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스트리트 패션 사진가 이반 로딕의 사진집 <페이스 헌터>가 얼마 전 출간됐다.

그의 블로그 명과 동일한 이 사진집에는 뉴욕, 스톡홀름, 베를린, 모스크바, 멕시코 시티 등 전 세계 대도시에서 만난 패셔너블한 젊은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놀라운 것은 여기에 실린 이들의 패션이 마치 한 도시에서 찍은 것처럼 어떤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공통된 분위기를 한 마디로 집어내기는 어렵다. 어울리지 않는 것들을 마구 뒤섞어 입고, 그래서 다소간 거지 같아 보이기는 하지만, 뻔하지 않아서 볼 맛은 나는, 그래도 따라 하기는 어렵겠으나 옷 입을 때 나도 모르게 참고하고 있을 이들의 옷 차림은 결국 '참 범상치 않다' 정도로 귀결된다. 그 묘한 느낌의 정체가 드러나는 곳은 역자의 에필로그 "힙스터가 떴다"에서다.

"이제까지 힙스터 룩이 이렇게 왕창, 한꺼번에 소개된 적이 있을까? 어림잡아 이 책의 90% 이상이 힙스터 룩이다."

그에 따르면 힙스터란 부스스한 머리에 큰 뿔테 안경, 스키진 진에 후출근한 빈티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거나 젊어 보이는 어떤 부류를 일컫는 말이다.

동시대의 주류 문화를 노골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히피와도 비슷해 보이지만 진짜 '날 것'의 느낌 보다는 세련되게 가공된 날 것의 느낌이 강하다. 히피의 머리가 정말 안 감은 머리라면 힙스터의 머리는 깨끗하게 감은 후 왁스로 공들여 비벼서 부스스하게 연출하는 식이다.

히피들은 무리 지어 다니며 "우리는 히피요" 라고 외쳤지만, 힙스터들은 외양도 비슷하고 하는 짓도 얼마 간 비슷하면서 "난 힙스터 아닌데?"라며 무심한 분류라고 비난한다.

이건 전혀 새로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한국의 거리에서도 목격된다. 홍대나 가로수길을 걷다 보면 "대체 이 아방가르드한 것들의 정체는 뭘까?" 싶은 이들을 하루에도 수십 명씩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형 힙스터를 정의 내려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조롱하든 동경하든 그 근거는 확실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유행만큼 역겨운 건 없다"

힙스터들의 속성을 알고 싶다면 홍대로 가는 것이 빠르다. 동남아 맥주나 공정 무역 커피를 파는 가게에 들어가서 위에서 열거한 몇 가지 패션 요소 – 스키니 진, 뿔테 안경, 부스스한 머리, 전체적으로 믹스 매치 – 를 차용한 이들을 찾아내서 물어보라.

요즘 가장 핫한 밴드가 누구냐고. '칵스'라는 이름을 대서 당신의 얼굴에 '그게 뭔데?'라는 표정을 떠올리게 만들었다면 그는 힙스터일 가능성이 높다. 당신이 집에 돌아가 검색창에 '칵스'를 쳤다면 그는 힙스터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다. 웬만한 걸로는 그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알고 있는 인디 밴드 이름을 다 대보라. 그의 표정은 심드렁할 것이다. '십센치'를 좋아한다고 했다가는 아마 일어나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모든 것을 포기한 당신이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터미네이터 2'라고 중얼거리면 그가 돌연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런 지독한 대중 영화를 부끄러움도 없이 베스트로 꼽다니, 너 좀 신선한데?"라고 말하며.

처음 보는 것, 새로운 것에 대한 추종과 경배는 힙스터들의 핵심 정체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힙스터라는 것의 원조가 '흑인이 되고자 했던 백인들'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힙스터에 주의하라>라는 책에서는 힙스터 문화의 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40년대 미국의 재즈 마니아들을 일컬었던 그 단어는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백인 하위문화의 한 유형을 지칭하는 말로 바뀐다. 그들은 흑인 재즈 뮤지션들 특유의 흥겨움과 슬픔, 성애화된 에너지, 정력, 열정에 매혹돼 흑인들의 옷을 따라 입고 흑인들의 말투로 이야기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직도 존재하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볼 때, 벌써 60년 전에 흑인의 쿨함을 공공연히 사랑한 그들의 취향은 트렌드 리더라는 말로는 차마 다 설명할 수 없는, 진정 독한 취향의 족속들이다.

"이 사회가 뭘 세련되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어. 난 이게 좋으니까. 나에게 동의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같이 좋아해도 상관 없어. 물론 아니어도 상관 없고."

'상관 없어(I don't care)'. 이것은 힙스터들의 뇌 구조 정 중앙에 놓여 있는 말이다.

