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공간은 몸 위한 은신처서 정신 위한 피난처로예술 공간은 공유와 감상, 해석의 장으로 의미가져

"작은 책상. 그저 간단한 지지대가 있는 둥근 판자로, 브로슨 올컷이 딸 루이자가 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루이자의 침실은 집의 앞쪽에 있었고, 책상 양쪽에 있던 창문으로 오차드 하우스의 잔디밭과 아래쪽 거리가 보였다. 그러나 올컷은 맹렬하게 글을 썼고, 원고에서 눈을 떼는 일이 드물었다. 바로 이곳에서 하루에 한 장(章)이라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작은 아씨들>을 썼다."

공간은 이미지다. 나를 포함한 내가 처한 상황까지도 대변해주는 매개체다. 여기서 말하는 공간은 방이나 사무실보다 협소한 단위를 뜻하며, 그 안에서 자리한 분리된 개인 영역이다. 창밖이 내다보이는, 그냥 두 다리를 바닥에 붙이고 설 수 있는 공간이나 벽에 선반을 대고 간신히 앉을 수 있는 곳 등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인을 위한 공간은 그리 넓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 시점에서 왜 공간이 화두가 되고 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공간은 개인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장소가 됐다.

1인 가구 시대가 오면서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자존심이 됐고, 예술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예술가와 관객, 시대나 사상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곳이 됐으며, 창작자들에게는 무한한 상상력과 공상을 늘어놓을 수 있는 자유로운 장소가 됐다. 공간이 갖는 의미는 그야말로 무한해진 셈이다.

최근 출간된 <화가의 집: 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아트북스)나 <걸작의 공간>(마음산책)에서 보인 그들의 공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책 <걸작의 공간> 속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집필공간(사진제공=마음산책)
공간은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동시에 창작의 고민이 구속 받지 않는 유일한 장소다. 거기에는 자유와 평온, 상상력 등이 혼재돼 있다. 공간이 지니는 곳 이상의 그 어떤 이상을 지닌 것처럼.

태초의 공간은 원시의 기원으로 올라간다. 개인의 공간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 피난처와 같은 몸을 숨기는 장소였다면 믿어지는가. 주변의 상황을 감각으로 파악하고 몸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동굴형태의 은신처나 나뭇가지와 그 껍질로 만들어진 오두막 등이 인간에게 주거지 형태로 발전하며 공간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후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인간을 위한 곳이 아닌 신을 모시는 공간으로 발전했다. 공간을 넘어 건축의 기원 가정(假定)을 "최초의 인간에 의해 지어진 원시적 오두막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는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로지에의 이론이 뒷받침한다.

피난처와 신전으로 이어온 공간적 개념은 주거지를 만들고, 또 그 속에서 공간을 형성한다. 특히 19세기 프라이버시에 대한 개념이 확산되면서 사람에 의한 공간의 소유욕은 날로 늘어갔다.

그런데 21세기의 지금도 당시와 전혀 다를 게 없다.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 등의 영향으로 "사생활의 시대는 끝났다"를 외칠지언정 내 공간에서만큼은 자유로운 날개를 원한다. 공간에 대한 소유욕과 집착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한화L&C 칸스톤
1인 가구 시대가 가져온 10평 남짓한 자그마한 공간의 철학은 자유와도 맞먹는 수준의 도발이다. 오피스텔과 원룸이라는 공간이 결국 개인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준다면, 그 원시시대의 피난처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다.

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내 색채가 가미된, 나를 드러내는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간이 '나의'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기에 내 마음대로의 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인 공간, 일상을 버리다

"나만의 공간이 있어야 해."

회사원 박정은(33·여)씨는 집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집을 찾는다'거나 '집을 고르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나만의 공간이 필요해"라고 말한다.

통의동 복합문화공간 '보안여관' 내부
집이 아닌 공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집이라는 피사체가 아니라 공간이라는 이름을 빌려 자유를 갈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집은 간섭의 소굴이고, 내 공간은 활력의 충전소다"고 말한다.

문학박사 나카노 하지무는 "공간이 진정한 의미로서 환경이 되는 것은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했다. 공간이 인간화되는 것을 말하는데, 단단하고 메마르고, 무기적이며 물리적인 공간이 포근하고 촉촉한 인간적인 공간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공간의 인간화라고 해서 결코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어떤 개인의 환경에는 그 사람의 특수성이, 진한 색깔이 반영되어 있다. 즉 공간은 인간이 거주하게 되면서 인간적인 정서를 갖게 되고, 그 개인의 고유 색채마저 담게 된다.

이렇듯 현대인들에게 공간이란 형태적 물체가 아닌 무형질의 그것이다. 사람들은 자유와 사색이 공존하는 지상의 낙원을 꿈꿀 터. 가족 내 간섭, 과도한 업무량과 스트레스에 조금이나마 벗어나려는 의도일 것이다.

원시시대의 그들이 몸을 지키기 위한 은신처가 필요했다면, 현대인들은 정신을 지키기 위한 피난처가 필요한 셈이다. "멀티태스크적인 공간보다 효율적인 공간의 분리"를 원하는 젊은 층이 늘고 있다는 게 공간디자이너 이병일씨의 설명이다.

