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과 교양 강의 전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라지'인문학자와 대중과의 신선한 소통 고려대 '웹진 민연'국민국가 패러다임 극복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대학원'

고대 민족문화연구원 학술대회 전경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 11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다. 하버드대 인기 강의로 꼽히는 샌델의 강의 '정의'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국내 출간 직후부터 줄곧 베스트셀러 상위를 지켰다.

복지국가 논의, 정의에 대한 범국민적 열망 등 다양한 요인이 성공의 배경으로 분석되지만, 아마 가장 큰 요인은 인문학에 대한 세간의 관심 때문일 게다. 최근 치솟은 인문학 인기는 2000년대 초반 '인문학 위기'를 선언할 때와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경영과 인문학을 접목시킨 강연이 최근 기업임원들의 인기를 끌고 있고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등 인문학 연구단체의 강연 역시 꾸준히 사랑받으며 10년 이상 이어지고 있다. 문학출판사들도 웹진에 인문학자들의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출판사 자음과모음은 올해 초 젊은 학자들이 쓴 인문서 '하이브리드 총서' 시리즈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최근 몇몇 대학들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경희대의 '후마니타스 칼리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의 '웹진 민연',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의 '트랜스내셔널 대학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각각 대상과 주력 분야는 다르지만 이들 모두 학문간 경계를 뛰어넘는 통섭 운영 방식, 대중과 소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으로 꼽힌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도정일 대학장 수업
샌델의 '정의'강연에서 수백 명의 하버드 학생들은 롤스의 <정의론>를 토대로 각자의 가치관을 자유롭게 개진하고 토론한다. 수재들의 말발도 놀랍지만 이들을 중재하고 결론을 도출해내는 교수의 노련함도 흥미를 자아낸다. 올해 초 경희대에서 시도한 후마니타스칼리지는 바로 이 강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경희대는 3월부터 인문학과 교양 강의만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 '후마니타스 칼리지'를 열었다. 하나의 단과대처럼 그 안에 전공을 두고 다양한 강좌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동안 교양강좌 일부를 개편한 대학들은 많았지만 이처럼 학내 교양교육 체제를 전면 개편한 경우는 이례적이다. 최근 인문학자들이 경희대의 실험을 주목하는 이유다.

"교양수업에서 읽기, 토론, 글쓰기가 병합돼 있습니다. 교수는 담당학생 이름과 얼굴을 익히고 무엇보다 왕성한 질문과 토론을 이끌어야 하죠. 최대 수강인원을 각 반마다 40명씩 배정했는데 이번 학기에는 재학생 신청이 많아 48명으로 늘렸습니다."

도정일 대학장의 말이다. 교양수업이 단과대 수준으로 커짐에 따라 재학생이 필수로 들어야 할 교양강좌도 강화됐다. 전교생은 졸업을 위해 중핵교과(6학점), 배분이수교과(15학점 이상), 기초필수와 시민교육(11학점), 자유이수교과(3학점 이상) 등 총 35학점의 교양강좌를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이수해야 한다.

이 중 중핵교과와 시민교육은 전교생이 듣는 강의 내용이 동일하다. 125명의 중핵교과, 시민교육 담당 교수진들은 한 달에 두 번 재교육을 통해서 수업내용을 공유하고 있다.

"사회에서 경쟁력을 강조하지만, 지금의 대학 교양교육은 정작 경쟁력 있는 인재가 배출되기 어려운 구조에요. 종합적 사고력과 판단력, 가치관이 갖춰져 있고, 그 위에 기술적 탁월성이 있어야 하는데 기술만 강조해 사상누각인 상태죠. 강의 내용을 현실이나 삶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연결 고리를 찾는데 신경 쓰고 있습니다."

후마니타스칼리지의 변화에 대해 일부에서는 하드웨어의 변화일 뿐 소프트웨어는 변한 게 없다고 지적한다. 도정일 대학장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소프트웨어 변화를 중심에 둔 것이다. 문학, 사회, 역사 자연과학을 아우른 중핵교과 교재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고려대 웹진 민연

학계에서 고대 민족문화연구원(이하 민연)은 대기업에 속한다. 인문학 각 분야의 전공학자 수십 명이 전임, 연구교수로 포진해 있고 사전편찬 같은 '장기 프로젝트'는 이미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됐다.

