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르네상스]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필수 과목 '인간의 가치 탐색' 신입·재학생 몰려 인문학 갈증 풀어

도정일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대학장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다. '책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 상임대표와 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고 '기적의 도서관'을 기획한 대표적인 공적 지식인 중 하나다.

그런 그가 최근 후마니타스칼리지로 대외활동을 부쩍 늘였다. 마침 카이스트 문제 등이 불거지며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20일 학장실에서 만난 그는 후마니타스칼리지 필수 과목 중 하나인 '인간의 가치탐색' 강의를 마치고 온 길이었다. 이 수업은 신입생 5000명을 대상으로 이번 학기 개설한 과목이다. 하지만 재학생 1000명이 추가로 신청하는 바람에 인원 재배정 후에도 남은 학생 400명의 강의를 도 교수가 직접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전 70~80년대 가르치신 학생들과 지금 학생들이 많이 다르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다른가요?

"지금 세대는 굉장히 불행한 세대입니다. 기술이 진척된 세대일수록 그것이 가져올 폐해를 교육이 막으면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차세대 동력, IT를 부르짖고 이 부분에 대한 기대가 과도하게 높아져 있죠. 지금의 재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각종 IT장비를 쓰며 자라온 세대이고, 이 세계 밖을 잘 모릅니다. 이를테면 책의 세계를 굉장히 답답해하죠. 영어 말하기는 어떤 세대보다 능숙하지만 정작 자기 생각을 말하는 건 어려워합니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 기대는 과도한데, 이를 뒷받침할 인문적 소양은 뒤떨어진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최근 개봉한 영화 <고백>은 그런 폐해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중학생 두 명이 담임의 딸을 살해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고백'하는 내용인데, 그 학생 중 하나가 과학자인 엄마에게 버림받는 아이입니다. 발명품을 만들어 대회에서 1등을 하면 엄마가 나를 찾을 거란 기대로 매진하다가 정작 대회에서 상 받는 날, 청소년 살인 기사로 자기 소식이 신문 구석으로 밀려나자 살인을 계획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만든 것도 그런 방식의 사고죠. 월스트리트에선 회사 이윤이나 자본이익을 늘릴 수 있는 금융상품만 계발해서 파생상품 팔아먹었거든요. 영혼이 없는 탁월성이죠. 그렇다면 인문학이 정신 차리게 해주는가….
천만에요. 심지어 인문학 교수도 어떤 분야에서 탁월하지만 인간을 보면 개차반이 경우가 태반이에요. 왜냐면 인간에 대한 책임이나 사회와 역사, 문명에 대한 책임, 이런 걸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서도 전공으로서 인문학을 연구하니까요. 전공으로서 인문학 연구는 가능합니다. 근데 학부 인문학은 다릅니다. 우리가 경쟁을 통해서 탁월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판단의 탁월성, 가치의 탁월성, 윤리적 탁월성을 염두해야 합니다. 자기가 일한 기업 완전히 망하게 하는 산업스파이들 많잖아요. '내가 이렇게 해도 되는가?'란 반성적 질문 없이 산 사람들이 대개 그런 사고를 칩니다. 학부생들에게도 인문학적 소양, 가치관, 사고법, 인간다운 정서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기술에 대한 기대와는 반대로 인문학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거의 냉소에 가까웠거든요. 최근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강좌나 저서가 인기를 끈다고 해도 역시 대학의 학과 통폐합 대상 1호가 인문학과란 점은 여전하고요. 인문학이 취업 같은 '생산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최근까지도 국내 기업에서 인문학을 등한시했던 원인이 당장의 이윤과 연결이 없기 때문이고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어요. 제품 생산에서 인력관리, 고객 상대 이 모든 영역에서 인문학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해 수준, 커뮤니케이션 능력, 상상력…. 이런 능력이 경영에 대단히 중요하다는 걸 기업이 알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인문학과가 줄어든다, 인기가 없다고 하는데, 사회에서는 인문학 붐입니다. 그 붐은 기업경영자들이 일으켰고 그들이 붐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업 CEO들의 접근법이 또한 실리주의가 있죠. 가령 인력관리에 유용하다는 식의 접근이죠. 인문학은 내 기업에만 중요한 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줬으면 합니다."

