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성 갖춘 디자이너들, 백화점과 동대문 사이 새로운 제안패션 한류 기본은 내수시장… 편집매장 시스템 등 개선 필요

지난 3월, 올 가을·겨울 트렌드를 전망하는 서울패션위크가 열렸다. 최근 패션 한류 붐을 타고 거의 매 시즌 새로운 광경을 연출하는 서울패션위크지만 이번 쇼에서는 새삼 놀라운 장면이 목격됐다. 런웨이에서 모델이 입고 나온 옷과 관객석 맨 앞줄에 앉은 여성의 옷이 거의 비슷했던 것. 둘 다 바닥에 닿을 만큼 긴 롱 스커트에 스니커즈를 신고 위에는 레이스로 만든 티셔츠에 물 빠진 데님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심지어 머리까지 흐드러지는 웨이브를 하나로 질끈 묶은 동일한 스타일!

그들만의 세상을 깨고 나오다

기자가 위의 일을 사건으로 기록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대중과 서울패션위크가 그려온 평행선 때문이다. 서울패션위크가 스파(SFAA: 서울패션아티스트협회)와 분리되기 전, 서울시와 지식경제부, 패션협회를 둘러 싼 주도권 다툼 속에서 섬약한 디자이너들은 넌더리를 냈다. 당시 스파 회장은 외부의 간섭에 불쾌해하며 말했다.

"지금까지도 우리끼리 잘 해왔다."

그의 '우리끼리'란 말에는 그간 한국 패션 디자이너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서울컬렉션은 그들만의 축제였다. 옷을 사러 온 바이어는 거의 없었고 지원사였던 롯데백화점 바이어만이 예의상 얼굴을 내밀었을 뿐이다.

패션디자이너 스티브제이 & 요니피
교수님에게 공짜 표를 받은 패션 학도와 '패션쇼 구경 좀 하자'며 기웃대는 일반인들이 관객의 전부였다. 쇼에 나왔던 옷들은 시장에서든 거리에서든 영원히 다시 볼 일이 없었다. 서울컬렉션에서 나온 옷을 가지고 다음 시즌 트렌드를 전망하는 기자도 없었다. 그러나 불과 5~6년 만에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스티브 제이와 요니 피는 최근 국내 디자이너 중 스타 가능성이 가장 큰 디자이너 듀오다. 국내에서 컬렉션을 연 횟수가 10회도 채 안 되지만 그의 쇼에는 해외 바이어, 국내 백화점 바이어, 아이돌 스타, 패션지 편집장 등 실제로 한국 패션계를 움직이는 유력 인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지난해 12월 만난 스티브 제이는 길거리에서 자기가 만든 옷의 '짝퉁'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정말 제 옷인 줄 알았어요. 하늘색 재킷이라서 특이한 디자인이거든요. 그런데 뭔가 다른 것 같아서 자세히 보니 카피 제품이더라고요."

그는 법적 조치를 생각 중이라고 말하면서도 이상한 방식으로 대중성이 입증된 것 같다며 웃었다. 국내 디자이너의 카피캣이라니. 돈 주고 보라고 해도 귀찮아하던 국내 디자이너의 옷을 팔고, 사고, 입다 못해 베끼는 시대가 왔다.

블루핏과 스티브 제이 & 요니피 콜라보레이션
비즈니스형 디자이너의 출현

"상업성을 갖춘 디자이너가 출현한 것은 대략 2007년 경으로 추정됩니다."

가로수 길에서 를 운영하는 김정홍 사장의 말이다. 는 해외 신진 디자이너와 국내 디자이너의 옷을 함께 파는 편집 매장이다.

그에 따르면 2007년 태동한 '비즈니스형 디자이너'는 2008년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대부분 미국과 파리, 런던 등으로 유학을 가서 졸업 후 현지에서 약간의 비즈니스 활동을 한 뒤 귀국한 이들이다. 현재 30대인 그들은, 백화점에 질리고 동대문의 '싼티'에 짜증이 난 고객들에게 'something new'를 제시했다.

"해외 신진 디자이너만으로도 새로움에 대한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냐고요? 국내 디자이너가 줄 수 있는 건 새로움뿐이 아니에요. 핏, 컬러, 길이, 소재 등 한국인의 체형과 취향, 한국의 기후 환경에 맞춘 옷을 만드는 데에는 국내 디자이너를 따라갈 수 없죠."

현재 매장과 매출의 절반은 국내 디자이너들이 차지하고 있다. 'Jo5'라는 디자이너는 올해가 첫 시즌임에도 불구하고 매출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한국 디자이너라고 딱히 더 싼 것도 아니다. 매장 지하에서는 그의 실크 블라우스가 36만 원에 팔리고 있다.

