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화하는 조폭의 세계

김태촌·조양은 몰락으로 밤거리 장악했던 조직 와해
2000년 이후 벤처에 손 대 부동산 개발·주가 조작 등 사업 다각화하며 검은돈 쫓아 '칼잡이 시대' 이젠 과거로
이태원파 외모·학력 위주 선발 키 175cm이상 미남 토익·토플 고득점자 우대
급변하는 현실에 빠르게 적응 이젠 '의리보다 돈' 우선 금융시장까지 영역 확대


서울 밤거리를 장악했던 서방파와 양은이파가 몰락하고 있다. 서방파 두목 김태촌(63)은 지난달 심장마비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한 상태고, 양은이파 두목 조양은(61)은 지난해 경찰 수사를 피해 필리핀으로 달아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은이파와 서방파는 최근 조직폭력배 특별단속을 통해 초토화됐다. 그러나 경찰이 주목하고 있는 폭력조직은 전국에 220개 이상이다. 칼부림을 서슴지 않았던 조직폭력배는 요즘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거 주먹다툼과 흉기에 매달렸던 조폭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면 감옥행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폭이 칼부림할 때마다 검찰과 경찰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다. 김태촌과 조양은은 밤의 황제로 군림한 기간보다 오랫동안 교도소에서 살았다. 김태촌은 30년 이상, 조양은은 20년 이상 감옥 생활을 했다. 이런 까닭에 조폭은 유혈 참극 대신 합법적인 사업이 살 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21세기형 조폭

조폭이 떼를 지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2000년 이후 사라지고 있다. 과거 조폭이 폭력사범이었다면 최근엔 경제사범으로 변산한 사례가 많다. 두목, 부두목이란 호칭은 회장, 사장으로 바뀌었고, 부동산 개발과 주가 조작에 앞장서고 있다.

2000년을 전후로 꽤 많은 조폭이 코스닥 벤처 붐을 타고 벤처 투자자로 변신했다. 주식으로 떼돈을 번 폭력조직은 사채업과 검은 자금 세탁에도 손을 댔고, 휴대전화가 발달해 조폭끼리 몰려다닐 필요마저 사라졌다. 손쉽게 돈을 버는 방법에 눈을 뜬 조폭은 검찰과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합법화된 사업을 부지런히 찾았다.

부동산 개발은 예나 지금이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과거 조폭이 입주민을 쫓아내고 철거하는 데 그쳤다면 요즘 조폭은 땅 매입은 물론이고 관공서 허가, 반대 세력 제거 등을 도맡는다. 이런 식으로 재산을 쌓은 조폭은 일반인에게 사업가 명함을 내민다. 경찰과 검찰에게 쫓기는 신세에서 벗어나 정치인과 어울려 골프를 치며 친분을 쌓기도 한다.

주가 조작에 앞장선 조폭도 눈에 띈다. 목포에서 활동하는 조폭 최모(31)씨는 지난해 증권사 주식실전투자 대회에서 우승한 고교생에게 주가 조작을 의뢰했다가 검찰에 적발되자 달아났다. 이들은 코스닥 기업 주식을 싼값에 사들인 다음 허위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인터넷에 기사가 오르면 인터넷 주식카페와 증권사 메신저에 유포해 주식 매수를 유도했다. 조폭도 싸움질만으론 살아남기 힘든 시대다.

인천 석남식구파 조직원 염모(35)씨는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해커를 고용해 경쟁업체를 분산서비스거부(DDos) 공격하다 지난해 적발됐다. 최씨는 경쟁 도박 사이트를 디도스 공격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고객이 몰릴 거라고 생각했다. 검찰은 "조직폭력배가 인터넷 불법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해커를 고용해 전문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디도스 공격을 감행한 사례는 처음이다"며 혀를 내둘렀다.

스마트한 조폭

날로 새로워지는 상황에 맞춰 조폭도 재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전국구를 표방하다 2009년 경찰에 일망타진된 이태원파는 외모와 학력으로 조직원을 뽑았다. 이태원파가 내건 조건은 키 175㎝ 이상, 대졸자 혹은 미남. 토익과 토플 등 영어시험 고득점자를 우대했다. 이태원파는 얼굴에 흉터가 있거나 거대한 몸집과 험상궂은 인상은 활동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얼짱과 몸짱을 우대했다.

사회 곳곳으로 진출한 조폭은 금융시장으로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모 폭력조직 두목 이모씨는 사채업자, 기업사냥꾼과 손을 잡고 벤처기업을 인수했다. 이들은 분식회계와 가장납입을 통해 회삿돈 306억원을 빼돌리고 주가를 조작하다 검찰에 적발됐다. 산업용 필터를 제조하던 이 업체는 자본 잠식으로 코스닥에서 퇴출됐고, 주식을 갖고 있던 개인 투자자는 600억원대 손해를 입었다.

익산 역전파 출신인 조모(49)씨는 사채를 통해 부동산신탁회사 다산 리츠를 코스피에 상장시킨 뒤 회삿돈을 빼돌리다 적발돼 징역 4년 선고를 받았다. 조씨가 10억원대 아파트와 2억원대 시계를 사는데 돈을 흥청망청 쓴 탓에 다산 리츠는 지난해 국내기업으론 최단기 상장 폐지 기록(9개월)을 세우며 무너졌다.

싸움보다 사업이 우선이기에 이제 조폭은 의리보다 돈을 우선시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폭이 운영하는 룸살롱도 마케팅 전략을 사용한다. 조양은에게서 양은이파 후계자로 지목된 김모(50)씨는 2009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강남 일대에 속칭 풀살롱을 운영하면서 매출 331억원, 이익 78억원 이상을 거뒀다. 시간에 맞춰 성매매까지 제공하는 기업형 풀쌀롱으로 번 돈을 활용해 불법 사채업에도 손을 댔다.

영악해진 조폭은 좀처럼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어디선가 사업가 행세를 하며 돈벌이에 열중하고 있다. 조폭 특성상 폭력이 사라질 리가 없지만 검찰과 경찰이 진화하는 조폭을 단속하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