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공천 논란이 심화하면서 낙천자들의 집단 움직임이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 공천에서 탈락이 확정되거나 유력시 되는 인사들은 일단 소속 정당에 재심을 청구하면서 최종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공천 결정이 번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사실상 집단적인 이탈을 통한 정치적 회생을 꿈꾸고 있다.

벌써부터 여의도 정치권에서는 여야 양당에서 이탈한 현역 의원들이 한데 모여 신생 정당을 만들거나 박세일 전 의원이 주도하는 '국민생각'에 합류해 새로운 정당으로 총선에 뛰어들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재 국회 1,2당인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을 제외하곤 원내교섭단체 정당은 없다. 만일 공천에서 탈락한 현역 의원이 20명만 모이면 바로 원내교섭단체 정당이 꾸려지면서 총선에서 기호 3번을 부여 받게 된다. 이들에게는 또 정당보조금도 지급되기 때문에 적잖은 정치자금도 확보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이 같은 현실적인 이유로 낙천자들 사이에서는 신생 정당을 만들거나, 아니면 국민생각에 일단 합류한 뒤 전당대회를 열어 당명과 정강정책 등을 바꾼 뒤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총선을 치르자는 시나리오가 설득력 있게 그려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새누리당 낙천자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통합당의 현역 의원 낙천자들의 움직임과도 맞닿아 있다. 이들도 개별적으로 무소속으로 나오거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상징하는 단어를 앞세워 '민주동우회(가칭)' 등의 무소속 연대로 친노무현 세력에 맞선 친 DJ 그룹임을 천명할 태세다. 이와 함께 새누리당 낙천자들과 힘을 합해 제3당으로 나서는 방안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들이 손잡을 경우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결합을 의미한다. 1985년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연대해 만든 신한민주당의 복사판을 생각하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공천 결과에 항의하는 동대문갑 서양호 예비후보 가 지난 7일 오전 국회 당대표실에서 성명서를 전달하려다 제 지당하자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현역 의원 공천 탈락자들을 부추기는 쪽은 아무래도 전직 의원으로 낙천자가 된 구 정치인 계열들이 많다. 유권자가 '흘러간 시냇물'로 볼지, '애틋한 향수'로 기억해줄지는 장담키 어렵지만 적어도 여야가 치열하게 맞붙는 지역에서는 승패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란 점은 분명하다.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 친박근혜계와 친노무현계, 박근혜와 한명숙의 대결로 압축되던 이번 총선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여야, 탈당 도미노 시작

새누리당에서는 인천의 이윤성 의원이 8일 탈당 및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며 낙천자들의 집단 이주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9일에는 서울 영등포갑의 전여옥 의원이 탈당 및 국민생각으로의 합류 의사를 밝혔고, 경남 사천 남해 하동의 이방호 전 의원은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 뒤 지역으로 내려갔다.

또 공천 탈락이 유력한 친이계 진성호 유정현 이화수 안상수 신지호 허천 장광근 의원 등도 최종 낙천 확정시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아직 정치적 입장을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공천 탈락 위기에 놓여있거나 탈락이 확정된 친이계나 중도 성향의 김무성 권택기 강승규 윤석용 조진형 최병국 이범관 백성운 권경석 윤영 정미경 박준선 이종구 박영아 의원 등도 경우에 따라 이들과 손잡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벌써 이들만 모여도 지역구 의원 수가 20명이 넘는다. 신고만 할 경우 3당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9일 오전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에서 부천 원미을에 공천을 신청한 이사철 의원의 지역구 지지자들이 삭발을 하며 공천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만들고 나설 때는 커다란 정치적 명분을 앞세워야 한다. 단순히 머리 숫자만 채운다고 지지층에게 다가설 수는 없다.

16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에서 낙천한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이 이수성 전 총리와 재야 인사인 장기표씨 등과 손잡고 민국당을 만들어 선거전에 뛰어들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구심점도 없었고 지역적 연대감도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국민에게 새로운 정치라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점이 패인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아들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의 공천 탈락으로 심기가 불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부산 경남이라는 확실한 지지 지역이 있고 정통 민주화 세력의 본산이란 강점도 보유한 데다 현재 정치구도에 염증을 느낀 올드팬들의 향수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다.

씨가 주도하나

김 전 대통령 측에서는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이 앞서 뛰고 있다. 김 의장은 이미 지난해부터 전 여의도연구소 부소장과 새로운 정당 창당에 대한 구상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한 전여옥(영등포갑) 의원이 전격 탈당하고 보수성향 중도신당인 `국민생각'에 입당, 9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국민생각 박세일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김 의장은 이를 위해 '국민생각'의 박세일 대표는 물론, 친이계의 안상수 전 새누리당 대표와 원희룡 의원, 정운찬 전 총리 등과 접촉을 가졌다.

대표적인 YS직계인 김 의장이 움직인다는 것은 곧 YS의 의중이 상당 부분 실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공천 탈락이 확실시되는 YS계 김무성 의원도 힘을 보탤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손을 잡는다면 13대 국회의 통일민주당 같은 신(新) YS당의 출현을 의미하게 된다.

새누리당을 민정당 식의 보수정당으로 몰아 붙이고, 민주통합당은 열린우리당의 후신으로 각인시키면서 자신들의 모임을 건전한 민주화 세력으로 이미지메이킹 한다는 복안이다.