물론 최근의 젊은 디자이너들이 모두 성황리에 옷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비자들에게 익숙하게 이름을 알린 국내 디자이너는 불행히도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렇다면 잘 팔리는 옷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디서 본 듯 하지만 본 적 없는 옷"

신세계 백화점 최재혁 바이어는 잘 팔리는 디자이너 옷의 특징을 위와 같이 설명했다. 그는 최근까지 국내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편집숍 '블루핏'을 이끈 사람으로, 백화점이라는 가장 보수적인 유통에서 한국 디자이너들의 상업성을 증명하는 성과를 거뒀다.

"눈에 익은 듯하지만 디자이너의 색깔이 묻어 있는, 그런 옷이 필요해요. 보통 전자가 되면 후자가 안 되고 후자를 달성하면 전자를 놓치죠."

2011 F/W 쟈니헤잇재즈
이는 편집숍 므스크에서 좀 더 자세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국내외 남성복 디자이너들의 옷을 판매하는 므스크에서 요즘 가장 뜨는 스타 브랜드는 디자이너 안태옥의 다. 아는 사람만 안다는 그의 옷은 디테일의 숨은 그림 찾기라 할 만큼 곳곳에 디자이너의 세세한 터치가 가미돼 있다.

그냥 보기에는 면으로 만든 흰색 캐주얼 셔츠지만 칼라를 고정하는 단추를 안으로 숨겨 놓는다거나, 셔츠 아랫단에 다리 사이를 통과하는 끈을 덧대 입었을 때 여성들의 바디 수트처럼 상의가 제 위치에 고정되도록 하는 디자인이 주특기다.

오랜 남성 마니아층을 보유한 전경빈 디자이너의 역시 겉보기엔 짙은 에메랄드색 재킷이지만 안에는 눈이 시리도록 샛노란 바이어스를 솔기마다 대서 입는 사람만 알 수 있는 미묘한 만족감을 준다. 소비자들은 이 작은 차이에 돈을 지불하기 시작했다.

"트렌드를 따라가면서도 정작 디자인은 자주 손이 가도록 편안하게, 여기에 자기 색깔까지 충실히 녹여내는 디자이너들이 있어요. 이들이 주로 매출 톱을 이루고 있죠."

므스크 민수기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요즘 디자이너들은 '아티스트로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해방됐다. 외부와의 호환성. 이는 최근 잘 팔리는 디자이너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갤러리아 GDS
"이전에는 디자이너들이 선생님이었죠. 최고급 소재를 가지고 자신들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데 몰두했어요. 의지가 강한 만큼 소통도 힘들었죠. 아무리 티셔츠가 유행해도 그런 옷은 디자이너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이수진 바이어의 말이다. 1999년부터 국내 디자이너들의 인큐베이팅 역할을 자처했던 편집 매장 GDS에서는 현재 최지형 디자이너의 쟈니헤잇재즈, 김재현 디자이너의 쟈뎅드슈에뜨, 주은주 디자이너의 토크서비스, 스티브제이&요니피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중 지난해 말 서울시의 글로벌 패션 브랜드 육성 프로젝트에서 최우수 디자이너로 선정된 최지형 실장은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쇼가 끝나면 백화점 바이어뿐 아니라 매장 매니저까지 전부 모아 놓고 품평회를 연다.

모든 스타일을 늘어 놓고 가격대가 합당한지, 각각의 세부 장식들은 시장성이 있는지에 대해 외부의 평가를 듣고 색과 디테일을 조정한다. 비즈니스를 저해하는 요소는 과감하게 빼는 것도 망설이지 않는다. 이수진 바이어는 향후 이와 같은 품평회 시스템을 정착시킬 것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집단 지성의 세대여서일까? 요즘 디자이너들 중 이를 간섭이라고 여기는 이는 없다. 스튜디오 케이의 디자이너 홍혜진은 외부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브랜드를 아예 집단 프로젝트로 바라보고 있다.

플로우
"처음부터 스튜디오 케이를 디자이너 개인 브랜드라고 생각하고 만들지 않았어요. 한 브랜드에 필요한 창의성과 감성은 꼭 한 사람에게만 나와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제가 만약 향후 대중과 호흡하는 능력에서 문제를 보인다면 다른 사람이 이 브랜드의 정체성을 이어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남성복 재희신의 디자이너의 신재희는 자칫 단기 비즈니스에 치우칠 수 있는 작금의 패션계 상황에서 가장 신중한 편에 속한다. 오리지널리티와 철학, 디자이너가 지켜야 할 고집에 대해 역설하는 그가 최근 주력하는 것은 전문 경영인을 찾는 일이다. 그의 꿈을 깨워 줄 사람이 아니라 그가 더 꿈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사람을 물색하는 것이다.