"예전에는 작업의 연장을 원했던 공간들을 이제는 그 흔적마저 지우려는 듯하다. 20~30대 젊은 층은 일과 취미, 휴식 등을 좁더라도 한 공간에서 활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명확하게 경계를 구분한 공간을 선호한다.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던 멀티태스크적인 활동보다는 세분화 된 영역을 원한다."

일상의 공간마저 일의 노예로 전락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다. 즉 방 안에서도 공간이 경계를 이뤄 치유의 공간, 사색의 공간, 휴식의 공간 등으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공상에 빠지거나 베란다나 화장실에서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는 일은 공간이 허락하는 우리의 자유다.

일상과 동떨어진 새로운 기분을 내려는 우리의 안간힘이 공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만의 공간에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것이니 무어라 할 사람도 없다.

휴식의 공간을 위해 침대를 온화한 분위기로 꾸미거나, 차를 마시며 생각을 정리하는 공간에 티 테이블을 놓거나, 창가의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된다. 가구나 소품 하나로 공간을 구분 짓고 활용도를 높이는 것이다.

"인간적 공간으로 접근하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들은 공간과 깊은 관계를 갖고 체험한다. 생활 바로 그것을 반성하고 분석하고 해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의미공간은 주체적이라고 말해도 좋을지 모른다."

예술적 공유와 공감의 소용돌이

일본의 뉴에이지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는 공간을 익혀 브라질 감성을 연주했다. 그의 보사노바 앨범 <카사>는 그가 보사노바의 대부로 알려진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로를 직접 방문해 만들어진 것. 사카모토는 조빔의 집에서 그의 피아노로 연주해 녹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음악전문가들도 <카사>를 듣고 나면 일본인인지 브라질인인지 모를 정도로 감성과 정서가 그대로 묻어 있다고 전한다. 공간의 공유가 음악적 감성을 끌어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예술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는 개인 공간과는 또 다르다. 최근 개인의 공간이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적 회복 장소라면, 예술적 의미의 공간은 공유와 감상, 해석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환경, 인간, 생활, 세계 등과 관련된 상황들을 미적 감각으로 작가의 상념과 이념을 표현하는 것이다.

특정의 소재와 기법으로 관람객들에게 호소하는 활동이다. 이를 위한 과정 중에는 공간이 깊게 관련된 부분도 있다. 작가는 공간 내에서 자신의 작품을 내놓고 관람객들은 그것을 감상한다. 공간의 공유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념을 공간적으로 형상화하는 행위가 해석이라는 상황으로 관람객들을 이끈다.

최근 이런 파격적인 공간 활용으로 예술적 표현과 감상의 깊이를 바꿔버린 공간이 있다.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이다. 통의동은 조선시대 진경산수화를 개척한 겸재(謙齋) 정선의 노닐던 곳이며, 일제강점기 시인 겸 소설가 이상이 <오감도>에서 '막다른 골목'이라 불렀던 곳이란다.

그 자리의 보안여관은 1936년 미당(未堂) 서정주가 투숙하며 김동리와 김달진 등과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든 곳이기도 하다. 예술적 감성과 떼려야 뗄 수 없던 자리가 결국 예술을 감상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한 셈이다. 이곳에서 전시되거나 행해지는 예술 작품들은 먼 과거의 환영까지 겹쳐 공간을 형성한다.

보안여관의 공간이 특별한 건 외부뿐만 아니라 그 내부의 기운 때문이다. 외부는 빨간 벽돌의 80년대 분위기를 물씬 내며 그 옛날 '여인숙'의 향취를 내뿜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면 외부에서 느꼈던 정감 어린 감정이 싹 정리되는 기분을 느낀다.

보안여관의 내부는 흉물이 따로 없다. 음산하고 차가운 기운이 엄습한다. 하지만 흉물이라고 단정해버리기엔 공간이 주는 인상은 오묘하다. 갈기갈기 뜯겨지고 시멘트와 벽돌이 고스란히 드러난 벽, 삐거덕거리는 바닥,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목조 기둥은 흡사 폐허와 같다.

하지만 그 곳에서 작품 전시나 퍼포먼스가 진행 중이라면 집중의 맛은 너무도 달다. 좁은 방과 방 사이의 전시공간은 관람객들에게 어깨를 부딪치며 같은 호흡을 뱉게 한다. 공유와 공감의 경험이 서서히 올라온다.

닫힌 문의 네모난 창구멍으로 보는 '미리보기' 식의 작품 감상은 어떤가. 우리들의 상상력이 제대로 발동한다. "공간과 동선의 파괴가 예술적 힘을 부여한다"는 한 예술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가 기묘하게 융합된 공간의 힘은 막대하다. 그 곳에 있으면 왠지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얀 내부에 조명만을 더한 일반 전시공간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위적이거나 도색적이지 않은 향기가 공간을 채운다.

참고자료 : <공간과 인간>(나카노 하지무·국제), <건축을 묻다: 예술, 건축을 의심하고 건축, 예술을 의심하다>(서현·효형출판), <공간의 이해와 인간공학>(신태양·국제)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