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지병畵中之餠'이란 말이 있다. '그림의 떡'이다. 굉장히 좋은 일이긴 한데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고기도 있고 생선도 있고 다른 귀한 음식도 많은데 왜 하필 그림의 '떡'일까? 간단하다. 떡이 제일 소중하고 귀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그까짓 떡?"이라고 할 게 아니다. "귀신 듣는데 떡 소리 못한다"고 했다. 귀신도 떡을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나 모두 떡을 제일 좋아했다. 떡은 귀한 음식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4년(1422년) 5월의 기록은 떡이 얼마나 귀하고 사치한 음식인지를 잘 보여준다.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면麪∙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라는 구절이 나온다. '진전'은 역대 국왕들의 초상화를 모신 곳이다.

이날의 기록은 세종으로서는 제일 중요한 왕실행사인 태상왕(선왕 태종)의 수륙재 참가인원에 관해 의논한 내용이다. 태상왕의 수륙재에 진전, 불전, 행사 주관 승려를 제외하고는 '사치한 음식'인 만두, 국수, 떡을 내놓지 말라고 한 것이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은, 예전 한양의 북촌 일대에서는 떡을 즐겨먹고, 남산 일대에서는 술을 즐겨 마셨다는 뜻이다. 경복궁 옆 북촌 일대에는 고위직 양반들이 살았고, 청계천 너머 남산 자락에는 가난한 선비, 하급 무인들이 많이 살았다. 양반은 '누워서 떡 먹듯 하고' 가난하고 울분이 쌓인 하급 무인, 가난한 선비는 술을 마셨다는 뜻이다. 지금 삼청동, 가회동 입구인 셈인 낙원동 일대에 '낙원떡집'을 비롯하여 업력 길고 유명한 떡집들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시대의 각종 기록에 남아 있는 음식들 상당수는 일상사의 음식들이 아니다. 조선시대 음식은 손님 맞고 제사 모시기 위한 것, 즉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의 음식들이다. 대부분의 음식들은 '행사'를 위한 것들이었다. 떡은 누워서 떡 먹듯이 쉽게 먹었던 음식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야" 겨우 만날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오늘날 쉽게 볼 수 있는 제분기나 가정마다 있는 믹스기가 없던 시절, 고운 가루를 얻는 것은 퍽 힘들었다. 왕조실록에 나오는 음식 3가지 떡, 국수, 만두는 모두 고운 가루가 있어야 가능한 음식들이다. 일상사에서 먹는 음식이 아니라 제사를 모시거나 손님을 맞는 일에는 당연히 이 귀한 음식들이 앞장을 서야 한다.

북쪽은 만두 빚고 남쪽은 떡국 끓여

설날은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만두, 떡, 국수는 제사에도 사용되고 손님맞이에도 필요하다. 가난했던 1960~70년대의 기록들에는 떡국을 귀히 여기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설날 세배를 다니는데 가는 집마다 떡국을 강권하는 바람에 10집 이상의 떡국을 먹고 숨쉬기도 힘들었다"는 내용도 있다. 중부이남 지방의 이야기일 것이다. 북쪽이면 떡국 대신 "10집에서 만두를 먹느라고 힘들었다"고 했을 것이다. 지금도 월남한 가정에서는 명절마다 큰 만두를 빚는다.

추석 송편과는 달리 설날에는 지방 별로 음식이 다르다. 북쪽은 만두를 빚고, 남쪽은 떡국을 끓인다. 중부지방에서는 만두, 떡국이 혼용되고 더러는 떡만두를 끓이기도 한다. 중국 대륙의 영향을 늘 받았으며 곡물이 귀했던 북쪽은 만두에 능하고, 곡물이 비교적 흔했던 남쪽은 떡을 만들었을 것이다. 두 음식 모두 고운 곡물가루가 필요하지만 만두는 속 위주고 떡은 곡물의 가루 자체를 취하는 것이다. 서울 압구정동 '만두집' '목로집' '설매네'와 평양냉면 전문점들의 만두는 모두 평안도식 만두다.