최근 민족문화연구원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개설한 창구가 '웹진 민연'(http://riks.korea.ac.kr/webzin)이다. 민연 소속의 교수진들이 편집위원을 맡고 각 분야 글쟁이들을 섭외해 담론과 비평, 에세이를 연재한다.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에서 실시한 '비행대학'의 수업
"기획과 제작은 작년 11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인문학자 간의 소통과 대중과의 소통을 신선한 방식으로 시도해보자는 것이었죠."

웹진 주간을 맡은 정병욱 교수의 말이다. 취재 당일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 100만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렸고 "대중의 눈높이에만 맞추면 우리나라에서도 인문학 밀리언셀러는 부지기수로 나올 것"이란 기자의 말에 정 교수는 "웹진을 기획한 배경도 비슷하다"고 말했다. 대중이 인문학에 자유롭게 접촉하고 인문학자들도 기존방식보다 가벼운 형식으로 글 쓸 수 있는 장을 여는 것이 웹진을 만든 목적이라고.

웹진 민연은 담론을 만드는 '談+論'부터 전문가들의 문화비평이나 시평을 싣는 '관점', 예술가들의 개성적인 글을 연재하는 '사람과 글' 등 다양한 코너로 구성됐다.

'談+論'의 첫 주제는 대세에 맞춰 '정의란 무엇인가'로 정했다. 철학자 안재원, 이승환, 법학자 김기창, 정태욱이 각자의 시선으로 정리한 '정의론'을 소개한다. 이후 정치학자 장동진, 사회학자 서동진, 백영경 등 사회 각 분야 지식인들이 '정의'를 주제로 6개월간 글을 연재할 예정이다.

문학평론가 조강석, 함돈균, 신형철 씨가 같은 주제로 비평을 연재하는 코너 '문학을 묻다'도 볼거리다. 이달에는 '영화 <시>의 미자 씨가 시가 아닌 소설을 배웠다면?'이란 가정으로 시와 소설의 차이를 각자의 관점으로 소개한다. 시인 이원과 김행숙, 김민정 등이 문화예술작품을 보며 쓴 에세이 '알로플라스틱', 소설가 김연수와 시인 허수경의 에세이 등도 대중과 학계 거리를 좁혀줄 콘텐츠다.

한양대 비교역사연구소 일상사 수업
최용철 민족문화연구원장은 "웹진을 찾아본 대중들이 민연을 찾고, 이곳의 젊은 인문학자들이 밖으로 나가 교류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웹진 민연에 '사람과 글 人, 文'이란 코너가 있습니다. 인문의 원래 의미는 인생의 문이라는 뜻이죠. 삶을 살아가는 데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일, 예술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과 예술은 하나입니다. 웹진 만드는 이유는 논문집, 사전 등 연구소의 작업들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알리려는 겁니다."

인터뷰 최용철 민족문화연구원 원장

민족문화연구원이 1950년대 개설됐으니 근 60여 년 연구해온 단체다. 인력도 철학, 문학, 역사학, 과학자까지 있는데. 이런 구성이 웹진에 어떤 영향을 주나?

"기존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담론을 발신하고 소통하는 장으로 웹진을 만들고자 했다. 지금 민연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포진해있다. 이들이 만나는 현장을 보여주자는 것도 웹진 의도 중 하나다."

웹진은 인문학의 대중화 시도 중 하나다. 이전 세대와 비교해 달라진 점일 수도 있겠다. 최근 젊은 인문학자들의 특징은 뭔가?

