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紅衛兵)에게 명하노니 곳곳에 숨어있는 적들을 찾아내 처단하라."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렇게 외치자 학생들이 스스로 모이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을 위한 붉은 위병(紅衛兵)을 자처한 이들은 1966년 중국 전역을 피로 물들였다. 홍위병은 8월 27일부터 북경 남부 대흥현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마오쩌둥을 등에 업은 홍위병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홍위병은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을 가르쳤던 교사와 교수를 처형했다. 베이징병원 의사에게 숨긴 재산을 내놓으라며 배를 갈라 간장을 부었고, 인민해방군 장성과 베이징 시장을 붙잡아 옷을 벗기며 모욕했다.

홍위병은 옛 사상과 문화ㆍ풍속ㆍ습관 타파를 외쳤다. 홍위병은 유학을 봉건주의 상징으로 규정해 사당을 불사르고 동상을 부쉈다. 마오쩌둥의 정적 린뱌오(林彪)가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공자(孔子)는 반동분자로 몰려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의 대상이 됐다. 홍위병이 수정주의자로 몰아붙이면 목숨을 유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1959년부터 자연재해가 겹쳤고, 1960년부터 소련의 경제원조가 끊겼다. 대약진 운동 실패로 약 4,000만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마오쩌둥이 권력을 내놓자 자본주의 정책을 일부 수용한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마오쩌둥은 1966년 홍위병을 앞세워 사회주의 계급투쟁 문화혁명을 벌였다.

홍위병은 20세기 대중 광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오쩌둥 사상의 대변자를 자처한 홍위병은 서로 싸우다 분쟁을 벌였고, 결국 공산당은 1967년부터 홍위병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했다. 토끼가 사라지면 사냥개가 필요하지 않듯(兎死狗烹) 정적이 모두 제거되자 홍위병도 골칫거리에 불과했다. 권력자의 총애가 영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혈기만 왕성했던 홍위병은 몰랐다.



이상준기자 jun@hk.co.kr