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할 때 '급여는 면접 후 협의'란 말은 너무 적은 금액이라 지금은 말해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를 원함'은 월급을 적게 줘도 참을 수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뜻이다."

한 직장인이 자신이 겪었던 어처구니없고 불합리한 회사 생활을 담은 책을 펴냈다. 제목도 솔직하게 'Office Tragic Life'다.

어떤 어른은 "학교, 학원, 학습지 등 학업 노역 때문에 동네 친구들과 하루 종일 뛰어 놀아본 기억도 없이 꾸역꾸역 성장하는 우리 시대 아이들을 위해" 동네 아이들이 함께 줄넘기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엮어 '긴 줄 놀이'를 냈다. 부록으로 진짜 긴 줄이 들어 있다.

저자 자신의 갑상선 암 수술 경험을 되살려 쓴 '갑상선 암 치료 안내서'가 있는가 하면, '내 방 여행'을 컨셉트로 창가의 꽃병, 자신의 발가락과 떡 진 머리, 먹다 남은 귤 따위를 찍은 사진집이 있다.

"좋은 소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황금귀는 도대체 어떠한 귀인가?"라는 주제로 오디오 커뮤니티에서 벌어진 황금귀 논쟁을 다룬 책도 눈에 띈다. 제목은 'M.A.M.A', 'Machine o' Machine'의 약자로 기계와 테크놀로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잡지다.

이 기상천외한 책들이 모여 있는 곳은 서울 홍대 앞에 위치한 KT&G상상마당 갤러리다. 여기서 독립출판물 전시 'ABOUT BOOKS'가 열리고 있다. 기존 출판 제도 바깥에서 창작자 스스로 기획, 제작한 책들이 전시, 판매된다. 총 150팀이 400여 종의 출판물을 선보였다.

이 전시를 기획한 시각예술팀 조은비 씨는 "최근 2~3년간 창작의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은 독립출판물은 창작자들이 일상 속에서 직접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다양해진 독립출판의 지형

독립출판이 아예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최근 의미 있는 문화적 현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매체 환경 변화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스스로 출판물을 디자인할 수 있고, 낮은 비용으로 소량 디지털 인쇄할 수 있는 기술적 인프라가 대중화된 영향이 컸다. 여기에 디지털 매체를 통해 확장된 창작자의 자기 표현 욕구와 종이 매체에 대한 재조명 같은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작용했다.

지난해 12월 KT&G상상마당에서 '독립적 목소리, 잡지를 말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포럼에서 문화평론가 김봉석은 "독립잡지를 하겠다, 독특한 콘텐츠로 미디어를 만들겠다는 욕망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통해 개개인의 취향은 세분화되고 정보를 구하는 것도 쉬워졌는데, 이런 것을 타인과 교환하거나 공유하고 싶은 욕망은 매스미디어가 충족해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독립출판의 지형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장 잘 알려진 범주인 독립잡지뿐 아니라 미술 전시의 결과물로서의 출판물, 혹은 책의 형태를 빌린 미술 작업 등이 각각의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올해로 12주년을 맞은 '싱클레어'와 7주년 된 '보일라' 등은 독립잡지의 산 증인이다. 그래픽 디자인을 다루는 '그래픽'과 패션 잡지 '나진', 사진 전문지 '블링크' 등도 각자의 영역에서 화제가 된 독립잡지들이다. 젊은 세대의 이슈를 진지하고 재기발랄하게 제기해온 '헤드에이크'가 있는가 하면, 대중문화에 초점을 맞춘 'F.OUND'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개념미술이 현대미술의 중요한 영역이 되면서 언어를 다루는 미술 작업의 한 형식으로서의 출판물도 늘어났다. '찌라시'에서부터 드로잉북, 사진집은 물론 가짜 연대기, 가이드북 등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디어버스', '라운드어바웃', '스노우맨', '워크룸프레스', '스펙터프레스' 등 큐레이터와 작가가 만든 출판사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ABOUT BOOKS'에도 미술과 출판의 접점을 탐색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출판물 형식의 작업들을 전시로 재해석한 <셀 수 없는 모음>이 열리고 있는 것. 이 전시는 미술이 출판과 만나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또 작가들이 왜 출판물 형식을 선택하는지를 드러내 보인다.

윤지원, 이수진 작가의 '1 week, 1 year'는 1년간 작업물을 주고 받으며 번갈아 진행시킨 작업. 작업이 진행된 과정은 출판물로 기록했고, 오브제들을 갤러리에 전시했다. 출판물 자체가 작품일 뿐 아니라 전시의 매뉴얼인 셈이다.

김영글 작가는 한쪽 벽면에 짧은 이야기 '벽'을 적어 넣었다. 벽, 나무, 새, 유리창, 보따리 장수 등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단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긴 문장이 되어 간다. 그리고 같은 내용을 책의 형태로 만들었다. 같은 내용이지만 벽을 따라 걸어가며 보는 것과, 책장을 넘기며 읽는 것은 다르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텍스트를 다루는 미술적 방법에 대한 실험이다.

책을 매개로 한 새로운 문화의 가능성

미디어버스가 운영하는 독립출판물 서점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는 틈틈이 미술 작가와 디자이너의 강연, 대담 등이 열린다. 지난 3월부터는 현대미술, 디자인, 건축 관련 원서를 읽는 스터디 프로그램 '리딩룸'이 진행되고 있으며 5월13일부터는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 파울 레너에 관한 책 '파울 레너: 타이포그래피 예술' 출간을 기념하는 전시가 열린다.

이는 더 북 소사이어티가 단순히 책을 판매하는 곳을 넘어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가 나누어지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더 북 소사이어티의 사례는 독립 출판이라는 문화적 현상이 단지 책이 출간, 유통되는 방식의 다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이를 통해 글을 쓰고 읽는 행위의 의미, 독자와 책의 관계, 정보와 지식이 전달되는 방식까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독립출판을 하는 이들이 '독립'이라는 말에서 풍겨 나오는 저항적 뉘앙스를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미디어버스, 더 북 소사이어티의 구정연 큐레이터는 "기존 출판 제도에 반기를 드는 것이 아니라, 큰 시장에서 다룰 수 없는 틈새 컨텐츠를 드러내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소규모출판', '자주출판'이라는 말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기술과 사회의 변화가 책과 정보, 언어와 지식의 의미를 바꾸고 있는 지금, 독립출판은 개개인이 자신의 취향과 경험을 찾아가는 문화적 방식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