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자동차 도시로 손꼽히는 디트로이트에는 남북을 가르는 8마일 로드(8 mile road)가 있다. 흑인이 1920년대 시내 중심지로 몰리자 백인은 북쪽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8마일 로드를 만들었다. 백인은 1950년대 이 길을 따라 높이 2m짜리 차단벽을 설치했다. 부유한 백인은 교외(suburb)에서 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가난한 흑인은 도심에서 살면서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제가 사라졌지만 흑인은 '검둥이'에 불과했다.

도로를 경계로 쌓였던 인종 갈등은 1967년 7월 23일에 폭발했다. 백인 경찰이 무허가 술집을 단속하면서 흑인 손님 80여 명을 모조리 체포했다. 항의 시위는 대규모 폭동으로 번졌고, 닷새 동안 43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이 다쳤다. 흑인 청년은 '억압을 받는 환경을 없애려면 폭력이라도 사용해야 한다'고 외쳤다. 흑인 폭동은 디트로이트를 비롯해 23개 도시에서 일제히 벌어졌다.

당황한 미국 정부는 사회 무질서 대책 국가자문위원회(커너 위원회)를 만들었다. 커너 위원회는 1968년 2월 29일 "미국은 두 개의 사회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흑인사회, 하나는 백인사회다. 두 사회는 분리되어 있고 불평등하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발표했다. 흑인 폭동의 원인은 백인 사회의 인종주의라고 못박았다. 흑인에게 눈총을 보냈던 백인 사회는 디트로이트 흑인 폭동을 통해 흑인과 저소득층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인종 차별을 없애고 일자리를 창출하자." 커너 위원회 개혁안은 이상적이었지만 폭동이 잠잠해지자 정치권은 모른 척했다. 백인은 흑인 폭동을 계기로 서둘러 디트로이트에서 벗어났고, 일본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자동차 산업은 점점 쇠퇴했다. 흑인만 남은 도심 한복판에 인종차별은 사라졌지만 일자리는 줄었다. 한때 200만명에 육박했던 디트로이트 인구는 올해 70만명까지 줄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은 개혁은 공수표에 불과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