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거리 불안감, 공동체 문화 회복, 정서적 치료 효과'상자 텃밭', '주머니텃밭', '도시농부 학교' 등 지자체도 앞장 서

"5000명 동시 접속, 30분 만에 매진."

인기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 티켓 판매 기록이 아니다. 주인공은 3월9일 서울시 강동구가 분양한 '친환경 도시 텃밭'. 둔촌동, 암사동, 고덕동, 강일동에 조성된 총 4500평 규모, 875구좌의 밭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곧 동 주민센터에서도 600구좌의 텃밭을 마련해 분양할 예정이다.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송파구와 (재)서울그린트러스트가 운영하는 오금동의 솔이텃밭도 3월7일 참여자를 모집한 지 4초 만에 마감됐다. 도시농업 보급에 힘써 온 (사)전국귀농운동본부 텃밭보급소 안철환 소장은 "올해는 우리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이라고 말했다.

이런 추세라면 퇴근길에 넥타이 휘날리며 밭으로 달려가는 직장인, 농사의 달인으로 등극한 가정주부, 이상 기온을 걱정하는 어린이 농부를 도시에서 만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도시농업 열풍이 도시의 삶을 푸르게 바꾸고 있다.

건강한 먹을거리 찾아 호미를 든 도시민들

(재)서울그린트러스트가 진행한 상자텃밭 보급 사업
도시농업 열풍에 불을 지핀 건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이다. 최근 몇 년간 수입산 식품의 안전성 문제와 농산물 공급 불안에 시달리다 급기야 안전하고 안정적인 먹을거리를 직접 찾아 나선 도시민들이 도착한 곳이 도시농업이다. 한 가정 당 5평 정도의 밭이면 단출하게나마 상추와 고추, 파 등 자주 먹는 채소들을 자급할 수 있다.

(재)서울그린트러스트의 허정남 코디네이터는 "특히 지난해 '배추파동' 이후 텃밭 참여자가 늘어났다"고 말했다. 김치를 담글 수 없다는 충격이 도시민들의 손에 호미를 쥐어준 것이다.

지자체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작년 11월 '친환경 도시농업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한 강동구는 2020년까지 구내 텃밭을 1만 세대가 참여하는 1만 구좌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도봉구는 17일 371구좌 규모의 텃밭을 개장한 데 이어 앞으로 창동의 시유지에 3000 평 규모의 텃밭을 만든다. 경기도 안산시는 최근 2만 평 규모의 텃밭을 시민에게 분양했으며, 광주시와 부산시도 텃밭 마련에 나섰다.

도시 내 텃밭은 농업과 관련된 지역 내 사업을 활성화하고 공동체 문화를 회복시킨다는 점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강동구의 텃밭 사업은 지역의 친환경 농산물을 직거래하는 장터를 열고, 이들 농산물로 학교 급식 수요를 충당하는 등의 지역 먹을거리 사업과 함께 추진된다.

(재)서울그린트러스트가 진행한 상자텃밭 보급 사업 사례
구내에서 모은 낙엽으로 퇴비를 만들어 텃밭과 농가에 공급하는 낙엽퇴비장도 운영 중이다.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주민들의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지역 기반 먹을거리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다. 농산물을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함께 농사짓는 사람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경제 구조가 가능해진다.

아파트단지, 학교, 어린이집, 경로당, 병원 등에 마련되는 공동텃밭은 구성원 간 소통을 끌어내고 교육, 치료 등의 효과까지 낳는다. (사)전국귀농운동본부 텃밭보급소에서 엮은 <도시농업-도시농사꾼이 알아야 할 모든 것>에는 이를 증명하는 사례들이 실려 있다.

학교 텃밭을 운영했던 한국육영학교 김정선 교사는 텃밭이 아이들의 집중력과 오감을 발달시킨다는 것을 발견했다. "보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며 텃밭 활동을 체험한 아이들은 예전에 무관심했던 작물들, 풀들과 곤충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관찰력도 향상됐다"는 것이다.

