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은 마라톤이다."

월급 봉투를 받은 신입사원 장인수는 이를 악물었다. 대졸 입사 동기보다 월급이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고졸이란 사실이 서글펐다. 밀려드는 설움 속에서 그는 다짐했다. "직장생활은 한 순간에 모든 게 결정되는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제지회사에 다녔던 장인수는 스물다섯 살이었던 1980년 역동적으로 일하는 영업사원이 되고자 진로를 선택했다. 당시 주류회사는 탄탄했고, 영업사원은 꽤 괜찮은 직종이었다. 정부가 학력 철폐를 외치던 시절이라 학력이 입사에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그를 괴롭혔다. 임금과 승진에서 걸림돌이 됐고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족관계를 조사하는데 주눅이 들지 말란 뜻으로 대졸이라고 쓰기도 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 마음이 오죽 답답했을까. "왜 가족관계에 부모 학력까지 적어야 하냐"며 애를 태웠다.

고졸이란 딱지에 발목을 잡혔던 청년 장인수. 그는 남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더 많이 일했다. 주류업체 영업사원이 영업라인을 5개 정도 맡는데, 장인수는 무려 19개를 맡아서 서울 시내 곳곳을 누볐다. 이런 식으로 내공을 쌓다 보니 고졸 신화도 만들어졌다.

하이트맥주의 홍보 캠페인
비록 시작은 대졸 동료보다 뒤졌지만 결승선엔 고졸 장인수가 먼저 도착했다. 장인수(57)는 2007년 하이트주조ㆍ주정 대표이사가 됐다. 하이트맥주는 전북 지역 소주업체 보배소주를 인수해 이름을 하이트주조로 바꾸고 영업의 달인을 사장으로 선택했다.

장인수는 2010년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오비맥주 식구가 됐고, 현장 위주 영업을 앞세워 만년 2위 오비맥주 점유율을 2011년엔 5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소주와 맥주는 다르지만 영업 비결은 통했다. 오비맥주 대주주인 미국계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이사회는 6월 20일 영업의 달인 장인수 부사장을 새로운 사장으로 선택했다.

장 사장은 오전 11시 팀장급 이상 간부에게 긴급 전화회의를통해 사장 선임 소식을 전달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 영업이라고 배웠다. 단순 수치상 점유율에 연연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고객 감동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겠다." 취임식은 생략한 채 전화로 취임사를 전달했다.

장 사장은 회의를 싫어한다. 영어 사용도 꺼린다. 오비맥주에 입사할 당시 주주와 당시 사장에게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영어를 사용하지 않겠다. 둘째, 회의를 하지 않겠다. 마지막으로 "믿음을 달라"였다. 장 사장은 시간을 아껴 발로 뛰어야 하는데 회의를 한답시고 사람을 모으면 시간과 비용 낭비라고 생각했다. 회의를 없앤 대신 자신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갔다. 회의를 없애다 보니 자동차 주행거리가 2010년에만 7만㎞ 이상이었다.

영어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미국계 주류회사 사장이 영어와 벽을 쌓겠다니….

오비맥주의 홍보 캠페인
오비맥주 영업사원은 BNO(Big Night Outㆍ유흥업소), OTM(Off Trade Marketㆍ가정소비자) 등 영어 약자를 사용했는데 장 사장은 "오비맥주가 거래하는 업소와 도소매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상대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맥주를 파는 데 영어가 필요없다"던 장 사장은 "거래처와 말이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진솔한 영업이 되겠느냐"면서 "나부터 영어를 쓰지 않겠다. 회식 자리에서도 영어를 쓰면 벌주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믿음을 달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소탐대실하지 않도록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아도 기다려 달라는 의미였다. 장 사장은 소주 영업과 달리 맥주 영업에선 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소주는 오래 보관해도 처음 그 맛인데, 맥주는 신선도가 맛을 좌우한다.

"맥주는 시간이 지나면 맛이 떨어진다. 그만큼 신선도가 맛을 좌우한다. 제일 맛있는 맥주는 공장에서 바로 나온 맥주라는 말도 있다. 2010년 1월 오비맥주 영업을 맡으면서 신선도 지키기에 올인했다. 월말에 출고량을 늘리기 위해 도매상 창고에 쌓아두는 종전 밀어내기 영업을 근절해야만 했다."

숫자로 모든 걸 말하는 영업사원에게 숫자에 연연하지 말라고 하니 처음엔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재고 물량을 줄이니 소비자는 신선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됐다. 장 사장은 최근 "카스가 바뀌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밀어내기 영업을 개선하자 신선도와 청량감이 높아지고 소비자는 품질이 좋아졌다는 반응을 보였다.