지금은 북녘 땅이지만 원래 중부지방인 개성에는 조랑이 떡국이 있고, 안동에는 국수제사가 있다. 조랑이 떡국에는 참 근거 없는 이야기가 하나 달려 있다. 바로 조랑이 떡국의 중간이 잘록한 것은 개성사람들이 고려를 망하게 한 조선의 태조 이성계 목을 조르듯이 대나무 칼로 떡국의 중간을 눌렀다는 이야기다. 개성은 고려의 5백년 왕조 도읍지였고, 경북 안동은 조선 5백년의 유교문화가 가장 번성했고 가장 오래 남아 있는 곳이다. 왕실과 반가의 전통이 살아 있는 곳에서 각각 고유한 떡, 국수 음식이 살아 있음도 퍽 재미있다. 개성 식 만두, 조랑이 떡국은 인사동 '개성만두 궁' 삼청동 '용수산', 용신동 '개성집' 등에서 볼 수 있다.

오늘날 서울 시내 군데군데 남아 있는 안동 '건진국시'는 안동 반가 음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고운 가루를 얻기 힘든 시절에는 집에서 일일이 사람 손으로 고운 가루를 얻어야 했다. 우선 곡물을 최대한 곱게 간다. 방바닥에 한지를 깔고 병풍을 두른다. 가루를 떨어뜨리면서 부채 등으로 부치면 무거운 것은 가까이 떨어지고 가벼운 것은 멀리까지 날아간다. 병풍과 천정에 부딪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가벼운 것들만 모으면 고운 가루를 얻을 수 있다. 얼마나 힘든 일이었던지 한때는 안동시 외곽지역에 고운 가루를 구해주는 전용 방앗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점도가 약한 거친 가루는 막국수처럼 바로 물에 넣어서 끓여먹는 수밖에 없다. 고운 곡물가루로 국수를 만들면 한차례 삶아서 건져낸 다음, 손님이 오면 육수에 말아 내놓으면 된다. 한차례 '건져냈다가' 먹는 국수가 바로 안동의 '건진국시'다. 만들기 번거로운 '건진국시'를 일상적으로 먹지는 않았다. 제사 음식으로 사용되다가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았다. '건진국시'는 원래 인근의 강에서 잡았던 은어로 육수를 내다가 은어가 귀해지면서 쇠고기 육수로 바뀌었다.

서울에서는 양재동 '소호정',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대각선 방향 골목 안의 '안동국시', 인사동 백악미술관 지하 '안동국시 소람' 등에서 전형적인 안동 '건진국시'를 만날 수 있다.

경북 내륙지방에선 오신채 엄격히 금해

경북 내륙 지방의 제사에서는 오신채를 엄히 금한다. 마늘, 부추, 달래, 파 등을 금하면 음식 맛은 떨어진다. 안동의 헛제삿밥이 외지로 전래되지 않는 것은 향신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제삿밥의 일종이니 제사에 사용하는 '상어돔베조림'이나 생선전 등이 더불어 제공된다. 안동 임하댐 부근의 '까치구멍집'이 헛제삿밥 전문점이다.

물론 국수, 만두, 떡만 제사나 명절음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홍동백서紅東白西'와 '조율이시棗栗梨柹'라는 표현은 추석에 나오는 모든 과일들을 제사 음식으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절식節食이나 시식時食이라는 표현이 있다. 계절에 맞는 음식, 특별한 시기에 먹는 음식이 따로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과일도 그러했다는 뜻이다.

철저한 유교문화 아래의 설날 음식은 "설날 무렵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식재료로 만든 가장 정성스런 음식"이다. 귀한 손님도 많이 오고 무엇보다 조상에게 보여드릴 최선의 음식이어야 한다. 당연히 '최고의 음식'을 내놓아야 한다. 지방마다 식재료가 다르니 명절의 음식도 다를 수밖에 없다.

타 지방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지만 호남 일부 지방에서는 제사상에 홍어를 사용한다. '비린내 나고 천한 등 푸른 생선'은 사용 하지 않는다는 영남 내륙 지방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호남의 잔치와 제사에서는 홍어가 단골이다.

같은 떡국이라도 쇠고기 육수가 있고, 멸치육수가 있다. 고춧가루를 금기시하는 곳도 있지만 고춧가루를 천연덕스럽게 사용하는 지역도 있다.

"이게 우리 집안의 전통"이라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것만이 바른 제사상 차리는 법"이라는 것은 사실 없는 셈이다. 흔히 하는 말로 "고인이 살아 계실 때 가장 좋아하셨던 음식"을 차리는 것이 어쩌면 가장 정성스러운 것일 수 있다.