한 요양원에 옥상텃밭을 만들었던 도시텃밭보급소 이혜경 보급원은 텃밭이 "노인들에게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 넣는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빌딩숲에서 텃밭 찾기

서울시 강동구가 분양한 암사동 친환경 텃밭
텃밭을 가꿀 넓은 땅을 도시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텃밭보급소 안철환 소장은 "둘러보면 유휴지가 의외로 많다"고 지적했다. 놀고 있는 공유지를 지자체가 시민에게 개방하는 방식이 일반적이고, 옥상과 베란다를 활용하는 것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땅 없이 농사에 입문하는 이들을 위한 상자텃밭도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 지자체나 관련 단체를 통해 상자텃밭을 분양받을 수도 있지만, 스티로폼 상자와 나무 상자, 고무 대야 등으로 직접 만들어도 된다.

작물에 알맞은 크기의 상자를 준비하고 물 빠짐 구멍을 낸 뒤 부직포나 포대 등을 깔고 배양토와 거름을 넣어주면 된다. 상추와 고추, 토마토, 감자, 배추 등은 손이 많이 가지 않아 누구나 잘 기를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텃밭보급소 카페(cafe.daum.net/gardeningmentor)에서 참고할 수 있다.

서울시와 (재)서울그린트러스트는 최근 상자텃밭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주머니텃밭 1만 개 보급에 나섰다. 천막 소재이기 때문에 상자텃밭의 무거움은 덜어냈지만, 튼튼함은 놓치지 않았고 깊이가 35cm여서 뿌리를 깊게 내리는 토마토, 오이, 가지, 고추 등을 잘 길러낼 수 있다.

주머니텃밭은 생활 속 빈 공간의 환경개선과 공동체 활성화, 노인의 건강을 유지해주는 소일거리용으로 보급되는 중이다. 허정남 코디네이터는 "도시민들이 자투리 공간을 일구어 나가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인사동에 위치한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갤러리에서 <도시농부의 하루>展이 열리고 있다.
주머니텃밭의 의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 노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일부는 헌 천막을 재활용해 제작되는 이 기특한 텃밭은 지역 일자리 창출과 자원재순환에까지 기여한다. 우리 동네 노는 땅, 우리 회사 옥상에 심긴 토마토와 오이가 더 예쁘고 맛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상자텃밭과 주머니텃밭 등의 간편한 텃밭 형태는 가족 단위 참여자가 많은 주말농장 형의 텃밭과 달리 1인 가구의 생활 방식과도 잘 어울린다. 서울시가 주최하고 (재)서울그린트러스트가 주관한 '2010 생활녹화 경진대회' 우수사례로 뽑힌 마포구 합정동의1인 가족 에코네트워크 '이웃 랄랄라' (cafe.naver.com/ecolalala)는 외롭고 불규칙한 1인 가구의 생활습관이 텃밭을 통해 건강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웃 랄랄라는 인스턴트 음식에 지친 혼자 사는 젊은이들이 함께 상자텃밭을 일구기로 의기투합해 생긴 모임. 한 건물 옥상텃밭에서 자란 갖가지 작물들은 이들에게 영양분은 물론, 공동체라는 선물을 안겨 줬다.

도시농업, 공공문화가 되다

도시농업을 공공문화의 새로운 영역으로 안착시키려는 시도는 디자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지난 3월30일부터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주최로 열리고 있는 <도시농부의 하루> 전은 도시에서 농사짓는 다양한 방법을 제안한다. 옥상과 베란다는 물론, 실내 곳곳과 길거리까지 밭으로 탈바꿈시키는 디자인 아이디어가 전시됐다.

폐 파이프와 헌 양철 트렁크, 헌 청바지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민 푸른 잎들, 헌 액자를 타고 오르는 덩굴은 주변 어디든 밭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칸칸이 허브가 자라는 조리대, 테트리스 블록 모양으로 만들어져 베란다의 쓰임새에 따라 다르게 조합할 수 있는 상자텃밭, 다양한 모양으로 상자텃밭을 쌓아 올려 울타리 대신 설치할 수 있게 만든 '블록 팟' 등은 도시 텃밭의 가능성을 넓힌다.

전시장 옥상에는 최원자 작가의 '옥상이 자란다'가 설치됐다. 딸기와 상추, 케일 등의 채소류, 매화나무와 포도나무 등을 심은 밭 가운데 원두막을 모티프로 한 공간이 있어 수확과 휴식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작물들의 색과 생김새를 고려해 심는 위치를 정했기 때문에 안정감을 주고, 계절마다 다양한 작물들이 번갈아 피고 지고 열매 맺으며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생산성과 조형성을 동시에 고려한 텃밭 겸 정원인 셈이다.