지난해 당시 장인수 부사장이 서울 연지동 북서울 영업점에서 갓 입사한 인턴들과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리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밀어내기 영업이 사라지자 매출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2010년 1월 45.54%였던 오비맥주 점유율은 2월에 42.66%로 줄었다. 비록 매출은 줄었지만 맛이 좋아졌다. 조금씩 오르내리던 점유율은 6월에 45.86%를 기록했다. 밀어내기 영업을 없앤 상황에서 예전 점유율을 넘어섰으니 이때부터 장인수식 영업이 꽃을 피운 셈이다. 2011년에는 맥주시장에 지각변동이 벌어졌다. 무려 15년 동안 만년 2위였던 오비맥주가 점유율 50.52%를 기록하면서 하이트진로에 내준 1위 자리를 되찾았다.

영업 사령관이었던 강 사장은 바닥 영업을 강조했다.

"오비맥주는 그 동안 신사적인 영업을 해왔다. 주로 도매사를 상대로 한 1차 영업에 치중하다 보니 2차 거래선(업소ㆍ소매점)에 대한 '바닥 영업'에 소홀했다. 나부터 강남역, 홍대, 신촌, 신천역, 노원역 등 업소 밀집지역을 다니며 바닥 영업을 강화했다. 지금도 신입사원들이 들어오면 누구나 영업을 경험하게 한다. 영업을 모르면 안 된다는 신념이다. 최근 입사한 생산직들을 1주일 간 현장영업을 시켰다."

장 사장은 "2등은 1등보다 더 뛰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의 영업 철학은 '더'라는 부사로 압축할 수 있다. 매달 1일 전자우편으로 영업사원을 격려하고, 주류 도매사 대표 1,400명에게 휴대전화 문자를 보낸다. 어버이날엔 원로 도매사 사장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고, 대보름엔 오곡밥을 지어 선물했다. "영업은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외친 장 사장은 부하 직원에게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가슴을 열고 다가가라"고 강조한다.

솔선수범이 몸에 밴 장 사장은 후배에게 영업이 전쟁이라면 이스라엘 장교를 본받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돌격 앞으로"를 외치면 병사 사망률이 높아진다. 결국 병사들이 죽는 게 두려워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장교처럼 '나를 따르라'고 외치고 자신이 직접 나서야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뒤를 따른다는 뜻이다. 고졸 신화로 손꼽히는 장 사장은 "회사 생활에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다"면서 "업무에 맞는 능력과 적성을 갖추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순위나 수치는 언제나 바뀔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요즘 우리 직원의 눈빛만 봐도 자신감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점유율 경쟁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상대사(하이트진로)를 의식하지 않고 초지일관 뚜벅뚜벅 갈 것이다. 자신감을 갖되 자만하지 않겠다. 좀 더 겸손하겠다."

점유율 박빙의 1·2위 '맥주전쟁'
오비 vs 하이트 불과 1.04% 차이
CF대결도 치열 현사장 모두 진로 출신
맥주시장이 들썩이고 있다.

전통의 맥주명가 오비맥주(옛 동양맥주)가 1996년부터 맥주시장 1위를 달리던 신흥강자 하이트진로(옛 조선맥주)에 뺏긴 선두 자리를 되찾았다. 오비맥주는 지난해 시장 점유율 50.52%를 기록해 하이트진로(49.48%)를 1.04% 차이로 제쳤다. 본격적인 맥주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동양맥주는 80년대까지 맥주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1991년 두산전자 구미공장에서 인체 유해 물질인 페놀 원액이 유출돼 낙동강을 오염시키자 두산전자 불매운동에 이어 두산그룹 계열사였던 동양맥주 버리기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쟁사였던 조선맥주와 진로쿠어스맥주가 각각 하이트와 카스를 앞세워 동양맥주의 아성을 무너트렸다.

지하 150m 천연암반수로 만든 맥주 하이트는 1996년부터 조선맥주를 맥주시장 1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오비맥주는 하이트진로 계열사 하이트주조 장인수 사장을 영업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하면서 선두를 탈환했다.

본격적으로 불이 붙은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의 맥주 전쟁은 CF에서도 이어졌다. 오비맥주는 드라마 <해를 품은 달>로 인기를 끈 배우 김수현을 카스 광고모델로 내세웠고, 하이트진로는 동계올림픽 영웅 김연아를 하이트 광고모델로 앞세웠다. 김수현과 김연아는 프로스펙스 운동화 TV 광고에 함께 출연했지만 맥주 광고에선 각자 광고주를 위해 적으로 만났다.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의 맥주 전쟁을 이끄는 사령탑이 소주 명가 진로 출신이란 점도 눈길을 끈다. 오비맥주 장인수(57) 사장과 하이트진로 이남수(60) 관리총괄 사장은 진로 출신으로 한솥밥을 먹었으나 장 사장이 고졸 출신으로 최고경영자가 된 영업의 달인이라면 이 사장은 서울대를 졸업한 관료 출신으로 관리의 귀재라는 차이가 있다.

김수현과 김연아의 대리경쟁, 영업의 달인과 관리의 귀재가 펼칠 마케팅 경쟁이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의 맥주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