이 해묵은 단어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이다. 의미는 살짝 바뀌었다. 주류 문화 대신 비주류 음악과 패션, 영화를 즐기는 중산층의 젊은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된 힙스터의 라이프스타일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각종 SNS를 통해 전세계로 빠르게 전파됐다.

위키피디아는 힙스터 문화에 대해 '1999년부터 2003년 사이 뉴욕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적 코드를 공유하는 중산층 출신의 백인 젊은이들'이라고 시기적으로 못박고 있지만, 위 책의 역자 최세희 씨는 여기에 반대한다.

"힙스터 문화가 2003년에 끝났다는 말은 당시 대중화된 전형적인 힙스터 패션이 종료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힙스터는 특정 시기의 특정 문화라기 보다는 10년을 주기로 나타나는 청년 대안 문화에 가깝습니다. 록 음악은 죽었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잔존해 있는 록 음악을 찾아내 다시 활기를 불어 넣은 이들은 다름아닌 힙스터들입니다. 음악뿐 아니라 기존의 패션, 음식, 정치가 돌파구를 찾을 수 없을 때 힙스터들은 늘 새로운 것을 들고 나왔어요."

힙스터들 사이에서 유명한 윌리엄스 버그의 벼룩시장
주류, 비주류를 베끼다

힙스터의 취향은 주목 받지 못하는 것을 남다른 안목으로 캐치해 소비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그들이 소구하는 대상은 거의 늘 하위문화다. <힙스터에 주의하라>에서는 페루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힙스터 현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페루의 젊은이들이 언젠가부터 우리나라의 뽕짝에 해당되는 자국의 전통 음악에 열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계기는 뉴욕의 유명한 음반회사에서 페루 전통 음악을 '월드 뮤직'으로 재포장해 히트시킨 것으로, 그때까지 자국의 전통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던 젊은 층은 파티에서 이 음악을 틀어대며 춤을 추었다.

심지어 집 앞 레코드 가게에서 그와 비슷한 전통 음악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이 뉴욕이나 유럽으로 여행을 가는 이들에게 반드시 그 음반 회사에서 나온 페루 음반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뉴욕의 힙스터들이 페루 소년, 소녀들의 취향에 영향을 끼친 단적인 사례다. 물론 그들이 전통 음악의 가락에 맞춰 춤추고 있을 때쯤 힙스터들은 이미 다른 것에 눈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힙스터로 변신한 <해리포터> 등장 인물들
자국의 문화란 익숙하다는 이유로 늘 현지에서는 대접을 못 받는데, 그 오랜 경멸의 역사로 확보된 희소성은 힙스터들의 좋은 먹잇감이다. 최근 젊은 층 사이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끈, 개그맨 유세윤과 음악가 뮤지가 결성한 그룹 'UV'는 자국 문화에 대한 무시를 개그로 승화했다. 페이크 다큐 에서 UV는 아이돌 그룹 빅뱅의 숨겨진 스승으로 출연해 그들의 무대 의상을 타박한다.

"그런 옷을 입고 무대에 나간다고? 제정신이야? 지금 티피코시에 전화할 테니까 빨리 의상 협찬 받아."

90년대에 태어난 사람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이 개그는 티피코시라는 브랜드를 알아야 웃을 수 있다.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이 캐주얼 브랜드는 당시 서태지, 김건모 등을 모델로 기용하며 중고생들 사이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지금의 LG패션이 무려 럭키금성상사 반도패션사업부일 때 출시된 브랜드로,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당시 광고에 등장했던 음악, 패션, 포즈 모든 것이 실소를 자아낸다. 아니, 럭키금성이라는 대목에서부터 (미안하지만) 웃기다. 빈티지와 럭셔리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패션 그룹 빅뱅과 럭키금성 패션사업부의 만남은 웃지 않을 수 없다.

힙스터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 그 태도는 이렇듯 얼마간 자조적이다. UV는 80년대와 90년대의 촌스러움을 숭배하면서 희화화했고, 그에 대한 반응은 얼마 전 열린 지산 록페스티벌에서 UV에게 쏟아진 함성에서 확인됐다. 그러나 최근 광고까지 찍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UV 역시 이미 힙스터들의 목록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그룹 UV
주목 받지 못했던 한국의 근현대 문화는 이렇게 학자가 아닌 힙스터들에 의해 새로운 가치를 부여 받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거리를 휩쓴 할머니 월남 치마, 꽃무늬 블라우스, 그리고 중년층뿐 아니라 젊은 층에도 문화적 충격을 안겨준 쎄시봉 콘서트도 마찬가지다.

