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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와 스크린에 비친 경계인

[이 시대 경계인을 말하다]
'The Author', '백년, 바람의 동료들' 등 기획 연극 시리즈로
  • 정의신 작.연출의 '야끼니꾸 드래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준은 의외로 간단하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자'이고 관객은 '객석에서 공연을 보는 자'다.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한국인'에 대한 정의도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하지만 실제로 이 같은 명제를 충족시키지 않는 사례가 존재할 때, 이들의 정체성에는 의문이 생긴다. 무대 없이 객석만 있는 작품에서는 배우가 없고 관객들만 남는다. 한국 국적을 가졌지만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처럼 획일적인 기준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있다. 이때 우리는 이들을 '경계인'이라고 부른다.

예술과 현실 사이의 새로운 경계에 주목하다

공연이 진행 중인 어두컴컴한 극장 안. 하지만 무대 위의 배우가 뜨거운 에너지를 내뿜으면 객석의 관객이 그것을 수용하는 일반적인 관람의 모습은 없다. 양쪽의 객석이 마주 보고 있는 상태에서 객석에 앉은 관객들은 건너편의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기도 하고 대답을 하기도 한다. 배우는 어디로 갔을까. 이 이상한 대화를 과연 연극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최양일 감독의 '피와 뼈'
매년 기획 연극 시리즈를 선보인 두산아트센터가 다음달 선보일 '경계인 시리즈' 중 의 한 장면이다. 영국의 극작가 팀 크라우치가 2009년 초연한 이 연극은 현실과 연극의 경계를 초월한다는 설정으로, 무대 자리에 객석을 만들어 배우와 관객이 마주보는 형태로 공연을 진행한다.

이 형식파괴적인 실험을 통해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뭘까. 연출을 맡은 김동현 연출가는 "대개의 연극은 환상과 현실이 상호침투하는 과정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경계 위에 선 사람들이 경계를 지워나가는 과정을 담는다. 즉 '연극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묻는 연극인 셈"이라고 말한다.

이 점에서 서로가 얼굴을 맞댄 채 진행되는 이 연극은 기존의 관람 형태처럼 관객이 일방적으로 배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울처럼 관객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작품이다. 배우가 주도하는 연극에서 관객의 역할은 무엇일까. 이처럼 관객이 스스로의 역할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는 낯설지만 의미 있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김동현 연출가는 "이 작품에서 '작가'의 마지막 대사가 '글이 작가를 떠나고 있습니다'인데, 이는 '연극이 무엇인가'에 대해 해답을 내놓는 게 아니라 관객과 그 질문을 공유하자는 것"이라며 수동적 존재였던 관객을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설명한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가속 속에 현대사회의 경계는 갈수록 희미해지고 이질적인 것들이 혼재된 채 공존하는 상황이 됐다. 기술적 부분에서 공통점을 지닌 과학과 예술은 통섭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뭉치고, 국제결혼을 통한 다문화사회의 도래는 확고했던 사회적 정체성에 균열을 일으키며 경계에 놓인 개인에 주목하게 한다.

  • 장률 감독의 '두만강'
김요안 PD는 "두산아트센터가 진행하고 있는 기획 연극 시리즈는 이런 흐름에 예민하게 대처한 결과다. 2009년의 '과학연극 시리즈'는 과학과 예술의 경계에 관한 조명이었고, 지난해 '인인인 시리즈' 역시 문화적, 사회적 경계를 벗어나고 있는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무대 위로 압축된 재일교포들의 삶과 애환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 아닌 이들은 한국에서는 한국인 대우를 못 받고 한국 밖에서는 한국인으로 취급받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다.

'경계인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역시 이처럼 '이도 저도' 아닌 경계의 사람들을 다룬다. 최근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신주쿠양산박의 신작 <백년, 바람의 동료들>이 그것이다. <인어전설>, <소녀도시로부터의 메아리> 이후 얼마 전 공연된 <도라지>, <해바라기의 관>까지 재일교포의 정체성 문제를 꾸준하게 파헤쳐왔던 김수진 연출가는 이번엔 재일 음악가 조박의 노래 '백년절'을 모티프로 재일교포들의 지난 100년을 담았다.

"조박의 '백년절'은 한국 노래 '한오백년' 같다"고 표현하는 김수진 연출가는 "일본에서 3세대나 살았지만 (재일교포에 대한 처우는) 변화가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지만 "그래도 즐겁고 힘차게 살고 있는 재일교포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현재 전주대에서 강의 중인 그는 한국 학생들과 함께 경계의 문화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계획이다.

