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직업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가 선생이고, 둘째가 과학자입니다. 셋째는 환자를 치료하는 치과의사고, 마지막으로 넷째는 교육행정가입니다. 지식 산업(knowledge business) 경영자인 셈이죠."

구강암 치료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손꼽히는 박노희(67) 미국 로스앤젤레스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치과대학 학장. 경희대 특강을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한 그를 20일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하버드 1년만에 의대교수로

박 학장이 미국과 인연을 맺은 날은 36년 전인 1975년 자신의 생일(1월 30일)이었다. 조지아대학 연수를 위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달랑 100달러만 손에 쥐고 낯선 이역땅에서 공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도 꽃은 피었다. 조지아대에선 76년부터 2년 만에 논문을 15편을 발표하면서 박사 학위를 따냈고, 하버대로 자리를 옮겨 박사후 연구원인 포스트닥(Post-Doc)으로서 연구를 계속했다.

"하버드대에서 1년 만에 의대 조교수(안과)가 됐어요. 그런데 치과의사로는 보지 않더군요. 서울대에서 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 과정까지 마쳤는데, 미국 의사 사회는 외국인을 의사로 보지 않을 정도로 편견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독하게(?) 열심히 공부했죠. 의대 교수로 강의하면서 치과대학을 다시 다녔으니까요. 결국 의대와 치대에서 모두 교수가 됐습니다."

그 시절을 더듬는 박 학장의 눈빛은, 과학자와 교육행정가의 삶을 이야기할 때와 달리 부드러웠다. 그만큼 보람차고,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뜻이리라.

일단 하버드대학에서 자리를 잡자 박 학장의 실력과 성실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불혹의 나이에 시도한 항바이러스 약품 아사이클로비르(acyclovir) 작용 기전 연구는 주변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연구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만 골라 죽이는 항바이러스 약품에 대한 연구로 당시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버드대 조교수에서 UCLA의 종신 재직 교수로 자리를 옮긴 것도 그 덕택이었다. UCLA로 옮긴 지 1년 만인 85년, 박 학장은 정교수가 됐고 그로부터 13년 만에(98년) 치과대학을 책임지는 학장으로 선임됐다. 지금까지 학장직을 맡고 있으니 올해로 벌써 14년째, UCLA 치과대학 사상 최장수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도 교육행정가로서의 삶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의 꿈은 과학자였다. 1962년 3월, 서울대 치대 입학식에서 "나는 학자가 되겠다"고 한 다짐을 박 학장은 잊지 않고 있다. 서울대 치대 본과 2학년(65년) 때부터 약리학에 매달렸던 과학에 대한 정열은 학부생 시절부터 후배들에게 강의할 정도로 탄탄한 실력을 만들었고, 수석으로 졸업하는 영광을 낳았다.

"암을 연구하는 과학자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치대 교수로서 치열하게 살았죠. 그러나 학장이란 자리는 다릅니다. 교수와 학생을 관리하고 치과병원을 경영해야 합니다. 또 대학 운영을 위해 기금을 조성해야 하기 때문에 경영자에 가깝죠."

과학이 융합해야 발전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다는 확신 아래 교육 시스템을 바꾸는데도 앞장을 섰다. 예를 들어 공대 교수를 치과대학에 초빙해 치과 관련 나노 과학 분야를 개척하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UCLA는 의대와 공대 교수가 힘을 합쳐 휴대전화로 결핵 유무를 판별하는 기술, 타액만으로 췌장암, 폐암 환자를 진찰하는 기술 등을 개발했다.

"과학에는 벽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 박 학장은 학문을 법학, 의학, 경제학등으로 나눠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약 200년 전 독일식 교육 체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 대학도 이제는 학과를 없애고 학문의 벽을 허물어야 발전할 수 있다"며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술을 상품화하는 것도 대학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기른 인재들이 내 유산

UCLA 최장수 학장으로 불리는 그에게 가장 보람찬 일은 무엇일까?

그는 후진 양성을 첫번째로 꼽았다. "강의를 통해 배출해낸 교수가 100명 이상입니다. 지금 되돌아봐도 뛰어난 후진을 양성한 것이 가장 자랑스럽고, 제가 남긴 유산은 결국 제가 키운 인재들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쉬운 일은?

"매일 3회 이상 이런 저런 연설을 하고, 행정 보고서를 제출하면서도 늘과학자로서 연구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논문을 160편 이상 발표했는데, 그래도 가끔 '환자를 위해 내가 충분히 연구했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그도 집안 살림은 전혀 모른다. 그러나 UCLA 치대에 쓰이는 예산은 꿰뚫고 있다. 예산이 학생과 교수, 병원과 환자를 위해 쓰이지 않고 허투루 나가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한국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입신한 박학장에게 세계에서 교육열이 가장 높은 한국에서 공부해야만 하는 학생을 위해 조언해달라고 부탁했다.

"우선 꿈을 가져야 합니다. 목표가 생기면 계획을 세우기 마련입니다. 계획을 세웠으면 혼신의 힘을 다해 집중해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항상 기회가 옵니다."

난관을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 박 학장은 꿈을 통해 목표를 세웠고, '땀과 노력'을 통해 모든 걸 일구었다. 그는 또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알아야 한다"며 "단점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점을 살리기는 쉽지만 단점을 고치는 건 무척 어렵다는 뜻이다.

스스로 공부하는 학생상도 강조했다. IT 기술의 발달로 언제든지 교과서보다 나은 지식을 손쉽게 얻을 수 있으니, 특정 지식을 아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지식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아직 낯선 토론식 수업이지만 익숙해지면 필요한 지식을 찾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 지적 호기심(intellectual curiosity)이 커진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석학인 그에게도 조국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그는 인터뷰 도중 "조국 한국이 그립다"고 했다. 미국에서 다른 대학 총장직을 제의받았을 때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마지막은 조국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UCLA가 치대 학장직을 5년 더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아직은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

"어떤 분은 한국에서 배운 게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에서 많이 배웠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단, 한국에는 연구 환경이 열악할 뿐이죠. 죽기 전에 한국에서 봉사할 기회가 있을까요?"

박노희 박사는 누구?

박노희 박사는 한국인 최초로 1998년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 주립대(UCLA) 치대 학장이 됐다. 서울대와 하버드대에서 치의예과를 졸업한뒤 하버드대를 거쳐 UCLA에서 교수로 일하다 학장에 선임됐다.

그는 항바이러스 화학치료요법과 상피세포에서 발생하는 암 연구에서 탁월한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2001년 치의예 부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뛰어난 과학자상'(Distinguished Scientist Award)을 수상했다.

UCLA는 지난 2009년 랄프 샤피로 자선재단의 기부를 받아 박 학장의 이름을 딴 '박노희 박사 치과학 석좌교수'직을 신설했는데, 기부자 이름을 석좌교수직에 붙이는 게 통례여서 현직 교수의 이름을 딴 석좌교수직은 이례적이다.

이에 대해 기부자였던 랄프 샤피로 자선재단은 "박노희 학장이 암 생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UCLA 치대를 잘 이끌었다"며 "그의 공적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치의예 부문에서 박 학장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2007년 박노희 학장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