(재)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은 이번 전시를 통해 제시한 도시농업 아이디어를 공공디자인 사업으로 실현해나갈 계획이다. 그 첫 결과물은 '인사동 열한번째 골목길 프로젝트'다. (재)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 갤러리가 위치한 인사11길을 녹지로 만드는 프로젝트. 교회와 갤러리, 주차장의 자투리땅에 텃밭을 일구고 덩굴식물과 화단 등으로 경관을 정비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도시농업에 대한 상상력은 이처럼 철옹성 같던 도시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식량 확보를 넘어 생태적 패러다임으로

문제는 결국 사람이다. 텃밭보급소 안철환 소장은 "도시농업을 하려면 왜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어떤 자세와 전략으로 농사를 지어야 하는지 등 농사철학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땅 한 평 제대로 구하기 어려운 도시에서 수확만을 추구하는 농사는 지속되기 어렵다. 농사의 기쁨, 땀을 흘리고 흙을 만져 결과를 거두고는 건강함, 나아가 도시환경을 살리고 있다는 보람에 의미를 둘 줄 모른다면 도시농부로 살 수 없다.

도시농업에 대해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이다. 텃밭보급소는 도시농부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각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도 도시농업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최원자의 '옥상이 자란다'
(재)서울그린트러스트는 도시 텃밭 강사, (재)한국공예·디자인진흥원은 도시 텃밭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서울 강동구청 직원들은 스스로 배운 뒤 주민들과 나누기 위해 도시농업 학습동아리 '그리니티'를 만들었다.

배움을 통한 농사는 생산량 증대와 수익 극대화만을 목표로 하는 농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도시농업이 식량위기에 대한 경제적 대안일 뿐 아니라 도시 문명에 대한 사회문화적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해외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도시농업이 시도되고 있다. 건물 옥상에 텃밭을 조성하면 건물을 운영하는 에너지가 획기적으로 절감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옥상이 도시농업의 무대로 각광받기도 하며, 식량자급이나 주민의 정신적 건강 유지를 목적으로 도시 텃밭이 일구어지기도 한다. 다문화 음식 축제와 유기농산물 품평회 같은 관련 이벤트도 호응을 얻고 있다.

도시농업은 결국 생태적 패러다임과 만난다. 자신이 먹을 것에 제초제와 화학비료를 쓰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다 보면 작물을 기르는 것이 농약이 아닌 흙임을 실감하게 되고, 흙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초보 농부가 키운 작물은 의외로 맛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작물은 자신을 잘 돌봐주지 못하는 초보 주인을 만나면 스스로 커야 합니다. 거름도 덜 주고 벌레와 풀도 잘 잡아주지 못하며 가뭄에도 물을 주지 않으니 오히려 작물 본래의 생명력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핵심은 살아있는 흙입니다. 흙이 살아나면 아무리 실력 없는 농부라도 그 땅에서 최소한의 먹을거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수현의 '테트리스 가든'
텃밭보급소 안철환 소장은 "농사의 처음이자 끝은 흙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어떻게 흙을 뒤집고 관리하는지를 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잊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농업은 도시민과 흙의 관계를 회복하고, 도시의 삶을 자연 속에 바르게 놓아보는 시도이자 태도다.

<도시농부의 하루> 전에 전시된 도시농업의 아이디어

1.
옥상에 조성할 수 있는 텃밭 겸 정원. 수확해 먹을 수 있는 작물과 관상용 식물이 섞여 있고, 농사를 짓는 동시에 경관과 분위기를 즐길 수 있는 생활공간이다. 영국에서는 이런 형식의 정원을 '키친 가든kitchen garden'이라고 부른다.

2.
아파트 베란다에 채워 넣을 수 있도록 테트리스 게임 속 블록 모양으로 만든 상자 텃밭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재미있게 활용할 수 있다. 영국에서 정원 디자인을 공부한 서수현 작가가 한국의 주거 형태를 고려해 선보인 작품.

3.
두 개의 기둥을 텃밭으로 활용했다. 양쪽에서 자란 허브를 중간에서 요리한다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헌 목재 팔레트를 재활용한 친환경적 작품.

4.
블록을 자유롭게 조립, 해체할 수 있어서 형태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 담이나 울타리 대신 조립식 텃밭을 설치하면 도시 경관이 확 달라질 것 같다.

임종기의 'DIY 샐러드바 정원'

최진식의 '블록 팟'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