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살랑대는 봄바람을 온몸으로 받으며 보리밭 사이의 좁은 황톳길을 헤치다가 전망대에 올라선다. 끝없이 펼쳐진 초록빛 보리밭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다. 너른 들판 위의 맑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나그네의 지친 영혼과 근심걱정을 한방에 날려 보내는 아름다운 정경이다.
이곳은 학원농장 일원에 펼쳐진 고창 청보리밭. 약 15만 평(약 50ha)의 넓은 구릉에 보리들이 자란다. 넓이는 김제 진봉반도의 보리밭이 이보다 20여 배 규모지만 여러 곳에 듬성듬성 흩어져 있어 산만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고창 청보리밭은 빈틈없이 빽빽하게 모여 짜임새 있는 풍광을 보여준다. 사실 보리밭만 펼쳐져 있다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고창 청보리밭에는 보리 말고도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다.
우선 도깨비의 횡포를 피해 호랑이들이 숨어들어 살았다는 전설이 어린 호랑이 왕대밭에는 대낮에도 해를 보기 힘들만큼 대나무들이 우거져 있으며, 대숲 사이에 해학적인 호랑이 모형도 앉아 있다. 이곳의 수종은 가구재, 건축장식재, 꽃병, 필통 등으로 활용되는 맹종죽으로 높이 10~20미터에 이른다. 중국 오나라에 살던 맹종이 한겨울 눈 속에서 죽순을 캐어 어머니에게 드렸다고 해서 맹종죽이라고 불리며 강남죽 또는 죽순대라고도 한다.
1960년대 초반부터 개척한 농장
보리밭 모퉁이에는 샛노란 유채꽃밭이 펼쳐져 정취를 돋운다. 초록과 노랑이 손잡고 그려내는 봄빛이 화사하기 그지없다. 유채꽃밭과 보리밭 옆에 마련된 앙증맞은 양떼목장도 운치를 더한다. 어린이들은 울타리 안에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양들을 보며 마냥 신기한 표정을 짓는가 하면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학원농장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 부부가 1960년대 초반부터 개척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오동나무와 삼나무를 조림하며 뽕나무를 재배하여 누에고치를 생산했다. 1970년대에는 한우 사육을 위한 목초를 재배했고 1980년대에는 수박과 땅콩을 심었다.
그러다가 1992년 5월 장남인 진영호씨가 귀농하여 부친의 뒤를 이었다. 처음에는 봄 작물인 보리와 가을 작물인 콩을 재배하다가 2000년대 들어 가을 작물은 메밀로 전환했다. 보리밭을 찾는 봄철 관광객은 꾸준히 늘었으나 가을철에 콩밭을 보러 오는 사람이 없어 꽃이 아름다운 메밀로 바꾼 것이다. 2004년 말에는 인근 여덟 마을과 연합하여 전국 최초로 '경관농업특구'로 지정되었다.
봄에는 보리밭, 가을에는 메밀꽃밭
메밀은 8월초부터 8월 중순 사이에 파종한다. 파종하고 약 30일 후부터 메밀꽃이 개화하여 열흘 정도 피어 있으므로 9월 내내 하얀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밭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셈이다. 보리를 수확한 뒤 메밀을 파종하기까지 약 2개월간의 공백기에는 해바라기를 심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학원농장은 영화 촬영의 명소로도 이름나 있다. 2005년 <엄마>를 시작으로 <웰컴 투 동막골> <도마뱀> <잘살아보세> <허브> <만남의 광장> <식객> <여름, 속삭임> 등 8편의 영화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학원농장 일원에서 펼쳐지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는 2004년에 시작했으며 9회를 맞이한 올해에는 4월 21일부터 5월 13일까지 23일간 열린다. 고창 청보리밭 축제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발생적 축제라는 점이다. 기획과 홍보를 통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여느 축제와 달리, 많은 사람들이 보리밭을 찾는 바람에 급기야 축제를 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은 전국 각지에서 버스를 타고 고창으로 온 뒤에 청보리밭 입구(청보리가든 또는 대정마을)로 가는 군내버스로 갈아탄다. 그러나 군내버스가 자주 다니지는 않으므로 시간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무장까지 버스를 탄 다음 택시를 이용한다.
# 맛있는 집
학원농장내 식당(063-564-9897)은 직접 재배한 보리를 이용한 보리비빔밥을 낸다. 각종 나물에 보리밥을 넣고 참기름과 고추장으로 비벼먹는 맛이 구수하니 토속적이다. 보리와 나물만으로는 영양의 균형을 이루기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생선구이, 두부조림, 어묵 등의 밑반찬을 곁들인다. 역시 직접 수확한 메밀을 활용한 메밀국수와 메밀전, 메밀묵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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