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 사무실, 도서관, 극장 등 역할 확대, 고객 위한 무한 변신

할리스 커피 명동점
지난 시즌 서울패션위크가 열리는 서울무역전시장의 프레스 룸은 들보다는 '대역 죄인'에게 어울리는 장소였다.

커피를 협찬한 한 커피 전문점의 커피 맛이 거의 사약에 가까웠던 것. 탕약기 아래 눌어붙은 그을음을 물에 타서 만든 것 같은 커피와 기름에 절어 붙은 머핀은, 취향의 족속인 여자와 게이들의 입 위에서 신나게 '까였다'.

'맛 없는 커피의 몰락은 신도 못 막는다'는 말이 있다. 스타벅스가 전 세계적으로 증명한 이 명제가 유일하게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다. 현재 국내 커피 전문점들이 만드는 커피 맛은, 굳이 마니아가 아니라도 눈치 챌 수 있을 만큼 확연한 질적 차이를 보인다.

한 커피 제조 업체 관계자는 커피 시장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에 대해 설명했다. "스타벅스가 세계 상위 1%의 원두를 싹쓸이하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산지별 농장마다 품질 평가 인력을 파견할 수 있는 수준의 글로벌 기업과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로컬 기업의 커피 퀄리티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특히 커피처럼 자본집약적 산업에 있어서는 대기업일수록 더 싸고 맛있고, 군소 업체일수록 더 비싸고 맛 없어지는 현상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커피와 사약 커피는 별다른 차별 없이 팔리고 있다. 지금 카페를 결정하는 기준은 커피 맛보다는, 얼마나 접근성이 높은지, 그리고 얼마나 편하게 머무를 수 있는지다.

이런 현실에 커피 가게들은 회의를 느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까? 무슨 말씀을. 콘센트를 늘리고 무선 인터넷을 설치하고 딱딱한 의자를 푹신한 소파로 교체하는 것도 모자라, 아예 회의실까지 만들고 있다.

쉼터이자 PC방이요, 식당, 미술관, 사무실에 극장의 역할까지 잠식하고 있는 한국의 커피 전문점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청소년과 노인, 된장녀와 고추장남, 커피 마니아와 커피 초보자들까지 전부 빨아들이고 있다.

이래도 오지 않을 테냐?

"커피 맛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전 커피를 하루에 한 잔 이상 안 마셔요."

누다심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심리학자 강현식 씨는 명동과 신촌의 스타벅스에 주로 '서식'한다. 그가 카페를 고르는 기준은 컴퓨터를 연결할 수 있는 전원의 개수, 그리고 커피 가격이다. 텀블러를 가지고 가 오늘의 커피를 2700원에 할인받고 길게는 6시간 정도 앉아서 작업을 한다.

카페베네 압구정점
"초기에는 콘센트 있는 커피 전문점이 많지 않았어요. 어떤 곳에서는 의도적으로 막아 놓기도 했고요. 상대적으로 전원이 많은 스타벅스에 자주 가게 됐고 그러다 보니 멤버십 카드가 생기면서 지금은 그냥 눌러 앉게 됐어요."

몇 년 전, 스마트폰과 넷북, 와이파이의 사용이 부쩍 늘어났을 때 커피 전문점들은 '눌러 앉는 고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잠시 우왕좌왕 했다.

이 틈을 타 무섭게 치고 올라온 것이 카페베네다. 올 4월 초 기준 535호 점을 돌파하면서 2위인 엔제리너스(398개 점)를 크게 따돌린 카페베네는 파격에 가까운 공간 구성과 편의 시설로 고객들을 향해 "얼마든지 있다 가세요"라고 외친다. 프랜차이즈 사업에 도가 튼 사장은 눈만 돌리면 카페베네를 볼 수 있도록 매장 수를 늘린 건 물론이고 (올해 안으로 800호 점 오픈이라는 무시무시한 목표를 발표했다) 40평 이하로는 매장을 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해 테이블 간의 공간을 확보했다.

