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색채로 교향악단 색깔과 품격 좌우하는 중요한 위치기초교육 부실, 평생 계약직, 경제적 불안, 연주 부실 악순환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
지난 3월 초, 드보르자크와 브루크너의 작품을 연주하는 의 음색은 그야말로 찬란했다. '금빛향연'이란 수식어가 자주 사용되는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리카르도 샤이의 지휘봉에 따라 생기에 가득 찬 음색을 뽑아냈다.

음에도 색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게반트 하우스 오케스트라와 같은 연주를 한국 오케스트라에서는 좀처럼 맛볼 수 없기에 그날 연주가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200년을 훌쩍 넘긴 세계 최고(最古)의 오케스트라와 이제 겨우 66년 밖에 되지 않은 국내 오케스트라의 기량 차를 두고 우둔한 비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양적으로 증가하는 국내 오케스트라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한번쯤 현재의 실정을 점검해보는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국내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취약한 악기 파트는 늘 관악기로 지목되어 왔다. 지휘자 정명훈이 서울시향에 부임해 가장 먼저 한 일도 관악기의 기본기를 다지기 위해 'SPO 우드윈드 아카데미'를 설립한 일이다. 재능 있는 관악기 연주자를 발굴하고 양성하기 위해 2007년 5월 열렸던 이곳은 국내 대학에 재학 중인 목관악기 전공생을 선발해 강도 높은 앙상블 훈련을 실시했다.

역량 있는 관악기 주자를 배출하고 우수한 연수생을 교향악단의 객원단원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을 위해 마련된 교육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프로그램을 이끌던 폴 메이어의 계약기간 만료로 아카데미도 2009년 종료되었다.

트럼본
취재를 통해 만난 국내 한 관현악단의 단원은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금관악기의 위력을 느낀 적이 있다. 타 교향악단의 수석 연주자와 협연을 통해 트럼펫에서 그처럼 우아한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천국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맛 봤다"는 고백을 했다.

관악기 주자의 기량이 오케스트라의 색깔과 품격을 좌우한다는 말은 과히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날 연주의 성과는 관악기 연주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관악기 연주는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객석에서 바라볼 때 좌우에는 수많은 현악기가, 뒤쪽으로 타악기가 도열한 가운데, 관현악단의 중앙을 차지하는 악기는 관악기다. 오보에의 음을 받아 악장이 오케스트라의 음을 조율하고, 관악기를 파트 별로 몇 대를 포함시키느냐에 따라 2관, 3관, 4관 등의 편성이 이루어진다.

관악기가 많아질수록 다양한 색채의 음악적 구현이 가능해진다. 관악기 주자는 한 명 한 명이 솔리스트의 자세로 임해야 하기에 '오케스트라의 꽃'으로도 불리지만 그만큼 각자의 책임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관악기, 국내 클래식 음악계 현실의 복사판

호른
관에 숨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관악기는 목관악기와 금관악기로 나뉜다. 당초 악기가 만들어진 재료에 따라 그렇게 분류되었지만 목관악기 중 플루트는 이제 대부분 금속으로 만들어진다.

관악기는 손은 물론 들숨과 날숨으로 호흡을 조절해야 할 뿐 아니라 덩치도 적잖이 커서, 피아노나 현악기처럼 어릴 때부터 배우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그 중에서도 크기가 작은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시작하는 연령이 다른 관악기에 비해 어린 초등학생 정도다.

금관악기 주자의 적잖은 이들은 중고등학교에서 밴드부 활동을 하다 뒤늦게 진로를 결정한다. 공부 기간이 짧고 클래식 기반의 기본기가 다져지지 않은 경우에는 근본적인 기초교육의 부실함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이 상태로는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쉽게 지치고 피로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향의 'SPO 우드윈드 아카데미'와 같은 프로그램이 이 같은 문제를 다소 해소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 교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영재원 제도가 교육상의 근본적 해결책의 하나로 제시할 만하다고도 말했다. 지금까지 현악기나 피아노 분야만큼은 아니더라도, 좀 더 어릴 때 재능을 발견해 탄탄한 기본기를 다지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배치도
관악기의 취약함은 비단 교육적인 면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도 분명 뛰어난 학생들은 있게 마련이지만 또 다른 교육자는 "연주자 2세거나 특출한 재능을 가진 영재들이 적잖이 보이지만, 이들의 재능을 유지시켜줄 환경이 마련되어 있느냐"에는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관악기 파트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문제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점이다. 관악기 파트 연주자들의 솔로 연주가 많다 보니 그 허점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라는 의미다. 외국의 경우 관악기 주자들이 대부분 더블 수석 제도라는 것을 통해 부담감과 피로감을 덜어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국내 오케스트라는 직업적으로 불안한 곳이다. 경제적으로 불안한 단원들은 투잡, 쓰리잡을 뛰어야 하고 이는 연주의 부실로 이어진다. 기량이 빼어난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 활동에 집중하기보다 강단에 서거나 개인레슨 활동을 선호한다.

매년 혹은 2~3년마다 오디션을 통해 계약을 해야 하는, 평생 계약직의 신분이다. 1년간의 테스트 기간을 거치고 종신직으로 임명되는 독일 관현악단과는 대조적인 대우다.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NHK나 요미우리는 수석 단원의 연봉이 1억~2억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에서 오케스트라 수석이란 타이틀은 학교 강사 임용의 지원 자격 정도에 머문다. 국내 단원들은 음악적 욕구에 따라 기량 유지를 위해 각자 노력을 경주하지만 사회적인 보장이 정책적으로 전무하다.

목관악기 왼쪽부터 바순, 클라리넷, 색소폰, 잉글리쉬 호른, 오보에, 플루트
지난 4월에는 110년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미국의 5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법원에 파산보호 신청을 했다. 클래식 음악 단체로 살아남기란, 한국만의 어려움은 아니다.

하지만 질적 성장은 뒤로 미룬 채, 지자체마다 우후죽순으로 창단된 오케스트라는 경제 위기 앞에서 꼼짝없이 예산삭감이라는 쓰디 쓴 잔만 들이키고 있다.

여기에 지자체의 오케스트라단은 정치권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 정권이 바뀌면 관현악단 수석들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지자체장이 바뀌면 지휘자가 바뀌고, 지휘자가 바뀌면 오디션을 통해 자연스레 숙련된 수석단원부터 교체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휘자와 단원들이 상호 믿음을 가지고 꾸준히 함께 가는 곳은 임헌정이 이끄는 부천 시향과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 시향 정도다.

한 전문가는 "이 같은 현실에서는 결국 피라미드처럼 최상위 몇 개만 남고 다 사라지는 결과가 초래될 수도 있다"며 우려했다. 국내 클래식 음악계도 한국 사회처럼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소리의 안정은 신분의 안정과 직결되어 있다. 단원들이 음악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한국 관현악단의 역량을 키우는 기반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지자체의 오케스트라를 합쳐 예산의 절감을 꾀하면서도 안정성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국내 관현악단이 연대할 필요가 있다"며 새로운 해결책 모색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