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박물관을 허하라] 복식 수집에 평생 바친 사람들 '한국 현대의상박물관' 등 세워

한국현대의상박물관 전시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패션 박물관을 세우지 못한 이 나라에서도 구석구석 찾아보면 보석 같은 곳들이 있다. 주로 복식 수집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뼈를 묻어 만든 곳으로, 선사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을 감싼 옷들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한국현대의상박물관

지난해 한국 패션계의 대모 최경자 여사가 유명을 달리했다. 국내 최초의 패션 모델 양성기관 ‘국제차밍스쿨’ 설립자이자, 최초의 패션지 ‘의상’의 창간자, 그리고 최초의 패션 학교인 ‘국제패션디자인학원’의 설립자인 그녀는 휠체어를 타기 직전까지 하이힐을 신고 코르셋으로 허리를 졸라 맨 대단한 멋쟁이였다.

그가 세운 한국현대의상박물관은 한국의 근현대 복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최경자 여사가 생전에 연을 맺었던 유명 인사들의 옷과 그녀가 양성한 디자이너들 – 앙드레 김, 루비나, 이상봉, 이신우, 박윤수 등 - 의 컬렉션이 고이 소장돼 있다. 여기에 딸이자 현 박물관 주인인 신혜순 관장이 뉴욕 FIT 유학 시절 틈틈이 사 모은 수집품까지 더해 1830년부터 2010년까지 한국과 서구의 의상ㆍ액세서리 총 4000여 점이 망라돼 있다.

“어머니는 도무지 버리는 법이 없었어요. 패션쇼를 한 번 하면 옷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그걸 하나도 버리지 않았죠. 양장점 단골 손님 중에는 탤런트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기증한 의상은 박물관의 중요한 자료로 쓰이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최경자의 이브닝 드레스 '청자'
3월 중순에는 서양 복식의 히스토리를 소개하는 ‘Western costume’ 전과 함께 영부인들의 의상 전이 함께 열리고 있었다. 재킷의 뒤 목 부분에 수 차례 천 조각을 덧대가며 36년간 입을 정도로 검소했던 프란체스카 여사의 수트 옆에는 그녀가 직접 못 쓰게 된 스타킹으로 만든 슈트리(구두 보형물)가 놓여 있다.

육영수 여사가 입었던 ‘땡땡이’ 무늬의 폴카 도트 플레어 드레스는 최경자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것으로, 가봉할 때 어머니를 따라갔던 신혜순 관장은 당시의 풍경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아들 지만씨를 몇 번이고 다른 방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계속 말을 안 듣더군요. 그럼에도 한번도 화내지 않고 점잖게 타이르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한국현대의상박물관은 올해 4월부터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체험 학습을 병행할 예정이다. 박물관에서 본 옷들을 티셔츠 위에 직접 그려 당시의 유행을 담은 자신만의 티셔츠를 만드는 프로그램으로 미리 박물관에 문의하고 가는 것이 좋다. 02-734-7340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5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푸들 스커트
고(故) 난사 석주선 박사는 일생을 전통 복식 수집과 연구에 매진하며 한국 복식사의 기틀을 세운 복식 연구가다. 그가 평생 모은 의상 관련 자료는 약 8000여 점으로, 자신이 교수로 재직했던 단국대학교에 유물 3365점을 기증하면서 1981년 단국대학교 부속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이 생겨났다.

1999년에는 고고미술을 취급하는 단국대 중앙박물관과 통합하면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으로 거듭났다. 이후 박물관 측은 조선 전시대에 걸친 복식 유물을 추가로 수집하여 현재는 1만 점이 넘는 엄청난 양의 복식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제 3전시실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호인 덕온공주 당의와 제2호 심동신 금관조복을 포함한 100여 점의 중요민속자료가 깨끗하게 복원된 모습으로 관람객을 맞이한다.

이 밖에도 2001년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350년 된 남자 어린이 미라와 사도세자의 딸 청연군주가 입었던 왕실 어린이 옷, 대한제국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부인인 미국인 주리아 멀록 여사의 두루마기, 사대부가의 제복 등 우리의 옛 역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복식들을 관람할 수 있다.

