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안고 떠나는 일상탈출 통해 몸과 마음 재충전

"그냥 직원들한테 일 년에 4~5번 씩 휴가만 주면 돼."

몇 해 전 여름 주말 저녁, 무더위로 지친 일행이 삶아 놓은 양배추처럼 축 늘어져 생맥주를 홀짝일 때 늦게 도착한 친구가 말했다. 땡볕 더위가 절정인 8월 초, 친구는 부산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친구는 모처럼 제대로 쉬었다는 만족에 들떴고, 사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요즘 대세는 7~8월에 에어컨 바람 쐬며 사무실에서 일하고, 놀기 좋은 늦봄이나 초가을에 휴가를 쓰는 거지만 '생활 보수'인 그녀는 아직도 한 여름에 휴가 내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모름지기 사람은 남들 놀 때 놀고, 남들 일할 때 일해야 한다'는 게 이 친구의 신념이다.

어쨌든 친구는 휴가철 남들처럼 휴가 계획서를 내고, 여행을 떠나고, 푹 쉬었다는 안도감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 휴식을 제공한 조직에 대한 애정이 극에 달한다고 말했다.

"직원한테 휴가를 주면 줄수록 기업 생산성도 높아진다니까. 뭐 말하자면 '휴가 일수와 성과는 비례한다' 이런 거지. HR(Human resource management 인적자원관리) 전문가들은 뭐하나 몰라, 이런 거 이론으로 만들지는 않고."

2010 대한항공 여행사진공모전-동상:8월 오아시스/서유정
직원한테 필요한 건 격려보다 휴가와 포상금! 이 친구의 지론이다.

그녀의 일상을 보면 '지금-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그려진다. 이를테면 육아와 집안 대소사 일정에 맞춰 월차 휴가를 쓰고(명절 연휴에 월차 휴가 하루 더 내고 시댁에서 전 부친다는 말을 들으면 내가 다 짠해진다), 남편의 나이와 승진과 연봉에 맞춰 다음에 살 자동차 배기량을 가늠하고, 아이 입학 시기에 맞춰 이사를 가는 것 등등.

이제 친구는 해마다 휴가철이 되면 여행 계획을 세우고, 여행에 필요한 물품과 비용을 산출한다. 한 해는 국내, 한 해는 해외, 몇 년에 한 번은 무리해서 유럽이나 남미 같은 먼 곳으로의 여행. 이 친구를 보며 깨달았다.

'이제 우리도 휴가를 맞으면 여행을 떠나는 구나.'

최근 몇 년 간 언론은 휴가철 마다 해외 여행객이 '사상 최대'를 돌파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 같다. 얼마 전 한 금융투자회사가 자사 직원들에게 '휴가철 날씨만큼 뜨겁게 오를 종목'을 꼽는 질문에 응답자 25%가 여행사 하나투어를 추천했다는 기사는 이제 '휴가=여행'이란 공식이 사람들 뇌리 속에 자리잡았다는 방증이 아닐까?

공간과 장소 사이에서

공간(space)과 장소(place)는 비슷한 말이지만, 미묘한 차이를 가진다. 공간이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곳이라면, 장소는 개인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는 특정한 곳이다. 혹자는 근대이후 인류의 장소는 거의 모두 공간으로 대체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가 발붙인 곳에 대한 애틋한 기억과 흔적을 갖고 산다. 이 향수가 우리를 버티게 하니까.

여행은 경험과 사유, 기억의 루트를 통해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과정이다. 미지의 공간을 개인의 장소로 바꾸기 위해 사람들은 보고 듣고 걷고 먹는다. 사진을 찍고, 메모를 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여행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른 이들의 삶과 그 삶이 이루는 실체적 풍경은 자신을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저 친구처럼,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힘을 얻는다.

'숭고한 장소는 일상생활이 보통 가혹하게 가르치는 교훈을 웅장한 용어로 되풀이한다. 우주는 우리보다 강하다는 것, 우리는 연약하고, 한시적이고, 우리 의지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 자신보다 더 큰 필연성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것 (…) 우리는 그런 장소에서 우리를 초월한 것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러한 장대한 필연성에 복종하는 특권을 누리고 돌아올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일상의 편안함에 안주하고 있을 때보다 여행을 할 때 우리는 더 민감해지고, 어떤 전조(前兆)들에서 더 자주 영감을 받고, 더 계시적인 상상력을 펼쳐낸다. 여행은 우리의 무딘 감수성을 깨운다. 그래서 여행을 마치고 온 사람의 얼굴은 늘 광채로 빛난다.

2010 대한항공 여행사진공모전-동상:7월 소렌토 해변의 여유/이복
헌데 대학 시절 내내 도서관에서 여름을 났던 저 짠순이가, 첫 휴가를 방 안에서 만화책과 보냈던 게으름뱅이가 언제부터 여행을 즐겼던 걸까? 친구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 생활보수를 떠나게 만든 원동력이 뭘까?

여행은 떠남과 돌아옴의 진자운동이다. 여행은 유목과 같지만 다르다. 떠나 방황한다는 점에서 유목이지만, 다시 돌아와 현실의 문법대로 산다는 점에서 유목과 다르다.

"도대체 언제부터 네가?"를 묻는 일행에게 친구는 "잠시 잠깐의 일탈에서 새로워지고 치유 받고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먼 땅으로 떠나기 전, 자신이 이미 본 것을 다시 주목하게 된다고 말이다. 삶은 이렇게 역설적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것이로구나.'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그래서 우리는 여행을 떠나고, 여행을 떠날 휴가를 기다리고, 휴가를 기다리며 일 년을 버텨낸다.

2010 대한항공 여행사진공모전-동상:10월에 예비-비내리는 프라하/김현
8월의 양배추 모임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늦여름, 다시 그 아무개 친구에게 문자를 받았다.

'근데 그 약발, 열흘이면 끝나더라. 다들 놀러가서 이번 달 마감하느라 죽는 줄 알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