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다. 내 처자가 붙잡혀 노비가 될지도 모르니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깨끗이 죽는 편이 낫겠다."

백제 계백 장군은 처자식을 칼로 베고 나서 황산벌(충남 논산시 연산 벌판)로 떠났다. 계백이 이끈 백제 결사대 5,000명은 서기 660년 7월 9일 황산벌에서 김유신이 지휘하는 신라 5만 대군과 맞섰다. 백제 결사대는 네 번을 싸워 네 번 모두 이겼다.

신라 장군 흠춘은 사기를 돋우고자 아들 반굴을 홀로 적진에 뛰어들게 했다. 반굴이 전사하자 품일의 아들 관창도 홀로 적진에 돌진했다. 화랑 반굴과 관창의 시체를 확인한 신라군을 이를 악물고 싸워 백제 결사대를 무찔렀다. 계백은 황산벌에서 전사해 충절의 상징이 됐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고 설명한다. 어차피 백제가 질 싸움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의자왕은 무능하고 백제 군사는 5,000명에 불과했을까?

백제군은 5만명이었으나 방어 체계에 따라 지방에 주둔했다. 신라군은 5월 26일 경주에서 출발해 6월 18일 경기도 이천에 도착했다. 진로만 놓고 보면 고구려 침략으로 보였지만 신라는 백제에 칼을 겨눴다. 동쪽에선 당군이 쳐들어오고 서쪽에선 신라군이 침략하는 형국이었다.

백제 조정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은 전략적 요충지인 탄현을 통과했다는 게 통설이다. 하지만 의자왕의 방어전략이란 해석도 있다. 서해를 넘어온 당군 13만명은 신라 보급품이 없다면 섣불리 수도 사비성을 공격할 수 없다. 따라서 지방에 있는 백제군이 사비로 집결할 때까지 신라군을 막고자 계백과 결사대를 황산벌로 보냈다는 의미다.

황산벌이 뚫리자 의자왕은 사비성을 비우고 옛 수도 웅진성으로 이동했다. 민족사학자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 "웅진성 수성대장(예식)이 왕을 잡아 항복하라 하매 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끊기지 않았다"고 적었다. 웅진방령 예식의 배신이 백제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다는 의미다.

백제 부흥 운동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지방에서 사비로 집결하던 백제군은 의자왕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국사 교과서는 이들을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방 저항 세력이라고 표현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