"공부하는 입장에서 보면 예전에는 원전을 찾고 복사하는 게 많았는데 지금은 컴퓨터를 사용해서 학자들이 별로 움직이지 않는다.(웃음) 발로 뛰는 공부를 하지 않는 게 가장 안타까운 것 중 하나다. 막상 학문세계에 깊이 들어오면 발로 뛰지 않은 학문은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 또 공부를 하려면 직접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 그런데 요즘은 글을 통해 인문학을 하려 한다. 사람 만나는 것도 다 SNS로 하지 않나. 학자를 만나서 얘기 들어보는 건 큰 공부다. 논문부터 일상적인 이야기까지 한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 논문의 소통과 이런 방식의 소통은 또 다르다. 결국 인간의 감정을 가지면서 학문의 세계가 함께 옮겨가야 하는데 글만 읽고는 어렵다. 여기에서 소통이 시작된다."

책 <정의란 무엇인가?> 인기의 원인을 한편에서는 편집과 마케팅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자기계발서 형태의 인문학 책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반응했다는 말이다. 국내 인문서도 좀 더 쉬운 형식으로 풀어서 쓰면 폭발적으로 반응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

"붓글씨로 예를 들면 마지막 최고의 단계에서 붓글씨 쓰는 사람이 어린이 글씨를 쓴다. 근데 어린이는 그 글씨밖에 쓰지 못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말하는 시기를 지내고 나면 내용은 깊되, 표현은 쉬운 글을 쓰는 단계가 온다. 어렵게 글을 쓰는 건 젊은 학자들의 잘못이 아니고 누구든지 지나야 하는 단계라고 본다. 퇴계든 율곡이든 젊었을 때의 날카로움과 나이든 후의 노련함은 다르다. 다만 자신의 학문이 어디를 걷는다는 걸 아는 건 필요하다. 각 단계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만 있으면 잘못된 게 없다. 학문의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 시기에 쉽게 쓰고 쉽게 말하면 정말 어려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단계가 된다."

웹진 이외에 민연에서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 있나?

"문화학교라는 대중 강연이 운영되고 있다. 연구소 학자들이 밖으로 나가 강연하는 기획도 갖고 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대학원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http://rich.ac)는 해외에서 더 널리 알려졌다. 이 연구소가 출범하며 시작한 프로젝트 '대중독재'는 이미 영어로 번역돼 세계 유수 대학에서 소개됐다.

최근 연구소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주제는 '트랜스내셔널'이다. 철학, 역사, 문학, 사회, 정치, 문화 등을 특정국가의 경계에서만 바라보는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인문학 흐름이다. 연구소는 트랜스내셔널리즘 연구 네트워크를 결성하는 등 이 분야의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올해 가을학기부터 아예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를 대학원에 개설한다.

"트렌스내셔널을 주제로 역사, 철학, 문학 등 통섭적인 학문체계를 가르친다는 게 주요 골자입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3년 전부터 진행됐습니다."

이창남 HK연구교수의 설명이다. 국민국가와 학제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교육으로 지구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만든다는 것. 요컨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가 20대 청춘들을 '종합 교양인'으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고, 고려대 웹진 민연이 대중과 인문학자들 간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면, 한양대 트랜스내셔널대학원은 21세기형 신(新)인문학도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커리큘럼은 '번역과 비교', '트랜스내셔널 문화연구', '지식의 고고학' 등 기존 대학의 전공학과를 뛰어넘어 마련됐다. 연구소 측은 "교수들의 옴니버스식 강좌들을 실험적으로 개설해 시너지 효과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협동과정으로 출발해 우선 석사 과정을 운영하는 이 대학원에서는 모든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해외대학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한 다양한 경험 축적과 다중적 언어능력 체득 기회를 부여할 예정이다. 연구소는 지난 22일 공개 설명회를 갖고 임지현 소장, 정다함 HK연구교수, 박선주 공동연구원이 대학원 과정의 강연을 선보였다.

이창남 교수는 "학부제로 바뀐 이후 대학에서 인문학에 대한 인기가 떨어졌다. 대학원 진학률도 90년대와 비교해 떨어졌는데, 인문학의 구조적 틀을 쇄신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트랜스내셔널 과정을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도 비교역사연구소 네트워크를 많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외 교류로 연구 성과가 눈에 띄면 다시 인문학이 활성화 될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중과 소통을 위해 시민강좌를 할 계획도 갖고 있지만, 우선 대학원 과정을 마련해 학문 후속세대를 키우고 저변을 확대시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