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홍대 앞, 이태원, 성미산마을 등 다양한 삶의 방식 제안

#1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는 '엉컹크길'이라고 불린다. 이곳에 오래 산 주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지만, 그 유래는 오리무중이었다.

'' 6월호는 엉겅퀴가 많았다더라, 스컹크가 있었다더라 하는 무성한 소문을 헤치고 그 진상을 밝혀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이었던 윤덕영이 이 일대에 주변 초가집과 대비되는 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을 지었고, 이곳은 훗날 언커크(UNCURK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본부로 사용되었다. 엉컹크길은 바로 '언커크 건물로 가는 길'이었던 것.

아하, 그렇구나. 하지만 또 다른 궁금증이 생긴다. 동네 전설을 추적하는 저 매체의 정체는 뭘까. ''는 서촌 주민 설재우, 최용훈씨가 2천 부 규모로 만드는 동네 소식지다.

#2 올해 상반기 동안 성미산마을을 방문한 사람은 천5백 명이 넘는다. 공식 집계된 숫자만 그렇다. 지나가다 들른 사람, 몰래 돌아본 사람, 친구 따라 온 사람까지 합치면 얼마나 더 많을지 모른다. 서울시 마포구 성산동, 지하철 6호선 망원역과 성미산 사이의 소박한 동네는 요즘 그 매력에 이끌린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이태원 주민일기' 중 이해린의 '이태원 사람들을 만나다. 퇴근길 기자'
가게들부터 특별하다. 한 카페에 들어섰더니 동네 학생이 개발했다는 마늘 쿠키가 진열되어 있다. 벽에는 수십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들이 다 사장이란다. 알고 보니 동네 주민들이 함께 출자해 운영하는 카페. 친환경 밥집, 재사용가게, 마을 극장 등 다른 동네에서 찾기 어려운 가게들이 수두룩하다. 이 마을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일까.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 아파트 광고가 아니다. 동네 얘기다. 젊은 남녀가 소개팅 자리에서 주소를 묻는 것은 귀가 시간을 가늠해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사는 동네가 곧 성장 환경과 집안 분위기, 정치적 성향과 취향 등의 정보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부동산 가치와 학군이 동네의 결정적 구성 요소였던 한국사회에서 동네는 곧 사회적 계급의 지표에 불과했다.

동네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삶의 방식이 획일화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새로 지은 아파트와 대학 진학률을 좇아 이사 다니는 것은 보편적인 삶의 궤적이었다. 아이들은 점점 높아지는 아파트와 함께 자랐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데 익숙해졌다. 예전에 살던 동네는 겨우 몇 년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동네는 삶의 터전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 동네가 달라지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동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주민 스스로 만드는 동네 매체, 동네 기반 문화예술 프로젝트가 많아졌다.

젊은 세대는 좋아하는 동네를 찾아 독립하고 동네 풍경과 이웃, 자신의 일상을 함께 기록한다. 한 동네에 모인 예술가들은 환경을 미화하는 것을 넘어 환경과 소통할 수 있는 일을 벌인다.

이런 흐름은 거주 형태, 삶의 방식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올해 봄부터 문지문화원사이에서 '동네잡지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는 '스트리트H'의 정지연 편집장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1인 가구가 늘면서 아프고 힘들 때 기댈 커뮤니티에 대한 욕구도 늘고 있다. 이런 변화가 동네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워크숍에 참여한 한 연세대학교 학생은 '연대 서문 프로젝트'라는 주제로 잡지를 만들고 싶어 했어요. 자신이 사는 서문 근처에는 식당이 적고 그나마 있는 식당도 비위생적이어서 끼니를 챙기기가 어려운데 이건 혼자만의 고민일까, 주변에서는 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없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이었죠. 생활 속 계기가 동네에 대한 인식으로 확장된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의 설재우 발행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유목생활을 하던 한국인들이 살고 싶은 곳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징조"라고 설명했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학교나 직장 등의 조건이 거주지를 정해주었지만 최근에는 직장과 좀 멀더라도 마음에 드는 동네에 사는 경우가 많아졌죠. 주거 기준이 달라진 것 같아요."

젊은 세대가 홍대 앞, 부암동, 이태원에서 독립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부동산 가치나 교통 때문이 아니다. 이태원에서 "가족 같은 친구들과 모여 사는" 사진작가 사이이다는 "예전엔 스스로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었는데, 시간이 흐른 후 이 시절을 떠올리면 '나의 살던 고향'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촌라이프
동네 문화의 부상은 사람과 관계가 생활의 중심 가치로 복귀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하긴, 삶의 터전에 대해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

스트리트H와 , 동네 이야기를 퍼뜨리다

지난 6월 스트리트H는 창간 2주년을 맞아 전시 <안녕들 하십니까?>를 열었다. 홍대 앞 문화를 꼼꼼히 기록해 온 이 독립잡지의 건재는 그 자체로 동네잔치 감이었다.