김 의장은 야권에도 손을 내밀고 있다. 먼저 민주당 낙천이 결정된 한광옥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의견을 타진했다. 한 전 비서실장은 함께 낙천된 김덕규 전 국회부의장 등과 무소속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

민주통합당 호남권 공천심사 결과가 발표된 후 국회 정론관에서 공천에서 탈락한 조영택, 최인기, 강봉균 의원(왼쪽부터)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지만 한 전 실장이 흔쾌히 동의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교동계 출신인 이훈평 전 의원도 "상도동계와 총선 연대는 없다"면서 탈당 후 민주동우회 결성 등을 통한 무소속 출마를 강조하고 있다. 아무래도 YS와의 연대 이미지가 호남권에서 지지를 이끌어내긴 어렵지 않느냐는 계산에서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은 유동적이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당에서 낙천된 현역 의원들의 표 계산법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호남에서는 불리하더라도 수도권에서는 나름대로 플러스 요인이 있다고 보면 생각을 달리할 수도 있는 문제다. 전 부소장이 YS를 등에 업고 나서고 부산 경남지역에서 김무성 의원이 세를 형성해가면 수도권에도 나름대로 지지세를 확보할 가능성도 있다.

이와 관련 전남 나주 화순이 지역구인 민주통합당 최인기 의원은 8일 낙천이 확정된 뒤 "이번 공천은 김대중 민주계를 학살한 것"이라고 밝히며 가장 먼저 탈당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또 강봉균 조영택 의원 등 호남 출신으로 각료를 지낸 중진 의원들이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낙천이 유력시 되면서 이들의 탈당 및 무소속 출마 선언도 초읽기에 들어갔다. 또 서울 등 수도권에서 낙천된 인사들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이들이 야권만의 무소속 연대라는 둥지를 만들 수도 있고 여당 공천 탈락자와 힘을 합하거나 국민생각에 합류할 수도 있는 다양한 정치 갈래가 남아 있어 주목된다.

만일 동교동계마저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 전 부소장 측과 손을 잡고 여기에 이들이 '국민생각'으로 옮겨 건전한 민주화 세력의 재집합을 선언하면 그 자체로서 12대 국회의 신한민주당 같은 이미지를 풍길 수 있다. 명분이 서면서 참여 인사들의 면면도 간단치 않은 데다 YS와 DJ의 결합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적잖은 파괴력이 예고되는 대목이다.

"20~30명 곧 탈당" 주장

이와 관련 김 전 부소장은 7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조만간 여당의 20~30명 낙천자를 중심으로 한 집단 탈당이 있을 것이며 명단도 갖고 있다"며 "박근혜 비대위가 칼집을 쥐고 있다면 우리는 칼날을 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YS도) 격노하고 있으며 총선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 정치전문가는 'YS 등 3김씨가 힘을 발휘하는 순간은 탄압을 받는다고 여겨질 때'라는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독자적으로 움직이면 별반 감동을 주기 어려우나, 독재정권이나 힘있는 세력에게 배척당하거나 희생당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국민적 동정심 및 지지세가 살아나는 묘한 마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공천 탈락한 김 부소장과 김무성 의원들을 대동하고 YS가 부산 경남지역을 돌아다니며 또 다른 정치 세력의 지지를 호소하고 다닐 경우 현지 주민들이 단순히 구 정치인의 노욕으로 치부하지만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민주통합당은 친노 득세에 따른 공천 불만이 내부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태라서 아직 낙천자 움직임까지 걱정할 상황은 아니다. 발등의 불부터 끄자는 생각이 우선이다. 제3의 정치세력이 현실화하더라도 직접적 피해는 여당보다 적을 것이란 판단도 하고 있다.

여당도 아직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다. 이상돈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낙천자들의 이삭줍기에 나섰다는 '국민생각'의 행보에 대해 "이당 저당에서 낙천한 사람들을 영입해 후보를 낸다면 창당의 표현이 무색해지는 낙엽정당으로 비칠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또 탈당자가 30여명에 이른다는 전망과 관련해서도 그는 "서울의 경우 어려운 선거니까 그분들이 탈당해 무소속이나 다른 당으로 나선다면 그건 야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는 낙천자 움직임이 결국 '찻잔 속 태풍'이라고 치부하고 있지만 속내는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민심이 새누리당 공천 과정을 '오만한 독재적 발상'으로 낙인 찍는 순간 적어도 표심의 상당 부분은 날아간다. 특히 부산 경남지역에서 낙천자 연대가 힘을 발휘할 경우 야당과의 접전이 예상되는 상황인 점을 감안하면 여당 승리는 요원하다.

수도권이 어려운 상황에서 부산 경남을 잃으면 전체 총선 결과는 참패다. 그래서 새누리당 비대위가 최근 불공정 공천을 강조하며 탈당 가능성까지 내비친 이재오 의원을 달래기 위해 직계 의원들의 공천 방안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YS가 나서고 친이계가 합세하는 과정에 이재오 의원까지 당을 박차고 나오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절반 가량의 공천이 끝난 상태에서 여야 지도부는 집토끼 단속에 서둘러 나서고 있다. 이와 달리 낙천이 확정되거나 유력한 인사들은 개별적인 무소속 출마나 같은 색깔을 보유한 인사들과의 연대, 또는 13대 총선의 통일민주당과 12대 총선의 신한민주당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저울질을 하고 있다.

그것이 무소속 연대든, 국민생각으로의 합류든 간에 제3의 정치세력을 형성해 이번 총선에서 적잖은 위력을 발휘할 것이란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당사자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정치게임이지만, 유권자들에게는 또 다른 흥미 있는 관전포인트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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