"자문화에 대한 힙스터들의 관심과 추종. 이런 기반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의 장기하가 존재했을까요?"

강남 좌파, 그리고 힙스터

미국에서 힙스터를 부르는 또 하나의 명칭은 'dick head'다. 바보, 멍청이라는 뜻의 욕으로, 이런 부정적인 시선을 알기 때문에 아마도 대부분의 힙스터들은 자신이 힙스터로 불리기를 거부하는지도 모른다. 주류 문화에 대항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쿨하고 힙한 이들이 왜 그렇게 욕을 먹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소비자이기 때문이다. 힙스터는 묻혀 있는 것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다는 점에서 바이어와 맞먹는 시장 영향력을 발휘하지만 어디까지나 소비자에 그친다. 힙스터들 중에는 예술가도 있지만 힙스터의 기능에 창작이나 생산은 포함돼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뚜렷한 취향을 가지고 대중이 모르는 카테고리의 소비재들을 열정적으로 소비할 뿐이다.

소설가 김사과는 한 매체에 실은 서평에서 힙스터들을 두고 "더 이상 창조적이며 젊은 반문화/하위문화가 태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존의 반문화/하위문화를 패션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소비하는 최첨단 소비 집단"이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힙스터를 정의하는 키워드는 어떤 브랜드의 맥주, 어떤 브랜드의 옷, 어떤 브랜드의 담배, 이런 식으로 쇼핑 리스트에 가깝다. 그 소비 항목 중에는 유흥과 관련된 것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힙스터에게는 '획일화된 대중문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평가와 '결국에는 자본주의의 틀을 공고히 하는 가장 활발한 소비층'이라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들이 여러 가지 물건으로 남들과 자신을 구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한 경제력(주로 부모로부터 온)을 가지고 있다는 대목에 도달하면 힙스터에 대한 비난은 극에 달한다.

이 분노는 최근 한국 사회의 유행어가 된 '강남 좌파'를 향한 감정과도 닮은 면이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지난 달 펴낸 <강남 좌파>라는 책은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 수준은 강남 못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설명한다.

좌파가 가지고 있는 긍정적 이미지 – 열정, 순수함, 평등주의,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투사 – 는 고스란히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촌에 거주하며 자식들을 상류층으로 키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힙스터의 정체성 중 패션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남 좌파와 힙스터를 동일 인물로 보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직면한 비난과 모순은 거의 동일하다.

대중은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정말로 체제 전복을 원해?' 이 물음 앞에 힙스터는 말이 없다. 록의 저항 정신이 죽었을 때 커트 코베인은 자살로 그것을 지켰지만, 힙스터들은 커트 코베인의 낡은 청바지가 쿨하다고 생각해서 청바지를 찢는다.

그리고 별로 착취당한 것도 없으면서 체제에 대해 냉소하다가 졸업 후 부모의 원조로 쉽사리 지배 계급에 편입된다. 반문화에 대한 '리스펙트(respect)'를 가진 취향 있는 부르주아라니, 확실히 얄밉기는 하다.

그러나 힙스터들이 단지 진정성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세상 모든 것을 키치로 만들어 버리는 과도하게 쿨한 어린 놈들'에 불과할까? 이들에 대한 최신의 평가는 강남 좌파를 향한 사회의 시선에서 감지할 수 있다.

저자인 강준만 교수는 강남 좌파의 부정적 측면으로 권력에 금력에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지려는 욕심쟁이에, 하층 계급의 절박함을 모르는 진정성 없는 좌파라고 말하는 한편 긍정적 측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파워를 가진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할 때 훨씬 더 힘이 세다는 것, 그리고 계층 간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생각해주서 고맙다'는 것.

힙스터들도 같은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뻔질나게 커피를 사먹을지언정 제3세계 노동자들을 착취하지 않는 공정무역 커피를 선택하고, 황학동 구제 시장에서 티피코시와 292513=storm을 찾아내 자국 패션 브랜드의 가치를 역설하며, 채식을 즐김으로써 환경과 동물 보호에 기여한다.

'성인이 아니면 입 닥쳐(saint or shut up)' 식의 도덕적 근본주의로 이들을 대하기에는 그들이 사회에 줄 수 있는 긍정적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강준만 교수는 강남 좌파들을 향해 "일부러 배고픈 척 할 필요는 없지만…공적 영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해소되는 날까지 과도기적 처방 차원에서라도 자신의 욕망을 통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는 식의 일종의 타협안(?)을 내놓았다.

공인으로서 도덕성을 판단 받을 필요가 없는 힙스터들에게도 이것이 적용될 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의 소비 목록 중에 쾌락과 더불어 의식이 있다는 사실로 어느 정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황수현 기자 soo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