기업이 오랫동안 인문학을 터부시한 이유가 인문학의 '비판정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 적이 있어요. 경영 논리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노동자보다 비판적 사고의 노동자를 기업이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인문학은 물론 비판적 사고를 강조합니다. 그것이 예전에는 소위 반골기질과 연결된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것이야말로 사회를 강하게 만드는 시민적 자질이에요. 인문학 정신은 엄격히 말해 비판적 사고라기보다는 합리적 사고입니다. 기업과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그런 사고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90년대부터 유행한 소위 '영혼이 있는 기업'이란 말이 있죠. 근데 말만 유창하지 영혼이 있는 기업의 모델을 본 적은 참 드물어요. 그래서 음악을 전공했던 IT 분야 CEO를 인터뷰할 때 이 말을 꺼냈는데, 그 CEO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세계적인 기업들은 이윤창출이 목적이 아니라 경영의 전설이 되는 것, 경영자의 판단이 '아트'(Art)가 되기를 원한다. 이윤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기업을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윤을 내는 것'이라고 말이죠.

"최근 뉴욕타임스에 '코너 사무실'이란 칼럼을 쓰고 있는 애덤 브라이언트가 70명의 미국 CEO 인터뷰를 통해 비결 다섯 가지를 풀어냈어요. 코너 오피스란 근사한 경치를 볼 수 있는 오피스빌딩의 창문 쪽 방을 말하죠. 중간간부에서 임원으로 승진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고요. 70명의 CEO가 말하는 성공의 5가지 조건 그 첫 번째가 열정적 호기심이에요. 인터뷰한 CEO 중에 한 사람이 그럽디다. 나는 인간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학생이다. 이 인간 본성에 대한 호기심, 이것이 인문학적 호기심입니다. 타인과의 관계, 도덕 인문학 사회과학, 세계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히 인문학에서 풀어가려는 과제죠."

사회적 관심과 별개로 최근 인문학계 내면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소위 문단에서 활동하는 30~40대 젊은 평론가들은 국내 대학의 학제 개편이 완료되면서 국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문학평론을 하는 1세대거든요. 이전 평론가들이 영문학, 독문학, 불문학 등 다양한 문학을 전공한 것과 비교해 상당히 시야가 좁고 깊죠. 다른 영역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런데 또 최근 몇 년 간 '통섭'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학문간 경계 넘기, 전공 영역 파괴가 대세가 됐거든요.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드는 거죠.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재만 보더라도 철학, 문학, 역사학, 심지어 생물학 같은 과학도 함께 다루고 있잖아요.

"대학원에서 한 분야를 깊이 있게 공부를 시키는 건 학문의 성격상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근데 제 전공을 잘하기 위해서도 통섭적 접근이 불가피합니다. 그래서 대학원 전공자들에게 대학원 교육이 그런 통섭을 감당하지 못하면 독자적으로라도 독서 등 방법으로 안목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어떤 학문적 발견이 되는가를 끊임없이 참조해야 한다고 말하죠.

하지만 입으로는 '경계넘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 학문에 접목시키기 어려운 부분도 있죠. 한국 대학 병폐 중 하나가 자기 영역 울타리 치고 못 들어오게 합니다. 교류를 차단합니다. 학문의 폐쇄성이 상당히 강합니다."

필수 과목 교재가 문학, 사회, 역사, 과학, 철학 명저를 소개한 800페이지짜리 책입니다. 말 그대로 통섭적 교재네요. 한 학기 절반을 이렇게 운영해보셨는데, 학생들 반응은 어떻습니까?+'

"재학생 신입생 할 것 없이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다른 대학이 하지 않은 시도 때문인지 인문학에 대한 갈증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때 듣지 못한 이야기, 대학 가면 들을 수 있을까 어렴풋 기대했던 이야기, 처음 듣는 철학자와 작가, 예술가들에 대한 호기심도 많고요. 중간고사를 끝내고 학생들 반응을 조사하려고 합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