와이파이와 콘센트는 기본이고 컴퓨터가 없는 고객들에게는 아예 노트북을 무상으로 대여해준다. 여기에 클래식 음악 감상실, 애플 컴퓨터가 구비된 PC존, 스터디 룸, 세미나실, 흡연실, 화장을 고칠 수 있는 파우더 룸까지. 테이크 아웃이 적고 만남과 업무의 장소로 카페를 활용하는 한국인들에게, 카페베네는 '정(情)'으로 설명되는 황송한 서비스를 더해줌으로써 하드웨어부터 소프트웨어까지 완벽한 '한국형' 카페를 만들어냈다.

카페베네의 이런 시도는 후기 스타벅스의 전략과 놀랍게도 닮아 있다. 초기에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고급 커피'로 성공을 거둔 스타벅스는 글로벌화와 맞물리면서 커피의 질이 떨어지자 다른 것으로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소공동점
첫 번째 전략은 메뉴 다양화로, 펌킨 스파이스 라테, 민트 모카칩 프라푸치노, 스트로베리앤크림 프라푸치노 블렌디드 크림이라는 호흡이 달릴 정도의 긴 이름을 가진 메뉴들이 추가됐다. 카페베네가 최근 출시한 메뉴의 이름은 캬라멜 시나몬 오곡 베네스또, 크랜베리 아몬드 베네스또, 여기에 한국인들 입맛을 고려한 듯한 핫 칠리 와플까지 있다.

두 번째는 엔터테인먼트와의 결합이다. 스타벅스는 자체 편집 CD 발매는 물론이고 여러 음반 회사와 합작해 음반을 발매했다. 레이 찰스의 유작 앨범은 2004년도에 300만 장이 팔려 나갔는데 그 중 4분의 1은 스타벅스에서 팔렸다. 카페베네는 스타들과 손을 잡았다.

싸이더스 HQ를 주주로 끌어 들여 소속 연들을 광고와 행사에 동원하고, 그들이 출연하는 드라마에 장소를 제공했다. '지붕 뚫고 하이킥', '시크릿 가든', '싸인', '신기생뎐' 등 수많은 드라마와 시트콤에 공격적인 PPL을 감행한 결과 한때 '왜 모든 드라마 주인공은 카페베네만 가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몇 달 전부터는 자체 음악 방송도 시작하고 있다. 신청곡을 틀어주고 소비자들의 사연을 읽어주는 음악 방송은 '일하는 데 방해된다'는 평도 있지만 어쨌든 고유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영화, 와인, 24시간..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라

와인을 마실 수 있는 엔제리너스 달맞이공원점
이렇다 보니 다른 커피 전문점들의 발길도 급해졌다. 엔제리너스는 뷔페와 와인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빼 들었다. 오피스 타운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무교동 지점에서는 매일 아침 7시 반부터 조식 뷔페를 운영한다.

6000원을 내면 매장에 있는 오븐에서 직접 구운 빵과 주스를 양껏 먹을 수 있다. 바다를 접한 부산 달맞이공원점에서는 해가 지면 와인을 판다. 연인들이 바다를 보기 위해 많이 들르는 매장의 특성상 분위기를 잡을 수 있는 와인을 메뉴에 추가한 것이다.

탐앤탐스는 24시간 매장을 늘리며 체력전에 돌입했다. 2005년 로데오 본점에서 처음 시작해 재미를 본 24시간 매장은 현재 56개 점으로 늘어났다. 밤에도 유동 인구가 끊이지 않는 강남역과 홍대, 신촌, 신사역 등을 중심으로 하루 종일 매장을 열어 놓아, 첫 차를 기다리는 젊은 층의 쉼터를 자처하고 있다.

전 지점에 모임을 가질 수 있는 비즈니스 룸을 구비해 놓았고, 지금의 탐앤탐스를 있게 한 주요 원동력인 허니버터브레드와 프레즐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다. 현재 호주, 태국, 싱가폴, 미국 등 7개의 해외 지점이 운영 중이다.

