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 오디션 열풍 영향… '관객평가단', '크라우드 펀딩' 등 달라진 위상 실감
어떤 경우엔 관객들의 '심판'만으로 무대 위에 선 자들의 운명이 판가름나기도 한다. 객석을 내려다보며 군림했던 거만한 스타도, 경력 10여 년의 베테랑도 이제는 벌벌 떨며 관객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홍수 속에서 공연자와 관람자의 위상은 이미 역전됐다. <슈퍼스타 K> 신드롬에서 촉발된 각종 경연 프로그램들은 청중 또는 시청자의 평가에 가장 큰(혹은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있다. 청중평가단의 존재를 무시하며 시청자의 '역린'을 건드린 <나는 가수다>는 초유의 제작 중지 사태까지 빚으며 '관객 모독'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공연계에서도 관객에 대한 대접이 달라지고 있다. 최근 가장 큰 이슈인, 관객이 공연자나 작품의 수준을 평가하는 시스템은 각 작품이나 행사마다 '배우심사단', '관객평가단', '시민평가단' 등의 이름으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아예 기획과 투자 단계부터 관객의 취향과 요구에 초점을 맞춘 펀딩 시스템도 등장했다. 한 마디로 진정한 '관객의,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공연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르를 막론하고 모든 공연의 전제조건에는 '관객'이 있지만, 사실 관객은 오랫동안 '차려진 밥상'을 맛있게 먹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이는 그동안 대학로 연극의 오랜 불황의 원인이기도 했다. 관객의 미적 취향이나 평가를 외면한 작품들은 필연적으로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TV의 공연 프로그램들이 지금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만들게 된 것도 이런 일방향적 공연-관람 방식을 버린 시점과 맞물린다. 결국 주도권을 공연자나 전문가들에게가 아니라 철저히 관객에게 넘겨주면서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오랫동안 공연되며 관객의 입에 회자되는 작품들은 역시 공연 바깥에 머물던 관객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대표적인 예가 피터 한트케의 <관객 모독>이다. 시대 상황에 따라 형식이나 내용도 무한히 변주되는 이 작품은 제목과는 달리 '관객이 원하는데~'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할 정도로 관객의 눈치를 살피는 연극이다.
4월 26일부터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시작한
공연계에도 출현한 관객평가단
최근 관객들의 위상 변화는 공연 바깥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투자와 배우 선발, 작품 평가까지 공연의 전 과정에 개입하게 된 관객의 위상은 전문가 그룹이 맡고 있던 영역을 공유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는 작품이 공연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의 시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방증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객평가단의 등장이다. 방송가에 불어닥친 오디션 열풍은 공연계까지 퍼졌다. <지킬 앤 하이드>, <드림걸즈> 등을 제작한 오디뮤지컬컴퍼니는 지난해 새로운 오디션 프로그램 '뮤지컬 아이돌 프로젝트'를 통해 이달 초 개막한 뮤지컬 <그리스>의 무대에 설 배우들을 선발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연은 시작됐지만 오디션은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배우이자 지원자들의 실제 공연을 본 관객들의 반응은 그대로 그들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홍보팀의 신성희 씨는 "애초 이 단계에서 관객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심사위원으로서 투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기획했지만 이번만은 전문가 평가로 하기로 했다. 다음 작품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평가단을 참여시키는 계획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팬에서 투자자로, 다양한 변신
배우나 작품에 열광하는 관객들을 공연 환경에 참여시키는 방안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니터링 제도였다. 많은 공연제작사들은 충성도가 높은 관객층을 선발해 무료로 공연을 보여주고 이들로부터 장단점을 파악해 다음 공연에 반영하고 있다.
최근엔 이런 모니터링 시스템이 첨단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와 만나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대학로의 장수 공연작인 연극 <늘근도둑 이야기>와 <아큐 어느 독재자의 고백>은 얼마 전 트위터 시사회를 열어 실시간으로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는 이색적인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난 3월 28일 첫 번째 만남에서는 연극 <디너>를 공연한 정승길이 선배배우인 김뢰하와 함께하며 관객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두 번째 만남인 4월 25일에는 여러 연극에서 다채로운 배역을 소화해내고 있는 극단 가변의 임정은이 <사라-0>을 공연한 뒤 관객들과 친근한 만남을 가졌다.
언뜻 보면 기존의 팬클럽 활동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여기에는 관객의 마음을 잡기 위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한국연극협회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일반 관객들의 연극에 대한 애정을 고취시키기 위해 공간 지원(대학로 '예술가의 집')과 협찬사 후원까지 제공되는 등 '공연 살리기'를 위한 취지가 엿보이는 것이다.
한편 얼마 전 런칭한 크라우드 펀딩은 관객의 위상 변화를 가장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증거다. 예술이 정부나 기업 등 특정 권익 단체의 주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향유자인 일반 국민들이 참여해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출발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지난 4월 14일 시작한 이 펀딩을 시작으로 관객들은 이제 자신들이 원하는 맞춤형 예술작품을 만날 날도 꿈꿀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런 관객의 위상 변화가 무조건 낙관적인 전망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힘이 세졌다고 해서 갑자기 비평적인 안목까지 갖췄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이정 연극평론가는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소수의 스타에 대한 팬덤이나 제한된 취향의 향유를 위해 공연예술을 선택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시대는 관객들 사이에서 동시대 공연예술을 예술적으로 받쳐줄 '새로운 관객'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덧붙이며 긍정의 가능성도 함께 내비쳤다.
송준호 기자 trista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