홍대 앞 터줏대감인 정지연 편집장과 장성환 발행인이 동네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만들어 온 스트리트H는 그 진정성을 널리 인정받은 지 오래다. 매달 전해지는 알찬 소식들과 정확한 지도는 상업화와 재개발 이슈, 오해의 여지에 둘러싸인 홍대 앞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홍대 앞은 문화의 최전방이었고, 그 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늘 가능성이 꿈틀거리고, 그렇기 때문에 멋진 동네고, 지키고 살려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기억하게 한다.

"홍대 앞을 기록하기 위해 시작했어요. 워낙 변화가 심하니까요. 역사와 사람을 기록하는 것이 이 동네와 커뮤니티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정지연 편집장의 말처럼 기록은 공동의 기억이고, 소통과 연대를 낳는다. 사람들을 부지런히 잇고 어울리게 함으로써 스트리트H는 홍대 앞 문화의 중요한 매개로 자리 잡아 왔다.

방문객과 행인의 호응도 컸다. 외국인에게까지 스트리트H가 친절한 가이드로 소문났을 정도다. 최근에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 스트리트H가 제공한 대형 지도가 걸렸다.

"프랜차이즈 가게들이 들어온 큰 길들은 아쉽지만, 아직 뒷골목들에는 집과 카페가 어우러진 풍경이 있어요. 평일 오전 혹은 해 지기 직전 그런 길을 느긋하게 산책할 때는 홍대 앞에 사는 것이 행복하죠. 인디 밴드의 음악을 늘 접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아요." 홍대 앞 주민의 일상은 당신의 일탈보다 아름답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설재우씨에게는 서울 사람들 대부분에게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고향이다. 급속도로 변하는 서울에서 드물게 변함없는 서촌의 모습은 항상 설재우씨에게 돌아갈 곳이 되어주었다.

작년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설재우씨는 이제 고향에 필요한 일을 해 보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다. 3월부터 매달 나오는 이 월간지에는 서촌의 이슈는 물론, 명소와 역사, 주민들의 자부심까지 담긴다.

40년째 효자동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효대 내과‧소아과 원장은 창간호에서 증언한다. "효자동은 가난한 동네였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었어요." 4월호 표지 모델로는 통인시장 '기름 떡볶이'집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6월호 특집은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 화가 이중섭의 작업실 등 서촌 곳곳의 보물 같은 장소를 잇는 '문화로드'다. 는 주민들도 잘 몰랐던 동네의 가치를 발굴해 준다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서촌은 겸재 정선, 이중섭, 이상 등 수많은 문화예술인이 살았던 곳이에요. 최근 창성동에 속속 디자인 스튜디오, 건축사무소, 갤러리가 생기는 걸 보고 이 동네가 예술적 영감을 주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죠. 인왕산부터 경복궁에 이르는 이 일대에는 자연과 사람이 어울려 있거든요."

설재우 발행인의 장기적 목표는 개발이 아닌, 보존을 통해 서촌의 살림살이와 문화를 활성화하는 것. 거대 자본에 맞서 시간의 지층들을 지키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미국 콜로라도의 한 동네 서점은 대형 서점과 다른 오래된 정취를 내세워 명소가 됐죠. 그리고 동네 예술가들의 작품을 판매해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어요. 서촌에서도 이런 모델을 시도하려고 최근 서촌연구소를 차렸어요. 서촌 투어 프로그램도 진행할 생각이고요. 이미 가이드용 깃발은 만들었어요.(웃음)"

이태원 주민의 기발한 삶 <이태원 주민일기>

9명의 예술가가 이태원에 살았다. 디자이너, 사진가, 메이크업 아티스트… 영역은 각각이지만 인연의 꼬리가 길어 점점 마주침과 어울림이 잦아지던 이들은 어느 날 '일기를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따로 또 같이, 이태원에서의 삶을 기록해보자는 것이 지난 3월 나온 <이태원 주민일기>의 출발점이었다.

방식은 각자의 영역만큼이나 달랐고 기발했다. 일러스트레이터 나난은 아침 산책길에 발견한 식물 주변에 화분을 그려주는 '가드닝'을 했고, 사진가 장진우는 요리에 대한 재능을 살려 이태원 주민들의 집을 찾아 한 상 차려주는 출장 요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사진가 사이이다는 철거 직전에 놓인 자신의 집을 스튜디오로 꾸미고 친구들의 사진을 찍었다. 패션 디자이너 곽호빈은 이태원을 배경으로 자신에게 수트를 맞추어 간 사람들의 사진을 남기고 그 사연을 적었다.

성미산마을축제
공간 기획자 이해린은 퇴근길에 만난 이태원 주민들에게 물었다. "왜 이태원에 사나요?" 이태원에는 재미있는 데가 많다는 이야기, 아리랑 사우나에 가면 동네 소식을 한번에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 외국인들이 참 젠틀하다는 이야기, 사람이 너무 많아져서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들이 술술 풀려나온다. 이태원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태원은 다른 동네에 비해 새로운 건물, 새로운 세대, 새로운 문화가 급하게 들어온 흔적이 없어서 좋았어요. 요즘 새로운 상권이 급하게 개발되고 있는데, 먼 미래까지 지속될 수 있는 건물, 세대, 문화가 형성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민 사이이다의 마음이 혼자만의 것은 아니다.

