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그닷 김진화 대표5월 20일 팀 독립 디자이너와 소비자 연결하고 오픈 마켓 열어

지속 가능한 패션에 막 눈을 뜬 당신이라면 유기농 청바지에서부터 썩는 운동화, 낙하산 드레스까지 다양한 선택권을 가진 해외 시민들이 부러울 테지만, 부러워하지만은 말자.

한국에서도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는 움직임이 있다. 여기 동참하는 것이 해외의 윤리적 패션 브랜드 제품을 사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다. 얼리 어답터로서의 즐거움은 덤이다.

한국에서 패스트 패션의 거대한 흐름을 거슬러 지속 가능한 패션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패션 산업의 틀을 바꾸고, 패션과 사회의 관계를 넓히고, 건강하게 패션 생활하는 모험가이자 살림꾼들이다. 한 수 배우고, 청출어람하자.

“뉴욕 패션계가 부러워하는, 한국 패션의 오래된 미래.”

최근 오르그닷 사이트(www.orgdotshop,net)에 재미있는 글 하나가 올라 왔다. 뉴욕의 한 패션 전문가가 80년대 한국의 봉제산업에 대해 회고한 내용으로 숙련된 봉제 기술, 재봉사와 보조의 협업 구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소규모 라인 시스템은 봉제의 질과 속도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덫이었다. 재봉사는 보조의 도움을 받아 정교한 수작업을 빠르게 해냈다.

오르그닷의 SK Wyverns 그린유니폼. 페트병을 재활용한 재생폴리에스테르 원단으로 만들었다
“패션이 발달한 도시에는 독립 디자이너와 봉제 산업의 클러스터가 잘 형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점점 붕괴해가는 추세죠. 80년대 한국에도 이런 혁신적인 시스템이 있었어요. 지금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건강한 형태로 되살린다면 분명히 한국 패션의 자산이 될 겁니다.”

친환경 소재는 오르그닷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패션의 일부일 뿐이다. 봉제 산업의 기반을 닦고 디자이너와의 네트워킹을 강화하는 인프라 구축은 한국 패션의 미래를 다지는 작업이다.

작년까지 주로 기업들을 대상으로 친환경 단체복과 가방 등을 공급해온 오르그닷은 올해 본격적으로 소비자들과의 소통을 시작한다.

5월에 20여 팀의 독립 디자이너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오픈마켓을 연다. 기성품을 일방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기획과 샘플 제작 단계에서부터 소비자가 참여하는 방식으로 제품을 제작한다.

소비자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고, 독립 디자이너와 봉제산업은 일할 기회와 공정한 대가를 얻을 수 있는 ‘클라우드 소싱(인터넷을 기반으로 적합한 인력을 모집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업 모델)’이다.

“디자이너들과는 친환경적 가치만 공유합니다. 친환경 소재를 일정 비율 이상 써야 한다는 점 외에는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습니다. 각자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제조·유통의 인프라로 뒷받침할 겁니다.”

패션이 지속 가능하기 위해서는 룰을 바꾸어야 한다. “5월 이후에는 기존 시스템에서 나올 수 없는 디자인을 보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김진화 대표를 만났다.

세계적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이 화두인 데 비해 한국 패션업계에서는 그런 움직임이 미미한 것 같다.

“패션업계 스스로 장기적 안목을 갖기는 어렵다. 주주자본주의 이후 기업들은 단기적 수익에 목을 매고 있지 않나. 10년 후를 내다봐야 하는 건 학계다. 미국이나 영국에서도 학계가 장기적 전망을 제시하면 업계가 동참하는 식으로 지속 가능한 패션 논의가 확산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학계도 그런 역할을 못하는 것 같다.”

지속 가능한 패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비 문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내 생각엔 변화의 조짐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시장이 지속 가능한 패션과 관련한 선택지를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했다.”

한국 패션 시장이 몇 년 안에 SPA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로 양분될 거란 예측도 있는데.

“패션 시장은 그렇게 과점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글로벌 SPA 브랜드 중 1위인 자라도 패션 시장의 1.5%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SPA 브랜드와 럭셔리 브랜드 사이에서 다양한 독립 디자이너들이 활동하게 될 것이다. 유니클로에서 가장 잘 팔리는 품목이 이너웨어라는 사실이 증명하듯, 누구도 남들과 같은 재킷을 입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르그닷의 오픈마켓은 새로운 사업 모델이다. 의의가 뭔가.

“한국에서는 독립 디자이너가 활동할 수 있는 클러스터가 해체된 상황이다. 봉제산업이 사라지고 있어서 어디서 팔아야 할까, 이전에 어디서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할 정도다. 제조 인프라만 확보되면 젊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질이 높아질 것이다.

완성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와 소비자의 소통을 통해 제품이 완성되어 간다는 점도 중요하다. 소비자가 자신의 기호를 반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요에 맞춰 공급하기 때문에 재고가 최소화된다. 그 자체가 친환경적이다.”

가격이 비싸지는 않을까.

“디자이너들이 소재를 공동구매할 수 있고, 유통 단계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가격도 합리적일 것이다.”

봉제 기술자들은 어떻게 확보했나.

“많이 없어졌지만, 아직 봉제 공장들이 남아 있다. 80년대 활동하셨던 분들 중에도 아직 현장에 계신 분들이 있다. 지난 2년간 이런 인력을 찾아냈다. 패션 디자인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봉제 기술자와 디자이너가 모두 필요하다. 둘 다 갖춘 국가가 거의 없는데, 한국에는 훌륭한 인력이 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속 가능한 패션 시스템을 위해 정부가 지원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봉제 기술자를 지원하고 뒤를 이을 사람을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의 경우 몇 년째 자국내 봉제산업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일자리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많은 젊은이들이 봉제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프로젝트를 맡겨준다면 잘 해낼 수 있다.(웃음)”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