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선거를 치른 대가는 하야와 망명이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된 계기는 3ㆍ15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도중 실종된 마산상고 입학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던 빨갱이론이 먹히질 않았다.

3ㆍ15 부정선거는 결국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성난 시위대가 경무대(현 청와대)로 돌진하자 경찰이 총을 쏴 대규모 사상자가 생겼다. 그러나 시위대는 점점 늘어만 갔고, 미국은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주한 미 대사 매카나기는 21일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 관련자를 처벌하고 재선거를 치르지 않으면 중대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경찰 총격으로 학생 등이 수백명 목숨을 잃자 백발이 성성한 교수들은 4월 25일 "정부는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고 외쳤다. 매카나기 대사는 26일 오전 "국민은 오랫동안 무거운 짐을 져온 각하께서 이제는 젊은 사람에게 정부를 물려주고 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권고를 한국을 돕고자하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송요찬 계엄사령관도 이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을 찾았다. 송 사령관 부관이었던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은 이들의 대화를 '4월혁명 구술 기록집'에 남겼다.

"발포하지 않으면 수습이 안됩니다." "발포는 안돼! 국민이 무엇을 원해?" "하야하시랍니다." "그럼 하야해야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하면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됐다. 3ㆍ15 부정선거를 지휘했던 이기붕 부통령 일가는 28일 새벽 아들 이강석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건국 대통령이었던 독재자의 말로는 쓸쓸했다. 국민에게 지탄을 받고 미국의 지원마저 끊긴 이승만은 하야를 발표한 뒤 한 달 만에 서둘러 하와이로 망명을 갔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