"제정 분리 같은 거죠. 옷을 만드는 사람이 옷을 파는 것은 제사장이 정치를 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옷은 만드는 동안에는 제사의 영역에 속하지만 만든 옷을 뿌릴 때는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모든 디자이너들은 비즈니스 마인드를 갖춘 파트너를 필요로 해요. 우리를 가르치라는 거죠. 지금 이 역할의 일부를 편집 매장의 바이어들이 해주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를 가르쳐라

한국 사람들이 한국 디자이너의 옷을 사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토종 패션의 승리'나 '패션 사대주의 청산'이라며 기뻐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다. 국내 디자이너들의 내수 시장 개척은 패션 한류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 민수기 사장은 국내 영업의 중요성에 대해 주장했다.

므스크 샵
"서울시에서 뭔가를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해외 바이어와 디자이너를 연결시켜주는 데 모든 노력을 다 쏟고 있는데 내수 시장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디자이너는 바깥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해외 바이어와 언론을 초청할 예산을 좀 나눠서 생산 시설에 투자하는 것이 차라리 훨씬 효과적일 겁니다."

똑똑한 젊은 디자이너들과 몇몇 의식 있는 바이어, 대중의 감각 진화로 인해 국내 디자이너들이 주목 받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실상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한 디자이너는 해외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며 유럽 패션계에 화려하게 데뷔했지만 정작 바이어가 요구하는 물량을 제때 내놓지 못해 수주가 취소되고 말았다. 독특한 패턴과 소규모 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독립 디자이너들은 대규모 어패럴 회사에게 밀리고 치여 고비용과 기다림을 감수해야 한다.

"디자이너들의 국내 영업이 자금 확보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내공을 쌓는 거죠. 생산 시스템을 닦아 놓고 대중의 요구에 대처하는 법을 배우고 일을 분담할 파트너를 갖추는 것. 그렇게 병아리에서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 해외에 나가야 온갖 변수와 악조건 속에서도 견딜 수 있습니다."

한창 기세를 탄 국내 디자이너들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은 국내 편집 매장의 시스템이다. 해외 편집숍의 경우 거의 대부분이 디자이너의 옷을 사와서 매장이 재고까지 처리하는 사입 시스템이지만, 국내는 전부 위탁 방식으로 운영된다. 일단 옷을 가져와서 팔고, 안 팔린 옷은 반품하는 방식으로 디자이너는 재고를 전부 떠안아야 한다.

언바운디드 어위
이 구조는 2007~2008년경 한창 유행하던 '백화점 내 디자이너 편집숍'의 불씨를 꺼뜨리는 원인이 됐다. 대규모 유통에 맞게, 그리고 갑을 관계에 익숙하던 바이어의 위상에 맞게, 백화점 측은 빨리빨리 많은 옷을 요구했고 재고의 부담을 견딜 수 없는 디자이너들은 백화점을 등졌다.

백화점만 폭군은 아니다. 최근 매장을 늘리며 급격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한 편집 매장은 얼마 전 '모든 재고 부담은 디자이너가 진다'는 내용을 포함한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다. 디자이너의 색깔을 무시한 대중 없는 바잉과 매장 구성에, 디자이너들은 "제2의 백화점이냐"며 불만스러워하지만 그나마 번화가에 위치한 매장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거래를 계속하고 있다.

최근 일부 백화점 편집숍이 공생관계를 표방하며 디자이너들을 배려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지만 위탁 시스템은 여전하다. 지금 유통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소진될 경우 못 팔 것을 각오하고 적게 수주하는 것, 또는 매장 인테리어와 매니저 고용 등 부대 비용을 부담시키지 않는 것 정도다.

사실 판매만 보장된다면 사입은 위탁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식이다. 월 매출 5000만원을 올리는 매장의 경우 위탁으로 판매를 해 30~35%의 수수료를 받는다면 1000만 원 가량의 수익을 얻게 되지만 사입으로 진행하면 3000만 원이 매장 몫이 된다.

"디자이너와 매장, 양쪽 다 자신이 없는 거죠. 국내 편집숍 중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정확하게 옷을 바잉해 고객에게 판매할 수 있는 곳이 얼마 없습니다. 디자이너들도 자기 옷을 다 팔 자신이 없고요. 백화점을 제외한 대부분의 편집숍들은 지점 없이 매장을 하나만 가지고 있거나 재고를 쌓아 둘 창고도 없을 만큼 열악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게만 희생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이죠."

핏보우
국내 디자이너들은 이제 막 내수 시장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유례 없는 국가적 지원에 힘을 얻은 패션계에서는 어디에서 이렇게 많은 디자이너들이 있었는지 모를 만큼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쏟아져 나와 편집 매장 한 켠에 자신의 행거를 넣기 원한다. 그들이 바람처럼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를 이끌었던 우희원 바이어는 매장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전에 유통사가 디자이너를 대하는 태도는 다소 보호하고 키워주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소위 쿼터제 같은 거죠. 물론 여전히 그런 시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유통사 스스로가 그들을 한국 디자이너가 아닌 인터내셔널 디자이너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객들이 그렇게 인식하지 않더라도 매장이 고객을 리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꾸준한 감성으로 신뢰를 주고 제안한다면 고객들도 받아 들일 겁니다."


스펙테이터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