출토와 복원에 노하우를 가진 박물관인 만큼 출토, 세척, 보수, 전시 등 출토품이 전시되기까지의 작업 과정을 알려주는 판넬을 전시해 놓은 것도 흥미롭다. 031-8005-2388

단국대학교 전시실 전경
대구국립박물관

1994년 대구 황금동에 터를 잡은 국립대구박물관은 대구ㆍ경북 지역의 출토 유물을 전시ㆍ보존ㆍ연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됐다. 선사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들 중 복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30% 정도. 지난 해 7월, 개관 16년 만에 박물관을 리뉴얼하면서 섬유복식실을 따로 만들었다. 국가가 운영하는 박물관에서 복식 전용 전시실을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구가 섬유산업도시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 부분을 특화하기 위해 섬유와 의상만을 위한 전시실을 설치했습니다.”

섬유복식실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의상을 실, 직조, 색채, 옷의 4가지 키워드로 분류해 놓았으며, 직기 모형을 전시해 실에서 옷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관람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 길이가 긴 여성용 장 저고리, 화려한 등이 눈길을 끈다.

지난해 7월 20일부터 9월 26일까지는 재개관 기념 특별전으로 ‘아시아의 전통 복식’ 전을 개최했다. 중국, 일본을 포함해, 인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장족, 묘족 등 소수 민족의 복식까지, 국내 여러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희귀 복식 12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아 소개한 바 있다. 053-768-6051

덕온공주원삼, 중요민속자료 제211호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숙명여자대학교에 위치한 정영양자수박물관은, 그 스스로 자수 명인이자 컬렉터인 정영양 박사가 40여 년간 수집한 자수 작품들을 바탕으로 설립된 세계 유일의 국제자수전문박물관이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등 아시아 지역은 물론이고, 서양의 퀼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자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림처럼 벽에 거는 자수 작품 외에도 자수가 놓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있다. 중국 청나라 시대의 황태자 용포, 예식 때 입었던 갑옷, 용의 형상을 수놓은 중국의 용봉문 치마, 그리고 전국시대의 누군가가 사용했던 실크를 덧씌운 청동 거울까지, 화려하고 정교한 자수들로 인해 전시실이 환해 보일 정도다.

평생을 텍스타일 아트를 연구하는 데 바친 정영양 관장은 열심히 모으는 데 그치지 않고 보존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 2006년 보존과학실을 열었다. 보존과학실에서는 복식, 서화, 자수 유물들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일을 하는데, 유물 복원에 특히 취약한 국내 다른 기관들에서도 이곳에 출토 복식 보존을 위탁하고 있다. 02-710-9133

심동신 금관조복, 중요민속자료 제2호
한국의 자수와 보자기를 수집해온 박영숙, 허원실 두 사람에 의해 1976년 개설됐다. 우리 규방 문화를 일반에게 소개하기 위해 설립된 이곳은 조선 시대 자수를 비롯해 보자기, 다듬잇돌, 발, 화문석, 침장, 의상, 장신구 등 3000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그 중 자수사계분경도와 수가사는 각각 보물 제 653호와 보물 제 54호로 지정되었고, 왕비보와 다라니주머니, 대향낭 등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됐다. 78년부터 현재까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등 해외에서 45회에 이르는 전시를 개최하며 한국의 전통 문화를 알렸고, 국내에서는 매년 끈목 매듭, 발과 자리, 실꾸리와 사패, 베갯모 등을 주제로 전시를 열었다.

올해 40주년을 맞은 에서는 현재 ‘복을 담는 주머니, 쌈지’ 전이 진행 중이다. 아기의 돌 주머니에서부터 할아버지의 담배 쌈지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에서 뗄 수 없었던 주머니의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전시다.

수저 주머니, 붓 주머니, 향 주머니, 버선본 주머니, 안경 주머니 등 재미 있는 주머니들을 모두 관람할 수 있으며, 특별히 중요민속자료 41호로 지정돼 있는 대향낭과 42호 다라니 주머니가 일반에게 최초로 공개된다. 02-515-5114


누비화 출토신발. 1746년
꽃무늬 저고리
여성용 저고리
금속 허리띠
숙명여대 정영양자수박물관 전시실
중국 청대의 예식용 갑옷
중국 전국시대 청동 거울
일본 에도 시대 백색단풍문우치카케
컨템포갤러리
한국자수박물관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