나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예를 들면 강진의 도자기는 지역의 좋은 흙 때문에 발달했다. 하지만 전통공예의 현대적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에만 그치면 안 된다.

그것이 대중적으로 팔리고, 장인이 수혜자가 되는 순환 구조가 있어야 한다.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올해 진행하는 전통공예 디자인 자원화 사업도 전통공예의 합리적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사업에 참여하는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소양은 무엇일까.

한국적인 것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으면 한다. 이탈리아 등 전통공예 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공예와 디자인 사이의 경계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한국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적 디자인 개념을 받아들였고 경제적 논리로 산업화를 추진하는 바람에 공예와 디자인이 구별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디자인은 공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식했으면 한다. 또 전통적 가치와 현대적 가치 간 균형을 잘 잡아야 할 것 같다.

시대 정신을 얼마나 잘 읽어내느냐가 디자인을 좌우한다. 전통공예의 어떤 기법과 소재가 오늘날 일상 속에서 유용하게 쓰일지 발견하는 눈을 가지면 좋겠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