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선 열차를 타고 예미역에서 내린다. 예미역 앞 버스 정류장에서 운치리로 가는 마을(공영)버스에 오른다. 15인승의 이 작은 버스는 택배 차량 구실도 한다. 읍내의 가게로 연락해 주문한 물건을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가 받는 방식이다. 버스 기사에게 농으로 "택배비 안 받아요?" 했더니 피식 웃고 만다.
동강관리소를 지나 연포길과 동강로가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렀다. 예미역 앞에서 25분 걸렸다. 이제 버스에서 내려 걸어야 한다. 굳이 승용차를 버려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까닭은 거북이마을로 가는 만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걷는 게 제격인 듯싶어서였다.
왼쪽 연포길로 들어선다. 덕천리 원덕천마을을 지나고 물레재를 넘어 소사마을로 간다. 물레재는 옛날 고갯마루에 실을 뽑아내는 물레가 걸려 있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버스에서 내려 소사마을까지 1시간 30분쯤 걸었다.
하룻밤에 세 번 달뜨는 연포마을
1989년 소사마을에서는 선사시대 주거지 유물이 출토되어 약 3천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왔던 곳으로 밝혀졌다. 또한 1995~1996년 강릉대박물관 조사단은 철기시대의 돌무지무덤 6기를 발견했다. 이곳에 있는 돌무지무덤은 지배집단의 수장층 무덤으로 이곳에서 상당수의 주민들이 집단적인 공동체를 이루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소사마을에서 동강을 건너면 연포마을에 닿는다. 예전에는 줄배나 섶다리로 강을 건넜으나 이제는 튼튼한 시멘트 다리가 놓였다. 소사마을에서 연포마을은 걸어서 10분 거리다. 연포(硯浦)는 강물이 벼루에 먹물을 담아놓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연포마을은 '하룻밤에 세 번 달뜨는 마을'이라고 일컬어진다. 마을 초입에 들면 칼봉, 둥글봉, 큰봉 등 범상치 않은 세 봉우리가 앞을 막아서는데 세 번 달이 뜨는 것은 이들 때문이다. 휘영청 뜬 달이 세 봉우리 뒤에 숨었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고 해서 그리 일컫는 것이다.
떼몰이꾼들로 흥청거리던 시절, 연포마을에는 주막도 있었다. 동강의 수량에 따라 달라지지만, 이른 아침에 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이 연포마을에 닿는 시간은 대략 저녁 무렵이었다. 긴 여로에 따른 갈증과 허기에 지친 떼몰이꾼들은 주막으로 몰려들어 국밥을 안주 삼아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1971년 정선선 철로가 개통되자 뗏목이 할 일은 사라졌고 주막도 문을 닫았다.
연포마을에는 학교도 있었다. 1969년 1월 1일 개교한 예미초등학교 연포분교는 16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9년 9월 1일 폐교되었으며 2003년에는 영화 '선생 김봉두'가 촬영되었다. 연포분교는 2009 12월 연포생태체험학교로 리모델링되어 민박을 받는다.
연포에서 40분쯤 더 걸으니 시간이 멈춘 듯한 좁다란 찻길 끝에서 거북이마을이 손짓한다. 산 위에서 마을 앞 동강 백사장을 굽어보면 거북이가 기어가는 모습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또는 옛날 어느 효자가 아버지 시신을 묻으려고 땅을 팠더니 큰 바위가 나와 들어내자 거북이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8가구가 모여 살았다는 이 마을에는 이제 단 한 가구에 두 명만이 남아 있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서 47년째 사시는 이재화 할머니와 5년 전에 귀향한 30대 초반의 아들이 민박을 치며 나그네들을 맞는다.
아들에게 막걸리를 청했더니 산나물과 열무김치를 함께 내온다. 열무김치도 맛나지만 향긋한 산나물이 안주로 그만이다. 동강을 굽어보며 솟은 산봉우리를 마주하고 마시는 막걸리 도 꿀맛이다. 마루 위에서는 나물로 쓰일 비비추와 차로 끓일 단풍나무꽃을 말리고 있다. 이 집 소유인 아래쪽 밭에서는 주변 마을 주민들이 고추 모종을 심느라 분주하다.
# 찾아가는 길
제천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태백 방면 38번 국도를 따르다가 예미 교차로에서 유문동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동강관리소를 지나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연포길로 좌회전 뒤에 거북이민박 표지판을 줄곧 따라간다.
대중교통은 영동선 열차를 타고 예미역에서 내린 다음, 하루 5회 왕복하는 운치리 및 덕천 방면 버스로 갈아탄다.
# 맛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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