마케팅 기획팀의 이문희 대리는 "올 초 자체적으로 실시한 고객 설문 조사에 따르면 탐앤탐스를 방문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며 "현재 250개에 이르는 매장을 연내 336개까지 확대하고 해외 지점도 14개 점까지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빈 청담점
스타벅스는 영화관을 열었다. 지난해 말 오픈한 신촌명물거리점 5층은 고객들을 위한 무료 영화가 상영되는 '시네마 플로어'다. 카페에서 영화를 틀어주는 것이 아니라 건물 한 층을 아예 상영을 위한 공간으로 설계한 것으로, 아시아에 있는 스타벅스 지점으로는 최초다.

150인치 대형 스크린과 돌비서라운드 7.1채널의 음향 설비, 완벽한 방음 시설이 갖춰진 극장에는 안락한 소파부터 스툴까지 35개의 좌석이 배치돼 있다. 재능 있는 신진 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목적도 겸비한 시네마 플로어에서는 지난 해 12월부터 1월 초까지 인도 감독 기탄잘리 라오의 '무지개 성냥' 등 아시아 단편 영화와 이주 여성 제작 영화 등을 상영했다. 올 3월부터는 한국 고전 영화 '시집 가는 날', '자유 부인' 등 7편을 상영하고 있다.

테이블 2개 당 콘센트 1개, 소파형 의자 비중 확대, 회의형 원목 테이블 설치 외에, 최근 스타벅스가 부쩍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은 '지역화'다. 올해 1월 리뉴얼 오픈한 소공동점의 내부는 인사동 다방을 연상시킨다.

서까래를 이용한 파티션에 전등갓, 사장님들이 앉을 법한 듬직한 갈색 소파까지. 스타벅스 관계자는 "소공동 인근의 문화재인 덕수궁 정관헌과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 등을 인테리어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고객과 지역 사회와의 연관성을 강조함으로써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하겠다는 포부인데, 이른바 '미국 분위기'로 성공한 스타벅스에게 이 전략이 얼마나 효과를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다.

재미있는 것은 이 난리통 속에 커피빈의 행보다. '간 크게도' 전 매장에 콘센트뿐 아니라 무선 인터넷도 설치하지 않았다. 마치 반문화주의자처럼 묵묵하게 커피만 팔뿐이다. 그러나 이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오래 앉아 있는 꼴을 못 봐서'가 아니다.

"이전에 어린 아이가 콘센트에 포크를 집어 넣으면서 큰 사고가 날 뻔한 적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콘센트를 만들지 않았고 지금은 전 매장에 전원을 꽂는 곳이 없습니다."

무선 인터넷이 없는 이유는 애초에 커피빈의 컨셉트를 사무 공간이 아닌 휴게 공간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정작 미국 커피빈에는 전부 와이파이가 설치돼 있다. 운영팀의 장윤정 팀장은 "고객들의 요청이 빗발쳐 일부 매장만 시도할까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 웹 세상을 막아 놓은 대신 커피빈이 제공하는 것은 테라스와 흡연실이다.

매장 한 면을 폴딩 도어로 설계해 문을 열면 야외의 공기와 햇빛을 쬐며 커피를 마실 수 있게 했다. 전체 200개 매장 중 3분의 1 가량에 흡연실을 설치해 점점 늘어가는 금연 건물들 속에서 갈 곳을 잃은 흡연자들을 위한 공간도 마련했다.

압구정 로데오 점에는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아트북 3000여 권을 구비해 놓았다. 커피빈은 한국 카페 문화 흐름에 느릿느릿 부응하는 한편 최근 커피 전문으로서는 최초로 캡슐커피머신 브랜드를 론칭함으로써 커피 맛에 집중한다는 브랜드 철학을 확고히 했다.

1675년 영국에서는 '커피 하우스, 무혐의 판정 받다'라는 제목의 광고 전단이 발행됐다. 커피 소비를 권장하는 내용으로, 술에 취하지 않기 때문에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고 돈도 적게 들며 건전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커피 하우스는 (술집과 달리) 무혐의라는 것이다.

올해 말이 되면 국내 커피 전문점 수는 3000개를 거뜬히 뛰어 넘을 예정이다. 기능적 공간 창출로 국민의 동선을 바꿔버린 한국의 커피 하우스들 역시 무혐의 판정을 받을 수 있을까?

참고서적: <커피북>, 그레고리 디컴, 니나 루팅거, 사랑플러스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