충남 공주시 의당면 청룡리 일대는 조선시대 청송 심씨 가문의 세거지世居地였다. 당연히 충청도 반가의 전통이 살아 있으며, '미마지'는 이 집안의 음식을 전승한다. 이 식당의 메뉴 중에 '소민전골'이 있다. '소민'은 현재 주인 조부의 호다. 조부가 좋아했던 음식을 메뉴로 개발한 것이다. 물론 '소민전골'은 이 집안의 절식이자 시식이었을 것이다. 두부를 가르고 속에 버섯을 채운 다음 갈라진 두부를 미나리로 묶었다. 손이 많이 가고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음식이다. 음식이 전체적으로 심심하고, 고춧가루 사용을 최대한 절제한다. 버섯전을 비롯하여 몇몇 부침개들이 대단히 좋다. 반가에서 흔히 제사, 접대용 음식으로 사용했던 산적散炙의 향취도 느낄 수 있다.

오늘날 서울의 유명 음식점에서 제공하는 음식들은 조선시대 국왕의 음식 축소판일 수 있다. 조선시대 국왕은 하루 5번 식사를 했다. 흔히 궁중한식, 궁중한정식이라는 음식들은 국왕이 하루 종일 드셨던 음식들을 간략하게 혹은 첨삭하여 한 끼 코스로 내놓는 경우가 많다. 반가와 교류하면서 반가음식에도 왕실의 음식이 흘러들어가고 때로는 반가의 음식들이 왕실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상에서 먹었던 음식들 혹은 손님 접대용 음식이 정제되어 제사상에 올라가고, 제사 음식이 일상으로 옮기기도 했다. 서울의 '석파랑'이나 '필경재' 등은 이런 왕실과 반가, 일상과 손님접대, 제사상의 음식들이 혼재되어 있는 셈이다. 특히 '석파랑'의 아주 화려한 후식은 조선시대 국왕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태백산맥의 마지막 지점은 포항, 경주 일대다. 경주에는 조선시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경주 최 부자 집안의 후손이 운영하는 음식점 '요석궁'이 있다. 이 식당에 가면 작은 종지에 나오는 '밥식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경주는 젓갈도 귀했던 경북 내륙 지방과 바다를 연결하는 통로이다. '밥식해'는 내륙의 곡물과 바닷가 해산물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룬 음식이다. 물론 '요석궁'의 고기 요리 등은 전형적인 반가의 명절 음식을 보여준다. 고기의 양을 절제하면서도 적절하게 모양을 낸 것은 일상의 음식이 아니다. 역시 손님접대나 귀한 제사 등에 사용했음직한 음식이다.

사라져가는 '주악' 은은한 단맛 일품

엉뚱하게도 깊은 산속인 속리산 관광단지 옆 '경희식당'에서 귀한 정과正果와 장과醬果를 만날 수 있다. 정과와 장과는 제사에 사용하고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았다. 과일도 중히 사용했지만 명절이나 귀한 손님맞이 등에는 정과, 장과 등을 정성스럽게 만들어 내놓았다. 정과는 과일이나 뿌리채소, 인삼 등을 달게 조린 것이고 장과는 간장과 설탕, 물엿 등으로 비교적 짭조름하게 조린 것을 말한다. 정과는 후식이고 장과는 밥반찬인 셈이다. '경희식당'은 고 남경희 할머니가 대전에서 처음 문을 열었고 이미 업력 70년을 넘겼다. 약 45가지 정도의 반찬이 나오는데 조선시대 반가의 음식이나 궁중의 음식들을 비교적 쉽게 만날 수 있다.

경주 양동마을에 가면 마을 부녀자들이 관광객들을 위하여 유과 만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현장에서 구입할 수도 있다. 명절, 제사, 손님맞이에 모두 사용했던 반가의 귀한 음식이다. 유과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과자로 기름에 지지거나 튀긴 것이다.

사라지고 있어서 참 아쉬운 명절 음식은 '주악'이다. 주악은 웃기떡 중의 일종으로 찹쌀가루에 대추를 이겨 섞고 꿀 반죽한 다음, 깨소나 팥소를 넣어 송편처럼 만든 것을 기름에 지진 것이다. 대추를 넣었다고 대추주악이라고도 하고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주악이 있었다. 특히 개성의 주악이 아주 좋아서 특별히 '개성주악'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서울 서래마을 '담장옆에국화꽃'에서 만날 수 있다. 이집의 주악은 홍시 모양이고 대추의 은은한 단맛이 일품이다. 물론 수정과나 식혜 등과 더불어 간식, 후식으로 먹으면 최고의 호사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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