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군대는 1907년 8월 1일 해산됐다.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는 7월 31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군부대신 이병무를 앞세워 창덕궁에서 군대를 해산하라고 융희 황제(순종)를 협박했다. 매국노 이병무는 이튿날 아침 군대 해산을 발표했고, 하세가와 사령관은 장교를 해산 대상에서 제외했다며 병사들을 평온하게 해산하라고 당부했다. 병사에게는 훈련을 이유로 비무장한 채 오전 10시까지 동대문에 있는 훈련원에 모이라고 명령했다.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군인은 국가를 위하여 경비함이거늘 이제 외국이 침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군대를 해산한다는 건 황제의 뜻이 아니라 적신이 황명을 위조함이니 내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며 대성통곡했다. 박승환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했으니 만 번 죽더라도 아까울 게 없다(軍不能守國 臣不能盡忠 萬死無惜)"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박승환 참령이 자결했다는 소식에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 장병은 일본군에 저항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일찌감치 탄약고를 장악했던 터라 총알이 부족했다. 남대문에서 시작한 총격전은 백병전으로 이어졌다. 총격전을 목격했던 미국인 의사 애비슨은 '탄약만 충분했다면 한국군이 이겼을 텐데'라고 평가했다. 대한제국 군인은 총알이 떨어지자 밤 11시께 무릎을 꿇었다. 흩어진 병사는 의병에 합류했지만 군대 해산은 망국으로 이어졌다.

헤이그 밀사를 이유로 강제 퇴위된 고종 황제는 군대 해산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나라 살림이 어려웠지만 고종은 미국제 개틀링 기관총, 영국과 독일산 대포를 사들였다. 힘이 없으면 나라를 뺏긴다는 생각에 최신 무기를 사서 군에 보급했다. 그러나 친일파 장교들이 중화기를 일본군 진영으로 빼돌린 터라 고종이 어렵사리 마련한 기관총과 대포는 일본군과 맞설 때 사용되지 못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