<이태원 주민일기>는 좋은 동네에는 집과 사람, 관계와 시간의 연속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행복한 삶의 조건이기도 하다. 나난은 "영향을 주는 친구들과 가깝게 산다는 게 제일 좋다"고 고백한다. 그러고 보니 '일기를 써 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드는 시절도 매 순간을 남기고 싶을 때다. 이태원에서 사는 게 얼마나 행복했으면.

지속 가능한 동네의 조건, 성미산마을

성미산마을에는 최근 동네 금고가 생겼다. 11개의 마을 기업이 적금을 붓고, 모인 돈을 사정이 급한 기업에 빌려주는 방식이다. 외양은 대출이지만 실상은 계에 가깝다. 어떻게 이런 시스템이 가능할까. 그만큼 동네 사람들 간 신뢰가 두텁다는 이야기다. 돈독한 관계망이 정치, 경제적 시스템으로 이어지는 곳, 성미산마을은 지속 가능한 동네의 본보기다.

"동네가 나름의 법과 돈을 갖추지 않으면 일시적인 향수의 대상에 불과하게 된다"는 김일현 경희대 건축학과 교수의 말처럼 동네가 안정적인 삶의 터전으로 기능하려면 자치와 자립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

1990년대 중반 공동육아에 뜻을 가진 부모들이 모여 형성된 성미산마을에서는 15년 넘게 다양한 시스템이 시도되어 왔다. 동네 어른들이 함께 아이들을 돌보는 방과후 프로그램, 학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대안학교 성미산학교, 공동 출자한 건강한 먹을 거리 식당, 공연과 전시는 물론 강연과 잔치가 열리고 회의실로도 쓰이는 마을 극장 등은 이곳 특유의 동네 문화를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최근에는 공동 주택을 기획하는 시공사 '소행주(소통이 있어서 행복한 주택 만들기)'가 생겨 첫 결과물을 냈다. 지난 4월 총 9가구가 입주한 공동 주택 '소행주 1호'는 공간 구성부터 평범한 다세대 주택과 다르다.

이웃이 같이 밥을 지어 먹거나 반상회를 열 수 있는 공동 공간이 있고 동네의 방과후 어린이집이 들어왔다. 집과 집 사이 복도는 통행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교류를 위한 공간이다.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끼리 의논해 만든 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성미산마을의 마을일을 총괄하는 (사)사람과마을 위성남 운영위원장은 이곳을 "독립적이고, 간섭 받기 싫어하고 재미없고 지겨운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동네"라고 말한다. 지금 이 마을이 각광받는 것은 그만큼 주류적 삶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뜻이란다.

"목숨 걸고 공부하고, 주변을 돌아볼 여지없이 경쟁해도 일자리를 찾기 어렵고 불안에 시달리는 시대잖아요. 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천천히 살면서도 행복할 수 있거든요. 찾아온 사람들은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하는 힘을 얻고 갑니다."

지자체들이 앞 다투어 마을 만들기 사업에 뛰어드는 현실도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음을 증명한다. 1인 가구가 늘고, 초고령화가 진행되는 한국사회의 미래는 동네로부터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덕분에 성미산마을도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이곳의 삶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정상이고, 일상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게 희망을 북돋는 일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최근엔 마을의 역사를 정리하는 아카이브 작업을 시작했어요. 다른 마을에 인수인계해줄 수 있으니까요.(웃음)"

성미산학교의 옥상에는 제법 울창한 정원이 있다. 새가 운다 싶었는데 근처 성미산에서 날아온 새다. 종종 딱따구리 같은 희귀종도 들렀다 간다고 했다. 이런 동네다. 그리고 그것이 산을 깎아 학교를 세우려는 개발 계획에 맞서 주민들이 성미산 지키기에 나섰던 이유다. 그들은 동네를 살려야 사람도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동네의 재발견 '서울을 큐레이팅하다'

우리 동네도 홍대 앞과 서촌, 이태원과 성미산마을만큼 살기 좋은 동네가 될 수 있다. 첫 걸음은 주민 스스로 동네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연인 관계에서처럼 동네와의 관계도 애정을 쏟을수록 가꾸어나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법이다.

서울문화포럼의 지역문화발굴워크숍 '서울을 큐레이팅하다'는 서울 곳곳의 문화를 찾고 공유하는 프로젝트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를 창조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관심 있는 지역과 주제를 정해 신청하면 심사를 거쳐 선정되며, 전문가 멘토링과 워크숍을 거쳐 아이디어를 실현하게 된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동네 주민으로 거듭나는 첫걸음을 내딛어 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문화포럼 홈페이지(www.scf21.org)에서 참가신청서를 내려 받을 수 있으며 신청 기간은 7월 24일까지, 프로젝트 기간은 7월 28일부터 9월 2일까지다.



박우진 기자 panorama@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