  • 강미자 감독의 '푸른 강은 흘러라'
한편 술집을 배경으로 힘들고 어두운 현실을 유머러스한 감성으로 그리는 <백년, 바람의 동료들>은 2008년 최고작이었던 <야끼니꾸 드래곤>을 연상시킨다. 지난주까지 예술의 전당에서 재공연되기도 했던 이 작품은 재일교포 작가인 정의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투영한 작품이다.

재일교포 1세대와 그들의 자식들인 2세대, 그리고 이들이 운영하는 곱창구이 가게를 드나드는 재일교포들과 일본인 손님들 사이에서 오가는 변화무쌍한 한국어와 일본어의 교차는 이들의 경계적 정체성을 그대로 대변한다.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변두리 골목에 자리잡은 곱창구이집은 일본 사회가 고도 성장기에 들어서는 동안에도 변방에 내몰리고 있는 재일교포의 차별적인 처우를 그려내고 있다.

가게 주인 김용길은 '일본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피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이지메당하는 막내아들을 그대로 일본학교에 보내지만 결국 아들은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재일교포의 암울한 미래를 은유하는 설정이다.

"빌어야 소용 없다. 신은 그저 보고만 있다"라는 체념적 대사는 이들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세 딸들이 결혼과 함께 북한, 남한, 일본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결말은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세 곳 모두에 속해 있는 경계인의 운명이 표면화된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화두 된 '경계인'

경계인의 고충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되고 있다. 한국인보다는 서양인에 가까운 체격과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국내 혼혈 운동선수들은 압도적인 기량으로 관객을 열광시키고 CF 시장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심지어 한국 국적을 취득해도 그들은 아직 '하프 코리안'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경기장 안팎에서 온전한 한국인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국적도 피도 완전히 한국인인 교포 세대들은 이들보다 더한 차별을 당하고 있다. 올해 아시안컵에 나서 극적인 결승골로 일본에 우승컵을 안겨준 선수는 재일교포 4세 이충성(리 타다노리)이다. 그는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에 확신한 채 한국에 왔지만, 한국사회는 '반쪽바리'라는 경멸에 찬 말을 들려주며 그를 일본 귀화의 길로 내몰았다.

최근 드라마 <아테나> 출연 등 본업인 격투기뿐만 아니라 방송과 모델 활동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추성훈 역시 국내 스포츠계의 텃세와 차별 때문에 귀화 후 아키야마 요시히로가 됐다.

문제는 이런 차별과 편견은 이들의 또 다른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특히 재일교포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 때문에 우수한 학업 성적에도 취업조차 어려웠다. 재일문학이나 연극에 파친코나 야키니쿠(숯불구이) 가게 등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차별 속에서도 그들만의 정체성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입지를 다진 이들도 많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카와상과 나오키상을 수상한 이회성, 이양지, 유미리, 가네시로 가즈키 등 문인들이다. 김수진과 이상일 등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작업하는 이들도 있다.

일본영화감독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최양일 감독 역시 이런 일본 사회의 높은 장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재일교포 2세다. 신작인 <카무이 외전> 개봉과 '와레와레 한·일영화축제' 참석차 최근 내한한 그는 <달은 어디에 떠있는가>, <피와 뼈> 등의 수작으로 일본 영화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카무이 외전>과 같은 날 개봉하는 <두만강> 개봉과 '장률 감독 특별전' 참석차 내한한 장률 감독 역시 재중동포 3세로서 연변인들의 경계인적 삶을 추적해왔다.

<경계>에서는 말도 안 통하는 몽골인과 동거하는 탈북 모자(母子)를 그렸고, <중경>에서는 북경어를 가르치는 주인공이 고향인 중경을 떠나고 싶어하는 모습을 담았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두만강이라는 공간에 집중한 <두만강> 역시 그가 그동안 보여준 경계의 삶을 그대로 이어간다.

경계인은 '경계'라는 말과는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그냥 '타자'로 여겨져왔다. 대표적으로 연변에서 온 조선족들은 우리 사회에서 단지 '외국인 노동자'일 뿐이다. 이들에게 한국은 민족적 동질감이 드는 조상의 땅이지만, 현실은 자신들을 값싼 노동인력으로 치부하는 냉정한 땅일 뿐이다.

어느 곳으로도 정착할 수 없는 이들은 그래서 이제까지도, 어쩌면 앞으로도 근원적인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타락한 자본주의에 상처받는 재일 조선인과 연변 조선족들이 모습을 담은 <우리 학교>나 <푸른 강은 흘러라>는 경계인에 대한 우리의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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